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보틀 커피
몇 달 전 시애틀로 이사를 간 미국 친구는 말했다. 비 오는 날이 끔찍하게 많고 우중충한 시애틀이 좋아진 건 커피가 맛있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라고. 그 흐릿하고 축축한 날씨 속에서 마시는 향긋하고 뜨거운 커피 맛이 일품이라고 했다. 왠지 그 기분을 알 것 같은 흐리멍덩한 회색 빛 날씨가 나의 뉴욕 여행 속에서도 일주일째 계속되고 있었다.
아직도 시차가 제대로 적응이 되지 않은 탓인지 새벽부터 눈은 똘망똘망 해졌다. 오늘만은 제발 햇살과 함께 창 밖이 밝아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며, 머릿속으로 오늘의 행선지를 차근차근 떠올렸다.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텔레비전 전속의 아침 방송을 음악처럼 들으며 최대한 느릿느릿하게 샤워를 하고 꼼꼼하게 화장을 하고, 오늘도 기대를 저버린 날씨에 대비할 옷들을 골라 입고 안 하던 뒷정리까지 하고 집을 나섰지만, 오전 9시를 넘기지 못했다. 날씨에 따라 컨디션과 기분의 변화가 널 뛰는 나는 근처 카페로 가 커피 한잔과 에그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오늘의 행선지를 다시 한번 곰곰이 떠올렸다. 그러나 이 지긋지긋한 흐린 날씨에 이미 한풀이 꺾인 나의 의욕들은 꼭 그곳을 가야 하냐고 나를 추궁하고 있었다. 머그잔에 가득 따라 놓은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을 삼키자, 오늘은 그냥 이런 날씨에 어울리는 커피나 실컷 마시러 가자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그리고 나는 최근 핫 플레이스로 뜨고 있는 윌리엄스버그로 향했다. 날씨 탓에 거리는 평소보다 더 한적했고 간간히 부는 바람은 길가에 늘어선 나무들이 휘청거릴 만큼 매서웠다. 이런 날씨에 대비해 단단히 무장을 하고 나온 나는 쌀쌀한 바람을 거뜬히 견뎌내며, 메인 스트리트를 향해 슬금슬금 발걸음을 옮겼다.
젊은 아티스트들의 아지트답게 윌리엄스버그는 다양하고 색다른 분위기의 카페들로 넘쳐났다. 테이블도 없이 낡은 소파 몇 개만이 퉁명하게 놓여있는 조그만 카페로 들어가 ‘오늘의 커피’ 한잔을 주문했다. 좁은 실내는 벌써 소파에서 책을 읽거나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커피를 홀짝이며 한참을 서성였지만 빈자리가 나지 않아 나는 마시던 커피를 들고 카페를 나왔다. 저 멀리 새로 생긴 가게의 벽화를 그리는 몇몇의 사람들이 보였다. 이 궂은 날씨에도 그들은 검은색의 비니를 눌러쓰고 가벼운 티셔츠 차림으로 부지런히 붓질을 했다. 커피를 마시며 그들의 뒷모습과 그들이 그려내는 묘한 그림들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도쿄에서 돌아온 후 몇 년 간 적을 두었던 지인의 회사를 떠나며 나는 결심을 했다. 앞으로는 지금 이 거리의 그들처럼 작가로 살고 싶다고. 저들 만큼의 재능도 젊음도 열정도 가지지 못했지만 나는 다시 내 마음이 원하는 ‘뜨거운 가능성의 물’ 속으로 무작정 나를 넣어 보기로 했다. 서울로 돌아가면 그려보고 싶은 모티브 몇 개를 머릿속에 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모퉁이를 돌자 쏘아붙이는 듯 강하고 진한 커피 향이 났다. 하얀 바탕에 단순한 모양의 파란 물병이 일러스트로 그려진 마치 아티스트의 작품 같은 입간판을 보였다. 호기심에 문을 열고 들어간 카페는 환한 분위기에 세련된 바를 연상시키는 기다란 나무 테이블과 등받이가 없는 동그란 의자가 남달랐다. 이곳의 ‘시그니처 커피’를 주문하자 주름 없이 단정한 하얀 셔츠에 적당히 물이 빠진 청바지를 입은 30대 초반의 남자 바리스타가 끊은 물을 천천히 부어가며 커피를 내렸다. 기다리는 동안 진하고 향긋한 커피 향이 콧속으로 빨려 들어와 내쉬는 숨에 입 밖으로 다시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시선을 고정한 채 성스러운 의식 같은 커피 내리는 그 모습을 뚫어지게 봤다. 몇 분 후 내 앞에 놓인 커피 한잔을 소중한 보물처럼 두 손에 꼭 쥐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향기를 음미했다. 그런 나를 보며 이 커피는 어디에서 재배한 커피콩을 오늘 로스팅을 해서 어쩌고 저쩌고 산미가 남다르고 향기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바리스타의 설명이 이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시큼하고 또 시큼한 뒷맛이 강하게 나는 미지근한 커피가 내 목을 타고 흐르자, 벌써 세 잔 씩이나 커피를 마신 내 속은 찌릿하게 쓰려 왔다. 스타벅스 커피에 길들여진 나는 산미가 강한 커피에 별 매력도 감동도 느끼지 못했다. 남은 커피를 종이컵에 담아 카페를 나오자, 거리는 벌써 어둑어둑 어둠이 내려앉을 준비를 끝낸 듯했다.
이른 저녁을 먹을 생각으로 이곳저곳 레스토랑을 기웃거리는 그때, 후드득 굵고 차가운 빗방울이 정수리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또 비가 내릴 줄 알았다면… 모던한 카페의 시큼하고 도도한 블루 보틀 커피 – 바리스타와 수다라도 떨면서 조금 더 맛있게 마실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