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프 집 노가리
몇 년 만에 회사에서 대대적인 신입사원 공채를 했다. 어려운 경기 덕분에 그동안 줄곧 후배가 없었던 나에게, 처음으로 나를‘선배님’이라고 부르며 살갑게 따르는 녀석들이 한꺼번에 생겼다. 각 팀마다 신입사원들이 배치가 되었고 우리 팀에는 키가 나보다 한 뼘이나 큰 남자 디자이너가 내 옆자리로 왔다.
나는 솔직히 여자 후배가 오기를 내심 바랬다. 그 당시 우리 회사는 여자보다 남자가 월등하게 많았고, 아무리 챙겨주고 잘해줘도 남자 선배들 틈에서 느끼는 이질감과 불편함은 어쩔 수가 없었으니까. 심지어 밥 먹는 속도도 문제였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도 나를 제외한 팀원들은 십 분이면 뚝딱하고 식사가 모두 끝났다.
매너가 좋은 팀장님은 팀의 유일한 여인인 나를 위해 꼼짝 않고 식탁 앞을 지키셨고, 슬슬 눈치도 보이고 마음이 다급해진 나는 허겁지겁 밥을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런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급히 먹은 밥에 체하고 말았다. 차라리 점심을 건너뛰는 것이 속 편했지만 그때만 해도 직장의 팀워크는 다 같이 점심을 먹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기에 그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날도 급하게 먹은 점심 탓에 속이 더부룩하고 갑갑해진 나는 회의실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연신 가슴을 두드렸다. 그때 어디선가 부스럭부스럭 인기척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회의실 한구석에 의자 4개를 나란히 붙이고 그 위에 누군가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이번에 새로 들어온 다른 팀의 신입 여자 후배였다.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회의실을 나가려는 순간 그녀가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선배님’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나를 불러 세웠다. 처음으로 나란히 앉아 커피 한잔을 마시며 그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나보다 예민한 그녀는 내가 느끼는 어려움의 열 배는 더 겪고 있는 듯했다. 그나마 나는 외향적인 성격이라 툭하면 직속인 남자 선배에게 불만을 털어놓기도 하고 딸바보 인 팀장님 덕분에 가끔은 홍일점의 혜택을 누리기도 했지만, 그녀는 철학도 다운 내성적인 성격에다 모든 것이 어려운 파릇파릇한 신입사원이었고, 게다가 같은 대학 선후배로 라인업이 된 ‘군기 잡힌’ 팀원들 덕분에 더 힘들어했다.
회의실에서 끝낼 수 없는 분통 터지는 이야기들이 그녀의 새침한 입술에서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남은 이야기는 퇴근 후에 맥주라도 한잔 하면서 실컷 쏟아 내기로 하고, 우리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날도 밀려오는 일들을 쳐내기 정신이 없었지만 저녁 10시를 넘기고 간신히 회사 앞 호프집에서 다시 조우했다. 차가운 생맥주 두 잔과 바삭바삭하게 구워 씹는 맛이 그만인 노가리를 안주로 주문했다. 그녀와 나는 맥주를 시원하게 넘기며 그동안 마음속에 쌓아 놓기만 했던 답답했던 각자의 사연을 주거니 받거니 언성을 높여가며 털어놓았다. 어느덧 새벽 한 시가 다 되어 살짝 취기가 오른 그녀와 헤어지며 ‘좋은 선배는 내가 겪은 불편을 후배가 겪지 않게 해주는 사람’이라던 누군가의 이야기가 문뜩 떠올랐다.
그 옛날 내가 보냈던 힘들었던 그 시간을 그녀가 지금 똑같이 반복하는 듯한 생각이 들어 마음이 무거웠다. 그녀와 내가 처음으로 속 시원하게 뜯었던 호프집 노가리 – 서로를 위로하며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