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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를 부탁해

순희네 반찬가게

by anego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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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처럼 잘 풀리지 않던 일들이 금요일 밤을 기점으로 물거품처럼 모두 사라진 토요일 오후… 오랜만에 실컷 늦잠을 자고 침대를 뒹굴며 맘껏 게으름도 피웠다, 마음의 여유가 안겨주는 이 녹녹한 행복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근처 시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에게 맛있는 브런치를 차려 주기 위해서였다. 그것도 맛깔스러운 몇 가지 밑반찬이 있는 집 밥으로 말이다.


나는 만 원짜리 두 장을 접어 헐렁한 면바지의 주머니에 넣고 맨발에 샌들을 신고 집을 나섰다. 저 멀리 동네 시장이 보이자 어린 시절의 내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나에게 시장이라는 곳은 엄마의 손을 꼭 잡고만 갈 수 있는 낯선 공간이었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시끄러운 사람들의 외침과 도처에서 쏟아지는 이상한 소음들. 그리고 코를 막게 했던 생선 비린내와 삶은 돼지고기의 누릿한 냄새는 새침한 어린 꼬마에게 반가울 리가 없었다. 나는 엄마의 장보기가 어서 끝나 이곳을 서둘러 벗어나기를 바라며 엄마의 손을 더 꽉 잡았다.


그때 보았던 풍경들이 마흔을 넘긴 지금도 내 앞에 똑같이 펼쳐졌다. 시장 초입에 자리 잡은 닭 강정 가게에서는 금방 튀겨 낸 닭강정을 시식하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나도 그 속을 슬그머니 비집고 들어가 뾰족한 이쑤시개로 강정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달콤한 양념이 묻은 바싹바싹한 튀김옷이 씹을수록 감칠맛이 났다. 나는 작은 박스 하나를 냉큼 사고 단골 반찬 가게로 서둘러 갔다.


시장 끝에 자리 잡은 인상 좋은 두 어머니가 하시는 ‘순희네’ 반찬 가게는 신용카드가 되지 않았다. 이제 내 주머니 속에 닭 강정을 사고 남은 돈은 모두 반찬을 사기 위해 쓰여야 한다. 혹 딴 곳에 한눈을 팔다 다른 것을 사버리면 큰일이 나는 것이다. 한 달 만에 들린 나를 단박에 알아보시며 어머니들은 환한 미소로 반기셨다. 나는 초롱초롱 두 눈을 반짝이며 동그란 통에 담긴 반찬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빨간 고춧가루가 솔솔 뿌려진 막 완성된 두부조림과 곱게 썬 파, 맛살, 당근, 양파를 넣고 도톰하게 말아낸 계란말이. 그리고 언제나 나에게 밥반찬 보다 술안주가 되고 마는 메추리 알 장조림과 초록빛 꽈리고추를 인심 좋게 넣고 간장으로 볶아낸 짭조름한 멸치볶음. 참기름 냄새가 폴폴 나는 아삭아삭한 콩나물 무침과 시금치나물까지… 다양한 반찬들 앞에 나는 연신 군침을 삼키며 어떤 걸 골라야 할지 몰라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결국에는, 어머님들의 말씀대로 금방 먹을 두부조림과 계란말이 그리고 냉장고에 오래 두고 먹을 메추리 알 장조림과 멸치조림을 사고, 덤으로 주신 새콤달콤한 무채 무침도 검정 봉지에 차곡차곡 담았다. 일주일 치 반찬거리를 장만한 것뿐인데 마치 굉장한 일을 끝낸 듯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반찬을 하나씩 꺼내 플라스틱 통에 담고 냉장고에 곱게 진열을 했다. 서둘러 즉석밥을 데우고 예쁜 접시에 반찬을 조금씩 덜고 마시다 남은 와인도 한잔 따르고 보고 싶은 영화도 한편 골랐다. 마냥 기분이 좋아진 나는 아직도 따뜻한 두부조림 한 조각을 젓가락으로 크게 잘라 입에 넣고 와인 한 모금을 마셨다. 매콤한 고춧가루와 두부의 담백함이 와인과 예상외로 멋진 조화를 이뤘다. 나는 금세 두부조림 한 접시를 먹어 치웠고 나의 브런치는 밥상이 아닌 술상으로 차츰 변해가고 있었다. 나의 냉장고를 책임져 주시는 맛있는 ‘순희네’ 반찬들 – 술안주가 아니라 밥반찬으로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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