뉴욕 핫도그
살다 보니 이런 날이 나에게도 왔다. 빡빡한 스케줄에 몸도 마음도 고되었던 해외 출장의 끝에 꿈같은 이틀의 휴가가 생겼다. 그것도 나의 뉴욕에서… 물론, 고생한 나를 위해 회사가 눈물겨운 배려나 깜짝 선물을 준 것도 아니다. 복잡하게 꼬인 일들 덕분에 누군가는 이곳에서 이틀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고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내가 되었을 뿐이었다.
뉴욕에서 회사를 다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복권이라도 당첨된 듯 호들갑을 떨며 저녁 약속을 잡았다. 그런데 이런 걸 완벽한 타이밍이라고 해야 하나? 때마침 시카고에 사는 친한 언니마저 공짜 비행기표가 생겨 오늘 뉴욕으로 온다고 했다. 그 순간 나는‘꺄아~’하고 정신 나간 여인처럼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깡충깡충 뛰며 소리를 질렀다. 몇 시간 후 시카고에서 날아온 언니와 맨해튼의 어느 카페에서 만난 뒤 낙엽이 뒹구는 뉴욕의 거리를 다정히 걷고 있었다. 그런데 언니가 좀 이상했다. 간간히 작은 한숨을 내쉬는 거였다. 이것은 분명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불현듯 떠올라 마음을 괴롭히는 ‘몹쓸 고민’이 있다는 신호였다. 나는 언니가 이 고민을 잠시라도 떼어놓기 위해 뉴욕으로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 무슨 고민 있구나. 얼굴에 다 쓰여있거든. 나한테 시원하게 털어 나봐.”순간 나를 보는 언니의 눈은 내 마음을 알아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있었다.
언니에게는 몇 년째 썸을 타는 중국인 남자 친구가 있었다. 미국 대학에서 중국문학을 가르치는 말수가 적은 그분은 쾌활하고 애교가 많은 언니에게 처음에는 자상한 오빠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 만큼 흘렀고 좋아한다는 사인도 보낼 만큼 보냈는데 이 답답한 중국 교수님이 이도 저도 아닌 관계를 이어가며 희망 고문을 했다. 언니는 정말 별다른 마음이 없다면 이제 그만 만나자고 으름장도 놓고, 술을 마시고 한밤중에 교수님의 집으로도 쳐들어 가 울기도 했지만, 그분의 반응은 한결같았다고 했다. “지금 우리 사이에 문제가 있는 거야?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하고 학생을 타이르듯 침착하게 말하며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짓는다고 했다. 나는 언니의 이야기만으로도 벌써 속이 터지는 것 같아 당장 때려치우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나는 이왕 뉴욕에 온 김에 기분전환이나 확실히 하자고 했다. 언니의 손을 잡고 다시 씩씩하게 다운타운을 걷다 타로 점과 손금을 봐준다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나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뉴욕의 타로는 어떠할지 그리고 내가 해주지 못한 언니의 연애상담을 어쩌면 몇 장의 타로카드가 대신해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언니에게 재미 삼아 타로점을 보자고 졸랐다. 벨을 누르자 뚱뚱한 스페인 아주머니가 문을 열어주었고 거실의 소파로 우리를 안내하고 검정 천이 깔린 테이블 위에 타로 카드를 펼쳤다. 언니는 그간의 연애사를 짧게 털어놓고 이 사람을 계속 만나야 하지는 말아야 하는 지를 물었다. 그녀는 언니가 골라낸 타로카드를 차례로 뒤집으며 말했다. “그 사람은 당신 짝이 아니군요. 당신만큼 당신을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의 밝은 에너지가 그 사람 덕분에 어두워지고 있어요.”언니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그 반짝임 속에는 그간의 서글픔이 묻어 있었다. 마지막 카드를 뒤집으며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지금 당신 주변에 당신을 짝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이 당신의 진짜 짝인지도 몰라요. 잘 생각해봐요. 그 사람 이름의 이니셜에‘L’ 혹은‘M’이 있어요.”
점집을 나오자마자 우리는 갑자기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뉴욕에서 처음 본 어설픈 타로 점도 그리고 마지막에 커다란 구슬을 꺼내 문지르던 아주머니의 심각한 얼굴도 너무 웃겼다. 저녁 약속을 한 레스토랑에서 뉴욕의 그녀와 셋이 된 우리는 실컷 먹고 마시고 수다를 떨었다. 당연히, 오늘 수다의 핵심은 언니와 내가 본 이 어이없는 타로 점과 언니의 새로운 사랑이 될 L과 M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우리는 와인을 두 병이나 마셨는데도 신기하게 취하지도 않았고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소호의 골목을 누비며 큰소리로 웃고 떠들었다.
나는 문뜩‘섹스 앤 시티’의 주인공인 캐리가 데이트 상대와 말다툼을 하고 길거리를 헤매다 사 먹던 핑크 핫도그가 생각났다. 나는 그녀들의 손을 잡고 핫도그 가게로 향했다. 우리는 핫도그를 사 들고 노란 가로 등불이 비치는 기다란 벤치에 앉았다. 나는 핫도그를 한입 크게 베어 물며… 이 핫도그가 우리에게 핑크 빛 행운이 되어 아직도 나타나지 않은 소중한 인연을 꼭 찾아 주길 기도했다. 1달러의 핑크 빛 행운이 될 뉴욕 핫도그 - 언젠가 다가올 우리의 사랑을 위해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