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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매의 우애로 꽉 채우다

필리 치즈 스틱

by anego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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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요리사이자 컬럼리스트인 박찬일 셰프는 어느 날 이탈리아 영화‘지중해’를 보고 깊은 영감을 받아 무작정 요리를 배우기 위해 시칠리아로 떠났다고 했다. 나는 그처럼 대단한 영감을 받은 건 아니었지만, 영화‘필라델피아’ 속 주인공이 하늘로 떠나간 연인을 그리워하며 쓸쓸히 배회하던 그 황량한 거리에 반해, 필라델피아로 어학연수를 결정했다. 물론, 그곳에는 나의 대학시절의 절친이 대학원을 다니고 있다는 든든한 메리트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떠나기 전날까지 매일 밤 영화의 주제곡이었던 ‘스트리트 오브 필라델피아’를 들으며 영화 속 그 거리를 걷는 상상을 했다.


결국, 필라델피아에서 기차로 50분 거리에 있는 델라웨어라는 곳에서 어학연수를 시작하게 되었지만 나는 6개월 만에 나름 영어에 자신감을 갖고 필라델피아로 전학을 가기로 결정했다. 델라웨어에서 함께 어학연수를 하던 동생들과 학기가 끝나던 날 이제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영어교재들을 바자회에서 모조리 팔아치웠다. 그리고 그 돈을 모아 다음 날 우리는 필라델피아행 기차를 탔다. 대학 절친에게 미리 부탁을 해 하룻밤 묵을 숙소도 공짜로 얻어내고 우리는 마냥 신이 났다. 영화‘록키’에 나오는 필라델피아 아트 뮤지엄 앞에서 브이 자를 그리며 기념사진도 찍고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시내 여기저기를 쉬지 않고 누비고 다녔다. 슬슬 배가 고파진 우리는 길거리 푸드트럭에서 팔뚝만 한 필리 치즈스틱을 하나씩 사서 시청 앞 광장 계단에 앉아 먹기 시작했다. 내 옆에 나란히 앉아 필리 치즈스틱을 먹고 있는 그녀들은 여동생이 없는 나에게 형제의 도시라고 불리는 이곳, 필라델피아에서 나의 동생들이 되어주었다. 참아온 허기 탓에 급하게 빵을 삼키다 목이 맨 그녀들을 위해 나는 얼른 푸드 트럭으로 뛰어가 차가운 소다를 사고 길쭉한 빨대를 꽂아 내밀었다. 포근한 오후의 햇살을 등지고 밝게 웃는 그녀들의 미소가 내 마음속에서 눈부신 보석처럼 빛났다.


우리는 이곳에서의 저녁 만찬을 위해 모처럼 한국 슈퍼에 들러 이것저것 먹고 싶었던 것들을 잔뜩 쓸어 담았다. 아직 우리의 주머니 속에는 교재를 판 돈이 두둑 했다. 친구가 빌려준 작은 스튜디오에서 우리는 다 함께 서툰 요리를 하고 맥주를 마시고 창 밖에서 수시로 울리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밤새도록 수다를 떨었다. 다음 날 돌아오는 기차에서 나는 양 옆에서 꾸벅꾸벅 조는 그녀들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야속하게 한 달 채 남지 않는 시간은 총알처럼 흘렀고 그녀들은 눈물을 감추며 내 곁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갔고 나는 필라델피아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몇 달이 순식간에 또 흐르고 나는 이제 이 도시가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다. 형제의 도시답게 나를 따뜻하게 안아준 새로운 인연들과 같이 밥도 먹고 학교도 가고 밤새 시험공부도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시청 앞을 지나갈 때면 그녀들이 불쑥 그리워져 잠시 걸음을 멈추곤 했다. 모든 수업이 끝난 금요일 오후 학교 앞 푸드트럭에서 필리 치즈스틱을 샀다. 그리고 그녀들과 나란히 앉았던 시청 앞 광장의 계단에 앉아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한입 베어 물었다. 우물우물 빵을 씹으며 석양이 차오르는 하늘을 올려다보자, 순간 그녀들의 얼굴이 저 멀리 지는 태양처럼 붉은 하늘 위에 아른거렸고 가슴은 먹먹해졌다.


간절하게 그립다는 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자매들의 우애로 꽉 채운 필리 치즈스틱 – 그녀들의 환한 웃음소리와 함께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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