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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첫 술

뼈 해장국

by anego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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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나는 선명하게 기억한다. 내가 처음으로 혼자 술을 마신 그 날을… 늦은 퇴근길이었다. 변함없이 녹초가 된 내 몸을 이끌고 전철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갔다. 오늘 하루를 이미 끝낸 주변들은 내일을 위해 깊은 잠 속에 빠져 있었다. 괜스레 황량하기까지 한 밤길을 걸어 내가 사는 아파트 앞 횡단보도에 섰다. 길을 건너면 집이었다. 집으로 가도 하루 종일 응어리지고 시퍼렇게 멍이 든 마음으로 도무지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막 문을 닫으려는 동네 슈퍼에서 캔맥주 두 개를 샀다.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나는 가방을 침대 위로 던지고 맥주 한 캔을 신경질적으로 따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나의 혼술은 그렇게 하루의 서글픈 분풀이 용으로 시작되었다.


동기들과 선배들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스트레스가 숨 막히게 많은 직업. 스스로를 들들 볶아야 남보다 빨리 주목받는 직업. 치열한 경쟁으로 다져진 근육이 몸과 마음에 덕지덕지 붙어야 롱런하는 직업. 소위 프로라는 이름으로 어깨를 으쓱대는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광고라는’ 직업은… 우리를 늘 긴장과 불안 속에서 숨 쉬게 했다. 물론, 성취감도 그만큼 컸다. 어디 가서 기죽지 않을 만큼의 연봉도 따라왔다. 그리고 세월과 함께 주량이 늘었다. 야근이 생활이고 주말에도 제대로 맘 편히 쉬지 못하는 우리에게 술은 쌓이는 스트레스를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없앨 수 있는 아니 잠시라도 잊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을지도 몰랐다. 뿐만 아니라, 서툰 논쟁 속에 불거진 오해로 인해 서먹해진 관계를 풀기 위해서, 혹은 서로를 괴롭히기만 하는 소모적이고 날카로운 신경전을 서둘러 끝내기 위해서… 급하게 쏟아부은 알코올이 주는 몽롱함과 관대함 만 한 것도 없었으니까.


우리는 아무래도 그냥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날이면 술을 마시며 하루를 정리했다. 기뻐서, 분해서, 긴장돼서, 흥분돼서, 속상해서, 미안해서… 이유는 차고 넘쳤다. 그날도 그랬다. 처음으로 참가한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실수 없이 끝내고 선배들의 손에 이끌려 술을 마시러 갔다. 그간의 말 못 한 어려움들과 서로를 향한 훈훈한 덕담이 오가는 술자리는 새벽까지 이어졌고 나는 나의 주량을 훌쩍 넘겼기고 말았다. 다음날 깨질 듯 아픈 머리와 울렁거리는 속을 겨우 진정시키고 회의 준비를 하는 우리를 선배는 모두 불러 모았다. 그리고‘진정 해장의 끝’을 알려주겠다며 모두를 자신의 소나타에 구겨 태운 후 모처의 시장 골목으로 향했다.


시장의 역사가 한눈에 들어오는 뼈 해장국집에 도착한 우리는 맨 구석에서부터 차곡차곡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인심 좋은 시장 반찬이 차려지고 순식간에 해장국이 우리 앞에 놓였다. 보글보글 끊는 시뻘건 국물 위로 푸짐한 시래기 더미와 고소한 들깻가루 그리고 송송 썬 대파가 올려졌다. 나에게는 너무나 생경한 이 음식에 용기를 내어 조심스레 떠 넣은 위험한 첫술은 짜릿했다. 속 끝까지 뜨끈한 기운이 퍼지며 들썩이던 나의 위장을 다독이는 느낌이 들었다. 진정 해장이 된다는 것… 술기운을 푼다는 건 이런 기분일까?


누군가 벌써 속이 다 풀렸으니 또 한잔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우스개 소리를 하자 모두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날 이후로 내 인생의 해장국이 된 뼈 해장국– 지금은 모두 뿔뿔이 흩어진 그리운 그들과 함께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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