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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탐스러운

석화 한 접시

by anego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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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버리는 찬바람이 서서히 기승을 부리는 겨울의 초입. 그 초입에 나는 오동통하고 뽀얀 너란 녀석을 기다린다. 그 녀석의 이름은 바로‘바위에 피는 꽃’… 나에게는 활짝 핀 봄꽃보다 더 탐스러운 석화였다.


꼬불꼬불한 동네 시장 골목에 자리 잡은 조개구이 집의 수조 엔 언제부터인가 주먹만 한 석화가 그득그득 담겨 있었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주인아저씨는 부지런히 수조를 닦으며 “올해 석화는 알이 굵고 싱싱해서 보약입니다. 보약.”이라고 가게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싱글벙글 미소를 지으며 입맛 당기는 주문을 거셨다.

그 주문에 단박에 홀린 나는 퇴근길의 지인들을 불러 모으고, 자석에 끌리듯 아저씨의 가게 안으로 쭉 미끄러져 들어가 석화 한 접시를 주문했다. 나는 냉장고에서 직접 꺼내온 맥주를 거품 넘치게 한잔씩 따르고, 아저씨가 분홍색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열심히 건져 올리는 석화들을 설레는 눈빛으로 쏘아봤다. 다닥다닥 알이 굵은 석화로 큰 원이 그려진 접시가 우리 앞에 놓였다. 나는 얇게 저민 마늘과 청양 고추를 고명으로 올린 석화 하나를 손으로 들어 ‘호로록’ 소리를 내며 단숨에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물컹한 석화가 터지면서 향긋한 향과 짭조름한 맛이 혀끝에 맴돌고 쌉싸름한 마늘과 아삭한 고추가 더해져 감칠맛을 더했다. 어느새 우리는 한 접시를 게눈 감추듯 허겁지겁 먹어 치웠고,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한 접시를 더 주문했다. 그리고 잠깐의 공백을 불 판 위의 고기가 어서어서 익기를 바라는 안달 난 아이처럼 입맛을 다시며 채웠다.


살짝 밀어 열어놓은 창문에서는 아직 매서운 한기를 제대로 품지 않는 미지근한 겨울바람이 불었다. 아마도 나에게 춥고 시린 겨울이 기다려지는 것은 이 석화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의 살얼음 걸친 차가운 맥주와 겨울 바다의 맛을 품은 싱싱한 석화가 만들어 내는 환상의 궁합은, 찬바람에 발을 동동 구르며 한껏 움츠려진 퇴근길의 나에게 맛있는 위로가 되기에 충분했다. 아까보다 더 큰 석화 원을 그린 접시가 드디어 등장했고, 나는 이번에는 석화 위에 겨자와 간장을 올리고 특별히 주문한 레몬을 힘껏 짜서 먹었다. 모두 각자의 스타일대로 석화를 입 속으로 밀어 넣으며 약속이나 한 듯 감탄을 자아내며 맥주잔을 비웠다.


최근에 두 계절을 고구마만 먹으며 다이어트에 성공한 그녀는 석화라면 얼마든지 먹어도 괜찮다며 접시 위에 남은 제일 큰 석화를 집어 들었다. 그녀는‘바다의 우유’인 석화를 이렇게 싼 가격으로 실컷 먹을 수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라며, 우리는 하늘의 축복받은 국민들이라는 싱거운 이야기를 끄집어내며 석화를 향한 예찬에 목소리를 높였다. 더불어 커지는 우리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수북이 쌓여가는 석화 껍데기를 흐뭇하게 지켜보던 주인아저씨는 슬그머니 석화 몇 개를 접시 위에 덤으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소중한 자식 자랑을 하듯이 행복이 넘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식당 안의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 말했다.


“정말로 올 겨울 석화는 최고입니다. 이만한 보약이 없어요. 진짜 더 맛있게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드세요 ” 입맛 없는 여름이면 더 생각나는 꽃보다 탐스러운 석화 - 주인아저씨의 말처럼 남김없이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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