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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따위는 몰라도 좋아

홍콩 딤섬

by anego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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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직행보다 경유하는 비행기가 좋다. 비행기에서 잠을 잘 못 자는 나는 긴 비행일수록 그 한가운데를 반으로 뚝 잘라한 두 시간쯤 어딘가에서 잠시 멈춰 섰다 가는 것이 덜 지루하고 덜 피곤했다. 그리고 공항 밖으로 나갈 수는 없지만 목적지가 아닌 덤으로 생긴 또 하나의 낯선 나라의 공기를 마시는 기분도 은근슬쩍 좋았고, 공항에서 파는 그 나라의 다양한 음식들을 이것저것 먹어볼 수 있는 것도 색다른 재미였다. 특히 홍콩이나 도쿄를 경유할 경우 나는 기내식을 절대 먹지 않았다. 부지런히 다리품을 팔면 한두 시간 안에 먹을 수 있는 것들이 충분히 넘치기 때문이다.


유난히 사건 사고가 많았던 고달픈 10일간의 호주 출장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는 홍콩을 경유했다. 성수기라 직항 표를 구해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스텝들의 말에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홍콩 공항에서 먹을 맛있는 음식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주어진 시간은 한 시간 반…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으로 나오는 시간을 제외하면 그리 길지 않지만 나는 출장 기간 내내 잘 먹지도 잘 자지도 못한 지친 나에게 홍콩의 맛있는 음식을 대접할 것을 굳게 다짐했다.


어느새 비행기는 홍콩 공항에 도착을 했고 기내식은 손도 대지 않은 채 차가운 화이트 와인 몇 잔만 홀짝 인 나는 몹시 배가 고팠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빠른 걸음으로 푸드 코트로 향했다. 오랜만에 온 홍콩 공항은 예전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번화했다. 나의 계획은 이랬다.‘첫 번째로 매콤하고 시큼한 맛으로 입맛을 살려줄 핫 앤 사워 수프를 먹는다. 두 번째로 잘게 다진 생선 살과 새우가 들어 간 흰 죽을 먹는다. 세 번째로 먹어본 적 없는 새로운 딤섬 몇 개와 굴 소스 가지 볶음을 먹는다.’ 물론, 대식가가 아닌 나에겐 엄청난 도전이었지만 조금씩 맛보고 남기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르별로 파는 음식들이 다른 푸드 코트들은 여러 군데로 흩어져 있었다. 거의 뛰다시피 한 걸음으로 찾아낸 수프 가게는 작은 사이즈를 주문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접만 한 사발에 한가득 수프가 나왔다. 뜨거운 수프를 호호 불어가며 몇 수저 떠먹고 다음 가게로 향했다.


길치 중에 길치 인 나는 분명 공황 안내지도에서 몇 번이나 확인한 죽 집을 지척에 두고, 주변을 뱅뱅 맴돌며 헤맸다. 그러다 결국 포기해야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사람들로 북적이는 죽 집을 발견했다. 그러나 기다리는 줄이 만만치 않았고, 시간은 이제, 40분이 채 남지 않았다. 죽을 포기하고 딤섬으로 넘어가야만 했다. 그런데 내 옆으로 흰 죽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혔고,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는 고소한 죽 냄새가 내 발목을 잡았다. 어영부영 망설이다 줄을 선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차례를 기다렸고, 15분이 훌쩍 지나서 몇 사람 뒤로 내 차례가 다가왔을 때, 갑자기 주문을 하던 중국 할머니가 쩌렁쩌렁한 큰 목소리로 점원과 싸우기 시작했다. 나는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은 이들의 요란한 언쟁에 간절했던 죽을 포기하고, 억울한 마음에 주먹을 불끈 쥐고 딤섬 가게로 전력질주했다.


황급히 자리를 잡고 메뉴 판을 펼쳐 눈에 들어오는 딤섬 몇 개를 주문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금방 나올 것 같았던 딤섬은 좀처럼 나올 줄을 몰랐고, 출발 시간은 코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초조해진 내가 허둥지둥 계산을 하고 자리에서 막 일어서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이름 모를 딤섬들이 도착했다. 나는 재빠르게 돼지 모양의 폭식 폭신한 딤섬 하나를 집어 들고 가게를 나와 게이트를 향해 또 힘껏 달렸다.


그런데 숨을 헐떡거리며 도착한 게이트는 분명 오픈하고도 남을 시간인데도 여전히 닫혀 있었고, 근처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던 스텝들이 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공항 사정으로 인해 출발 시간이 30분 지연이 되었다고 했다. 몇 번이나 안내 방송이 나왔다고 했지만 분명 정신없이 뛰어다니기 바빴던 나에게 들렸을 리가 만무했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한 손에 꼭 쥔 찌그러진 돼지 모양의 딤섬을 물끄러미 봤다. 욕심이 과한 탓에 결국, 계획대로 먹은 건 수프뿐이었다. 이름 따위는 몰랐지만 꼭 먹고 싶었던 딤섬- 이렇게 지연될 줄 알았다면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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