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리 라이스 수프
나는 필라델피아로 이사를 온 후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고 그해의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새로 시작한 스터디 그룹 멤버들과 학생회관에 모여 커피 타임을 했다. 그날따라 나는 오후의 아르바이트가 취소되어 친구들과 느긋하게 수다를 떨다 학생회관을 나와 도서관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등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듯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미스, 미스… 잠깐만 거기서요.”멈춰서 고개를 돌린 나를 향해 아담하고 동글한 몸집의 흙인 할머니가 숨을 헐떡이며 뛰어왔다. 그리고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혹시 지갑을 떨어뜨리지 않았어요? 내가 아가씨 뒤에서 이 지갑을 주웠는데 말이야…”하고 검붉은 색의 길쭉한 지갑을 내 눈앞에 꺼내 들었다. 내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돌아 서자 할머니가 내 팔을 잡았다. 그리고 빙긋이 웃으며 또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이 지갑에 엄청난 돈이 들어있었어요.”그렇다면 일단 학교 치안 센터에 갖다 주는 편이 좋지 않겠냐고 나는 말했다. 할머니는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자신에게 더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니 근처에 주차해 놓은 자신의 차로 가서 이야기를 좀 더 하자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겁도 없이 밤낮으로 범죄가 넘치는 그곳에서 낯선 흑인 할머니를 따라 그것도 은밀한 공간인 차로 갈 생각을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 당시는 그랬다. 이 인상 좋은 흙인 할머니가 나에게 어떤 나쁜 짓을 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고 아직 이른 시간이니까 할머니와 수다를 조금 더 떠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할머니의 차는 학교 앞의 도로변에 주차되어 있었고 그 차 안에는 서글서글한 눈매의 흙인 아저씨와 웃음소리가 호탕한 흙인 아주머니가 이미 타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어디서 이런 천사 같은 소녀를 데리고 왔나며 호들갑을 떨었고 할머니는 속삭이듯 모두에게 말했다. “이 지갑의 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 인지도 몰라요. 경찰서에 가도 주인을 찾을 수도 없는 버려진 돈이니 우리가 이것을 사이좋게 나눠 쓰면 어떨까?”나는 순간 섬뜩한 기분이 들었지만 여전히 인상 좋은 할머니와 선한 미소를 짓는 아저씨와 손뼉을 치며 기뻐하는 아주머니를 보며 나도 모르게 마음을 놓고 말았다. 그러자 전직 은행원이었다는 아주머니는, 이 돈을 세탁하기 위해서 각자 자신이 가진 돈을 조금씩 모아서 이 돈과 썩어 입금한 후, 다시 돈을 찾으면 된다고 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나는, 그 순간 경제학 기초강의에서 들은 적이 있는 미국의 통화 제도를 떠올리며 바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제일 먼저 아주머니가 다음에 할머니와 아저씨 그리고 내가 돈을 찾기로 했다. 그들은 서너 군데의 은행을 돌며 순서대로 돈을 찾았고, 마지막으로 학교 근처의 은행 앞에서 나를 내려주었다. 최근에 학비를 수표로 몽땅 내고 남은 돈이 얼마 없었던 나는 큰 부담 없이 은행으로 갔다. 그런데 내가 쓴 수표가 아직 은행에 접수되지 않아 학비가 고스란히 계좌에 남아있었다. 잠깐 고민을 했지만 저들이 나를 속일 것 같지 않았고, 어쩌면 이것 또한 할머니의 말처럼 하늘이 나에게 준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다. 아주머니는 돈을 찾아 은행 밖으로 나오는 나를 보자 차문을 열고 나와 돈이 든 봉투를 받아 들었고, 다른 봉투를 나에게 건네며 일단 이 돈부터 내 계좌에 입금하고 오라고 했다. 나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봉투를 받아 들고 은행 문을 여는 순간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손에 쥔 봉투를 급히 열어보자 그 안에는 하얀 종이 뭉치가 가득 들어있었다. 당황한 나는 은행 경비원의 손을 잡고 황급히 차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지만, 그들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다리에 힘이 빠진 나는 풀썩하고 도로 위에 주저앉고 말았다.
은행 경비원은 나를 일으켜 세워 벤치에 앉히고 경찰에 신고를 했다. 다행히 함께 한참을 차 안에서 이야기를 하던 그들과 나를 목격한 주변 사람들이 있었고 그런 그들을 이상하게 생각하던 청소부 아저씨가 나의 진술에 큰 도움을 주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찰서라는 곳에 갔다. 그것도 한국이 아닌 필라델피아에서… 흑인 조사관의 경찰차를 타고 두꺼운 철창문이 있고, 배가 나온 경찰들이 수시로 왔다 갔다 하는, 미국 영화에서 본 듯한 경찰서로 가 한 시간이 넘도록 힘겨운 이야기들을 쏟아내야 했다. 흑인 조사관은 부들부들 아직도 손을 떨며 하얗게 질린 나를 경찰차로 기숙사 앞까지 태워다 주며 말했다. “이곳이든 그 어디서든 자신에게 생긴 돈을 순수하게 나눠 갖자고 하는 사람은 결코 없어요. 그러니 다음부턴 절대 그런 말은 듣지도 믿지도 말아요. 그래도 무엇보다 다행인 건 당신이 무사하다는 거예요. 돈은 빨리 잊어요. 인생의 교훈에는 레슨비가 필요한 법이라고 생각하세요.”그리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 후 나는 한동안 기숙사 밖을 나가는 것도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두려웠다. 밤마다 그날의 일들이 또렷하게 떠올랐고 그 후에 몰려드는 공포감과 자책감을 나는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나는 온몸에 한기를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식은땀이 축축하게 나고 머리에서는 열이 났다. 젖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을 나는 가까스로 일으켜 세우고 근처 약방으로 가 해열제와 감기몸살약을 샀다. 그리고 무엇이든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카페테리아로 가 막 끓인 따끈한 칠리 라이스 수프를 샀다. 까칠하게 말라 붙은 입 속으로 매콤한 수프를 후후 불어 억지로 떠 넣었다. 텅텅 빈속으로 떨어진 수프 한 숟가락이 따뜻한 파장을 일으키며 온몸을 흔들어 깨웠다.‘그래… 힘을 내자. 다시는 이런 일을 겪지 않으면 그만이고 레슨비 한번 거하게 냈다고 생각하자.’ 나는 쉬지 않고 수프를 떠먹었다. 몸도 마음도 두려움으로 얼어붙는 나를 따뜻하게 데워주던 칠리 라이스 수프 - 악몽 같았던 그날의 기억을 모두 떨쳐 버리고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