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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든한 마법의 국물 한그듯

곰국

by anego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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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은 야근과 밤샘 작업으로 그저 움직이는 거라고는 숨 쉬는 것뿐인데도 살이 빠졌다. 매 끼니마다 살기 위해 입안으로 억지로 무언가를 밀어 넣어도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력은 도무지 회복이 되지 않았다. 오늘은 팀원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외부에서 각자 맡은 회의를 끝내고 퇴근을 하기로 했다. 오랜만이니까 금요일이니까 한잔 하자는 팀원들의 전화를 뻔한 새하얀 거짓말로 잠재우고 나는 집으로 향했다. 변함없이 몸은 아직도 젖은 솜처럼 무거웠고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며 무심코 올려다본 해 질 녘의 하늘이 오렌지색 원을 그리며 어질어질 돌았다. 초점 없는 두 눈을 힘껏 감았다 다시 또렷하게 뜨며 희미한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 순간‘기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곰국만 한 게 없다’하고 내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엄마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울려 퍼졌다.


유난히 몸으로 배우는 것에 둔하고 느린 나에게 입시를 위한 체력장 연습은 고 삼 시절 내내 나를 힘들게 했다. 체육시간마다 이뤄지던 이 연습들은 체육 점수로 이어졌고, 이 점수는 한참 피치를 올리고 있는 나의 수능 등급의 발목을 붙잡으며 치명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것도 모자라 오래 달리기에서 꼴찌를 면하기 위해 막판에 죽을힘을 다해 속력을 내고 가까스로 결승점을 통과하며 풀썩 앞으로 꼬꾸라진 나는, 일주일 내내 병든 닭처럼 책상 위에 엎드린 채 수업을 듣다가 오후의 보충 수업과 야간 자습은 포기하고 집으로 가야 했다. 손에 쥔 연필이 나도 모르게 툭 하고 떨어질 만큼 기력이 없었던 나를 위해 병원에서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수액을 놓아주는 게 전부였고, 그저 체력을 회복하도록 잘 먹고 쉬어야 한다고 했다.


그날 이후로 엄마는 곰국을 고았다. 학교에 가기 전에 누릿한 곰국 한 그릇에 파를 송송 뿌려 밥을 말아 억지로 먹었다. 점심에도 보온병에 엄마가 담아준 곰국에 시큼한 깍두기를 넣어, 비위가 약한 탓에 가끔은 목구멍을 타고 역류하는 국물들을 억지로 삼키며 먹었다. 약해진 내 몸은 본능적으로 내 머리를 지배하며 이렇게 억지로라도 먹지 않으면, 더 이상 버텨내지 못한다는 절박한 경고의 메시지를 끼니때마다 보내왔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조금씩 기력을 회복하기 시작했고 다시 오래 달리기를 하고 야간 자습을 하고 심지어 새벽 자습도 빼먹지 않고 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저 송송 썬 파를 올리는 게 전부였던 엄마의 곰국을 부지런히 먹은 탓이었다.


오늘 저녁은 곰국을 먹어야겠다. 입맛이 없어도 그 누릿한 냄새에 비위가 여전히 상해도 곰국 한 그릇을 뚝딱 비워 내야겠다. 지하철역 근처 부장님의 단골 곰국 집이 생각났다. 곰국 한 그릇을 주문하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듯 숟가락을 꼭 쥐었다. 보글보글 뽀얀 곰국이 내 앞에 놓였고 나는 송송 썬 파를 듬뿍 넣고 용감하게 그릇 채 후루룩 한 모금을 마셨다. 몸안 가득 따듯한 곰국 국물이 퍼지며 그때처럼 힘이 나는 것 같았다. 든든한 마법의 국물이 담긴 곰국 한 그릇 - 약해진 내 몸에 기력을 준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하며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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