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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남자를 닮다

야키토리

by anego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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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유학시절, 나와 같은 어학원을 다녔던 그녀는 전액 장학금을 당당히 거머쥐고 하라주쿠의 유명 패션 스쿨에 입학을 했다. 동그란 눈이 보석처럼 반짝이는 그녀의 새하얀 얼굴과 그녀만의 감각적인 스타일을 걸친 그녀의 늘씬한 몸은, 어디서나 시선을 끌었다. 그녀와 함께 시내를 거닐 때면 반듯이 누군가 수줍게 삐죽이 다가와 그녀에게 말을 걸곤 했다. 그녀는 매번 차갑게 고개를 돌리며 투덜댔다. “일본 남자들은 저렇게 비실비실하다니까. 나랑은 절대 코드가 맞을 수 없는 호감도 제로 인간들 이야.”


여름방학을 앞둔 토요일 오후, 그녀와 나는 오랜만에 조우했다. 벌써부터 푹푹 찌는 더위에 회전 초밥이었던 우리의 점심메뉴는 차가운 생맥주와 삶은 콩으로 바뀌었고 타는 목구멍으로 급하게 넘긴 맥주에 우리는 금세 몽롱해졌다. 드디어 나의 답답한 학교생활에 대한 투정이 시작되었고 그런 나의 재미없는 이야기를 그녀는 아낌없는 리액션으로 신나게 받아주었다. 그러다 그녀는 갑자기 맥주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나를 뚫어져라 보며 말했다. “언니, 일본 남자들은 왜 그래? 아… 속 터져서 죽을 거 같아. 지가 먼저 시작해 놓고 이건 밀당도 아니고 그냥 짜증 이야.”


그녀의 이야기는 이랬다. 학교에서 같이 남성복을 전공하는 도쿄 토박이 일본 남자가 있는데, 수업 첫날부터 그녀의 곁을 맴돌며 같은 조가 되기도 하고, 무거운 가방이나 짐을 몰래 들어주기도 하고, 틈 만나면 함께 과제를 하자고 졸랐다고 했다. 그러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사귀는 사이처럼 가까워졌고 시간이 흐를수록 도도하고 당찬 이 한국 여인은 그와의 연애라는 시소게임에서 균형을 잃고 말았다. 그 후, 연락은 뜸해지고 수업시간에 그녀를 만나도 데면데면 대하는 그의 모습에 애가 타던 그녀는 그와 헤어질 것을 수십 번도 더 결심했지만, 다음날의 눈부신 아침 햇살과 함께 그녀의 굳은 결심은 먼지처럼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다가 땅이 꺼질 만큼의 한숨이 자신도 모르게 주기적으로 나오는 날이면 뜬금없이 그에게서 문자가 온다고 했다.‘미안해. 그동안 몸도 마음도 정신이 없었어. 잘 지내지? 언제나 너를 응원하고 있어.’ 그녀는 이 짧은 그저 안부를 묻는 단순한 이 텍스트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세 잔의 맥주를 벌컥벌컥 쉼 없이 마신 그녀는 본격적인 토요일 밤이 시작되는 저녁 7시를 넘기지 못하고 내 어깨에 기대 잠이 들었다. 그런 그녀를 나는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다 남은 맥주잔을 비웠다.


나에게도 우연히 지인 소개로 알게 된 일본 남자 사람 친구가 있다. 말을 하는 것보다 듣는 걸 좋아하고, 내가 털어놓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눈치껏 먼저 질문하는 살가운 센스를 보여주는 고마운 친구였다. 그 친구와 나의 단골집은 주문과 동시에 분무기로 물을 뿌려가며 숯불에 노릇노릇하게 바로 구워주는 야키토리 집이었다. 갈 때마다 군침부터 삼키게 하는 먹음직스러운 이 야끼토리는 과하지도 욕심부리지도 않으며 우리의 술맛과 기분을 부담 없이 올려주었다. 학원 제에 제출할 작품을 마친 나는 몇 달 만에 만난 그에게 변함없이 그간의 두서없는 이야기들을 주절 댔다. 그러다 문뜩 그녀의 속 타는 사연이 떠올라 ‘도대체 너희 일본 남자들은 왜 그러냐?’하고 맥락 없는 화두를 그에게 던졌다. 나의 어이없는 질문에 눈이 동그래진 그는 무슨 말이냐는 듯 어깨를 위로 한번 들썩이며 말없이 맥주를 마셨다. 내가 늘어놓는 그녀의 연애 담을 가만히 듣던 그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다 씩 웃었다. 막 구워 낸 육즙이 흐르는 솜털 뭉치 같은 야끼토리를 나에게 권하며 그는 말했다. “서로의 템포가 다른 거야. 일본 남자들은 한국 남자들보다 훨씬 느려. 좋게 말하면 좀 더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타입이 랄까?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입 속의 야끼토리를 부지런히 씹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느린 걸음으로 나에게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다가오는 이 일본 남자가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야키토리처럼 익숙하고 편안했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1년째 우정을 쌓고 있으니까. 그의 말대로 그녀의 문제는 속도의 차이일까?‘


언제나 헤어지기 전에 고민이 있으면 야키토리나 같이 먹자.’하며 웃던 그와 나의 단골 메뉴 야키토리 – 우리 우정의 크기만큼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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