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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님의 007 비밀작전

과메기

by anego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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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상상한다. 중요한 회담을 위해 모인 텔레비전 속 정상들이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서로의 귓가에 속닥이는 모습을 보며 저들은 과연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할까? 혹시… 오늘 저녁은 뭘 드실 겁니까? 요즘 이런 게 제철이라는 데… 어디가 맛집입니까? 이런 잡담을 나누는 건 아닐까 하고.


회사에서 운 좋게 최연소 팀장이 된 후, 본부장이었던 이사님은 틈만 나면 나를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바짝바짝 서로를 염탐하며 견제하기 바빴던 그때 사람들은 궁금했을 것이다.‘이사님은 나를 불러 무슨 밀담을 나누는 걸까?’하고… 그러나 그들의 추측과 달리 이사님은 늘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 일이나 회사에 관한 이야기는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다. “요즘 뭐가 제철인데 그걸 맛있게 먹으려면 어디에 가야 하는데…”이사님의 이야기는 늘 이런 식이였다. 이사님은 단지 자신의 수다 상대로 만만한 나를 골랐을 뿐이었다. 물론, 이사님은 나와 대학 동문이고 막연하게 대학 후배에게 느끼는 친근함과 편안함 또한 한몫을 했을 것이다. 회사에서 위로 갈수록 마음을 터 놓고 이야기할 상대가 줄어든다고 하지 않았던가? 오죽하면 윗 분들과 잘 놀아주는 것 또한 일 잘하는 것만큼 중요하다고 했을까… 그러나 솔직히 나는 그럴 위치와 처지도 아니었다. 단지 다른 팀장들보다 출근시간이 조금 빨랐고 일괄되었다. 매일 아침 7시면 출근하는 이사님은 조간신문들을 꼼꼼히 읽은 후, 슬슬 수다가 고픈 즈음에 내가 딱 맞추어 나타났고 그런 나를 부른 거뿐이었다. 한참을 잡담에 가까운 이야기 꽃을 피우다 이사님의 방문을 열고 나올 때쯤이면, 다른 팀장들과 팀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런 나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힐끗힐끗 보며 궁금증을 키웠다.‘매일 아침 저들은 무슨 대화를 나눌까?’


그날도 다르지 않았다. 출근하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아이처럼 들뜬 이사님은 나를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손수 커피믹스를 뜯어 커피를 타 주고 오늘은 무조건 야근하면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나에게 곧 철인 햇 과메기를 단골 집에서 들여놓았다고 했다. 양이 많지 않아 팀장들을 모두 데리고 갈 수 없다며 요즘 덜 바쁜 팀장들 몇몇을 지목했다. 그리고 혹시 자신이 못 가는 걸 서운해 할 수 있으니 시간차를 두고 각자 사무실을 나와 주차장에서 만나자고 했다. 마치 007 비밀작전이라도 수행하듯 이사님은 선택된 팀장들을 한 명씩 불러 신중하게 오늘의 미션을 알렸다. 아마도 불려 가지 않는 나머지 팀장들은 이런 상황이 마냥 수상했을 터였다. 그들 중 누군가는 나에게 다가와 무슨 일이 있냐고 슬쩍 물었다. 그리고 아무 일 없다는 나의 대답을 수상해하며 ‘이사님의 관심을 듬뿍 받으니 좋겠어’하고 빈정댔다. 나는 정말로 아무 일도 아니라고… 오로지 오늘도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는 과메기 이야기만 귀에 딱지가 안도록 듣고 왔을 뿐이라고 절규하고 싶었다.


이런 속사정도 모르고 눈치 없는 이사님은 저녁에 먹을 과메기 생각에 한껏 들떠서 틈만 나면 나를 불러 오늘의 비밀작전 수행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지를 재차 확인했다. 그럴 때마다 주변의 시선은 따끔거렸고 내 속은 시꺼멓게 타들어갔다. 그날 저녁, 초대받은 팀장들은 작전대로 5분 간격으로 회사를 나와 주차장에서 이사님을 기다렸다. 그런데 퇴근 무렵 사장님의 급한 호출을 받은 이사님은 30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주차장에 쪼그려 앉은 우리의 모습은 퇴근길의 나머지 팀장들에게 목격되었고 그들의 눈빛 속엔 호기심과 의심이 가득했다. 한 시간을 기다린 후에 우리는 이사님의 차를 타고 과메기 집으로 갔다.


서울시내에서 본 적 없는 시골장터 같은 골목을 한참 걸어가니 ‘이모 집’이라는 나무 간판이 달린 허름한 식당이 보였다. 정말로 이사님의 이모처럼 보이는 할머니가 반갑게 우리를 맞았다. 잠시 후 여기저기 흠집이 난 동그란 상위에 반지르르 윤기가 나는 과메기와 새끼손가락 크기로 썬 대파, 빛깔 고운 물미역과 김이 맛깔스럽게 차려졌다. 신이 난 이사님은 침을 꿀꺽하고 한번 삼키고 우리에게 과메기 먹는 법을 알려주었다. 말 잘 듣는 학생들처럼 우리는 모두 이사님을 따라 김을 손바닥에 올리고 차곡차곡 재료들을 넣고 야무지게 싸서 먹었다. 이사님의 말대로 햇 과메기는 전혀 비린 맛이 없었고 젤리처럼 쫄깃쫄깃하고 담백했다. 하루 종일 따가운 눈총을 참아내며 따라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만큼 맛있었다. 결국, 모두에게 들통나버린 이사님의 007 비밀작전 과메기 - 다음에 다 함께 먹길 바라며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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