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선 구이 백반
점심이란 그저 마음의 점 하나를 찍는 것처럼 가볍게 때우면 그뿐 이라고 주장해 온 나였지만 – 그래야 저녁을 푸짐하게 먹을 수 있으니까 - 가끔은 정갈한 몇 가지의 반찬과 바싹바싹한 껍질에서 지글지글 소리가 나는 막 구워낸 생선구이가 있는 집 밥이 그리울 때가 있다. 지척에 바다를 끼고 있는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덕에 우리 집 밥상에는 생선구이가 빠지는 날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내가‘집 밥’이라고 부르는 이 애틋하고 정겨운 상차림에는 반듯이 생선구이가 있었다.
언제나 엄마의 장바구니 속에는 비싼 가격 탓에 서울에선 엄두도 못 낼 갈치나 조기, 굴비가 투명한 하늘색 비닐이나 신문지에 돌돌 싸여 있었고, 부엌에서 서서히 생선 굽는 냄새가 새어 나오기 시작하면, 나는 곧 밥시간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렇게 매끼마다 김치처럼 생선구이를 먹었다. 이런 흔한 일상의 풍경 덕인지 생선구이를 사 먹는다는 것은, 집안에 버젓이 세탁기를 두고 빨래방을 가는 기분이 드는 것은 물론, 언제든지 손을 내밀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는 생각에 점심 메뉴로 떠올리기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어쩌다 식당에서 기본 반찬으로 나온 오이지처럼 짜고 야박하게 토막 난 생선구이를 만나면, 내가 지금까지 먹어왔던 소위 생선구이라는 음식을 기만하는 듯한 묘한 배신감마저 들었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 바빠질수록 먹고사는 데 쓰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바쁘다는 물리적인 이유와 귀찮다는 심리적인 이유가, 삼시 세끼를 마음의 점처럼 때우는 것조차도 무기력하게 만드는 날들이 늘어갔다. 여느 날처럼 커피 한잔을 내리고 빵을 굽다가, 그동안 잠재의식 속에 묵묵히 봉인되었던 십 년 묵은 허기가 폭발한 듯 참을 수 없는 배고픔이 밀려왔다. 그리고 엄마의 생선구이가 밥상의 한가운데에 주인공처럼 차려진 집 밥이 너무나 먹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이것을 먹지 않으면… 남은 오늘 하루를 채우지 못한 허기를 향한 아쉬움으로 어영부영 날려 버리는 건 당연지사이고, 다음날의 의욕 치 마저 절반으로 떨어뜨릴 게 분명했다.
대단한 결심을 한 것처럼 집을 박차고 나와 길 건너 골목의 식당들을, 마치 잃어버린 아이를 찾는 여인처럼 두리번두리번 헤매다가,‘생선구이 백반 전문’이라고 손 글씨로 크게 써 붙인 식당을 발견하고 문을 열었다.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 몇 분들이 막걸리 한통을 반주 삼아 늦은 점심을 드시고 계셨다. 비어있는 구석 자리에 앉으면서 망설임 없이 생선구이 백반을 주문했다. 주인아주머니는 “점심이 늦었네”하고 말을 건네며 금세 네모난 스테인리스 쟁반에 생선구이 백반을 차려 냈다. 고등어로 보이는 노릇노릇 잘 구워진 생선살을 크게 젓가락으로 잘라 밥 위에 올리고 소금 없이 구워낸 맨 김에 싸서 한입 크게 먹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촉촉한 생선 살이 바삭한 김과 함께 밥 속에서 슬그머니 녹아내렸다. 오랜만에 느끼는 이 감동스러운 맛에 왠지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을까? ‘끼니 거르지 말고 잘 챙겨 먹고 이번 주말에 집 밥 먹으러 한번 오라’는 사이사이 맞춤법이 엉망인 엄마의 문자가 왔다. 부지런히 입을 오물오물 움직이며, 집 떠난 자식이라면 너무나 익숙한 내용이 담긴 엄마의 문자를 남자 친구의 문자처럼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다.
내 허기가 오늘 봉인 해제된 까닭은 맨날 끼니를 거르는 딸을 향한 엄마의 걱정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배고픔보다 그리움과 고마움으로 식욕이 도는 엄마의 생선구이 - 마음껏 먹을 수 있을 때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