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그리고

이별의 육개장

by anego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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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누군가의 첫사랑일지도 모른다. 새침하게 웃는 얼굴, 햇빛에 찡그린 얼굴, 주근깨가 난 동그란 얼굴, 꾸벅꾸벅 조는 새하얀 얼굴… 우리 옆을 흔하게 스쳐지나가는 그 평범한 얼굴들에게, 누군가는 첫눈에 마음을 사로 잡히고, 순정한 그 마음에 지워지지도 않는 첫사랑이라는 흔적을 남기고, 평생을 그 사람을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른다. 첫사랑에 빠지고 만 그런 수상한 날에는… 정말로 환하게 눈부신 햇살이 그 상대에게만 신비스럽게 쏟아지니까.


대학시절부터 나를 짝사랑하던 후배가 있었다. 그저 스무 살, 그 순박한 눈에, 멀대처럼 큰 키 말고는 내세울 것도 없는 내가 뭐라고, 첫눈에 든 사랑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같은 문과대를 다닌 덕에 오고 가며 마주친 적은 있었겠지만 난 그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4학년 겨울방학 내내, 어렵게 합격한 광고회사의 인턴으로 정신없던 시절, 퇴근시간에 만난 과 동기가 내 앞으로 온 편지 몇 통을 챙겨 왔다. 힐끔 보니 발신자의 주소가 무슨 부대의 누구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또 군대 간 과 동기중 누군가가 내 이름을 자신의 전우에게 팔아 치웠구나 하고 생각했다. 남학생의 수가 거의 공대 수준인 우리 과의 몇 안 되는 여인들에겐 흔히 있는 일이었다. 무심코 가방 속에 편지들을 구겨 넣고, 사회 초년생의 신세한탄을 안주 삼아 얼큰하게 취해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문뜩 편지 생각이 났다. 술기운에 졸린 눈을 비비며 읽어 내려 간 편지에는, 갑자기 바뀐 군대라는 답답한 환경 덕에 무척이나 힘들고 외로운 이등병의 일상이, 한편이 다큐처럼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당신은 내가 누군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난 당신을 매일 만났고 당신이 자주 가는 그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곤 했어요. 지금은 그럴 수 없어서 조금 슬퍼요.’하고 또박또박 쓰여 있었다. 왠지 이 수상하고 로맨틱한 마지막 몇 줄에 마음이 찡했지만 솔직히 답장을 하고 싶은 생각은 들진 않았다. 그 후로도 그에게서 몇 통의 편지가 더 왔고 제대를 알리는 마지막 편지에 동봉해 보낸 사진을 보고 난 깜짝 놀랐다. 내 옆자리에서 교양수업을 함께 들었던, 내 곁을 수십 번도 더 우연히 스쳐 지나갔던, 유난히 키가 크고 얼굴이 까맸던 과 후배의 친구였다. 순간, 약간의 감동과 미묘한 설렘이 내 마음을 흔들었지만, 날마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과다한 업무와 계속되는 야근에 시달렸던 나는, 그저 대학시절의 풋풋한 추억으로 넘기고 금세 잊어버렸다.


쏜살같이 삼 년이 또 흘렀고 대리로 막 승진한 나는 팀의 막내로 오게 될 신입사원에 대한 기대로 한껏 들떠 있었다. 팀원들과 수다를 떨며 구내식당으로 들어서는 그때, 정장을 입은 신입사원들의 무리 중에서 제일 키가 큰 누군가 놀란 눈으로 나를 빤히 처다 봤다.‘누구지? 내가 아는 사람인가?’하고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식판을 집어 들자, 내 머릿속에는 까마득한 사진 속의 그 얼굴이 퍼뜩 떠올랐다.‘아, 그다. 그 편지들의 주인공.’ 한 번에 나를 알아보고 동그란 안경 너머로 눈물마저 글썽이는 그의 곁을 또 스쳐 지나가면서, 나는 그와 아주 잠깐 동안 눈이 마주쳤다. 그는 그렇게 첫사랑을 아주 우연히 기대하지도 않았던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 후로, 그의 첫사랑을 향한 애틋한 구애가 시작되었다. 그저 그는 이 모든 걸 운명이라고 믿는 듯했다. 나 또한, 내가 까맣게 잊었던 대학시절의 나를 선명하게 기억해 내며 마냥 즐거워하는 그가 기특하고 감동스러워서, 회사 근처에서 점심을 같이 먹거나, 늦은 퇴근길에 커피를 마시거나, 틈틈이 짬을 내어 짧은 데이트를 한 적이 있었지만, 나는 그 당시 너무나 바빴고, 누구보다 일을 잘하고 싶었고, 항상 어딘가에 정신이 나가 있었고, 피곤하고 무거운 몸은 부족한 잠을 간절하게 원했다. 나는 그의 마음을 받아줄 여유도 사내 연애라는 해프닝을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일 년이 지나고 난 다른 회사로 이직을 했고, 그도 새로 옮긴 회사에서 만난 여인과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첫사랑이란 그저 그렇게 잊어지는구나’하고 생각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의 장례식장에 있었다. 사인은‘돌연사’였다. 그는 최근 실적에 시달리며 스트레스가 많았고, 직장생활을 무척이나 괴로워했다고 했다. 지난주 금요일 밤, 뜬금없이‘한 번쯤 보고 싶다’는 문자가 그로부터 왔다. 그리고 그다음 날에는‘옛날처럼 같이 커피라도 한잔 마시고 싶다’는 왠지 쓸쓸함이 묻어나는 문자가 또 왔다. 나는‘그래… 뭐 그러자.’는 형식적인 답을 보냈을 뿐, 그를 만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 오후 3시경, 그의 부고 문자를 받았다. 장례식장에서 오랜만에 만난 그의 동기였던 후배들과 말없이 소주잔을 기울이며 누군가 차려놓은 새빨간 육개장을 초점 흐린 눈으로 내려다봤다. 묵묵히 잔을 비우는 나에게 한 녀석이 내 옆으로 다가와 나지막이 속삭였다. “선배가 와서, 이 녀석은 아마 지금 무지 행복할 거예요. 선배 얼굴, 진짜 많이 보고 싶어 했거든요. 늘 이야기했었어요. 선배가 첫사랑이었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무심코 올려본 까만 밤하늘이 슬프고도 허망했다. 나는‘한 번쯤 보고 싶다’는 그의 마지막 부탁을 끝내 들어주지 못하고, 그를 저 하늘로 보내 버린 게 시리도록 가슴이 아팠다. 이제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그와의 마지막 식사가 되어버린 이별의 육개장 – 그토록 오랫동안 나를 첫사랑으로 기억해 준 그를 가슴에 묻으며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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