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두 부(父)의 만남
II. 2012년 가을
글을 올린 날 저녁부터 석훈은 틈날 때마다 메일을 확인했다.
글을 남길 당시 잘 쓰지 않는 E-Mail 주소를 연락처로 남겼고, 5년 만에 열어보는 메일함에는 온갖 스팸메일이 가득했다.
수백 개의 메일들 중 맨 윗줄에 '대리... 관련'이라는 제목이 있었다.
석훈이 불법을 저지르는 것에 대한 불안감에 잘 쓰지 않는 메일을 적어놓은 것처럼, 의뢰인도 같은 마음에서인지 제목이 정직하지도 정확하지도 못했다.
하마터면 대리운전 관련 스팸메일인 줄 알고 휴지통으로 보낼 뻔했지만,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발신인 ‘이서진’씨가 적은 솔직하지 못한 제목이 석훈은 내심 고마웠다.
메일에는 만날 장소와 시간, 연락처, 필요한 서류 등을 요구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필요한 서류는 건강검진 자료, 재학 중인 대학교 재학증명서, 성적증명서 등 석훈이 사이트에 적어놓은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역시 돈 버는 게 쉬운 건 아니구나.’
석훈은 입대할 때 신검 받은 이후 몇 년 만에 큰돈을 들여 건강검진을 받았다.
“건강검진 비용은 먼저 달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니냐? 한두 푼도 아니고.”
아직 연락을 받지 못한 원준이 참견한다.
하지만 자기 몸 건강검진 하는 것이고 거래가 성사 되지도 않았는데 그 비용까지 요구하기는 마음이 걸렸던 석훈이었다.
건강검진 결과가 이상 없음을 확인한 석훈은 서진에게 연락해 건강상 문제가 없음을 전달했고 다음 날 만나기로 했다.
이는 취업시장에 빗대어 볼 때, 가장 뚫기 어려운 단계인 ‘서류 통과’가 됐다는 것과 ‘채용 전환형 인턴’ 합격자가 인턴기간 중에 큰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신입사원으로 채용되는 것처럼 이번 거래는 거의 성사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떨려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지만, 석훈은 일찍 일어나 필요한 서류를 챙겨서 약속 장소에 나갔다.
서른 여섯 살 서진과의 첫 만남이었다.
석훈은 서진을 보고 캠퍼스 리크루팅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증권회사 젊은 팀장님 같은 차갑고 냉철한 인상이라는 느낌을 받았고, 그와 마주한 이 상황이 취업 준비의 마지막 관문인 최종면접 같다고 느껴졌다.
매우 불편했고 긴장됐다.
육체적 관계를 맺을 사람의 남편을 만나는 상황 자체가 고역이었고, 이 단계를 통과하더라도 직접 관계를 맺는 사람과의 만남은 더 힘들 것만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진은 석훈이 가져간 서류, 외모 등을 꼼꼼하게 살폈고 가족력, 유전 등의 정보도 물었다. 다소 마르고 어제 잠을 못 자 피곤해 보이는 안색 때문인지 건강에 대해 많이 질문했다.
그리고는 만족했는지 서진은 아내의 가임기가 정해지면 다시 연락을 준다고 하면서 100만 원을 수표로 건넸다.
“나머지 300만 원은 임신이 확인되면 드리겠습니다. 이번에 안 될 경우 다음번엔 200만 원으로 깎겠습니다. 다른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네? 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의 말이 날카로웠다. 그의 말대로 정자를 매매하는 사람이 ‘다른 의도’를 갖는다면, 누군가의 아내와 여러 번 관계를 맺더라도 잔금 받는 시기만 늦어질 뿐 손해 볼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석훈은 그 ‘다른 의도’가 무엇을 뜻하는지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지만 ‘다른 의도’를 갖지 않는 것과 최선을 다하는 것은 뭔가 모순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최선을 다하라는 건지, 다하지 말라는 건지 그의 말이 잠시 헷갈렸지만 얼떨결에 적절한 대답을 한 것 같았다.
사실 석훈은 이번 가임기에 임신이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냥 정확한 시기에 적당히 최선을 다하면 모두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성공하지 못하면 다음에 또 이 불편한 만남을 가져야 한다는 것에 금방 후회가 밀려왔고,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확인하고자 한 모든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서진이 돈을 건네고 자리를 떴다.
석훈은 카페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풀타임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받을 수 있는 큰돈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받은 이 상황과 100만 원이라는 큰돈이 종이 한 장에 담겨있다는 것이 얼떨떨하게 느껴졌다.
이 거래로 태어날 아이의 생물학적 아버지 석훈과 혼인한 남녀 사이에 태어난 아이의 법상 아버지 서진, 두 父의 만남은 그렇게 짧게 끝이 났다.
그렇게 집에 간 석훈은 오늘 받은 돈을 낡은 서랍 깊은 곳에 넣어두었다. 왠지 바로 쓰면 안 될 것만 같았고 당장 쓰고 싶지도 않았다.
긴장감이 풀려버린 석훈은 집에 오자마자 피로가 몰려왔다. 그리고 오늘 느낀 평생 느끼기 어려운 감정들은 따로 더 생각하지 않고 피곤함 속에 묻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