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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Aug 16. 2023

내가 체육 시간에 머리카락을 먹은 이유

 중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의 일이다.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감투 하나를 쓰게 되었으니, 반의 총무라는 직책이었다. 반장하고 부반장만 있으면 되지 총무라는 이상한 자리는 왜 있을까, 라고 의아해하긴 했지만, 어차피 하는 일이라곤 학급 회의 때 학생들 의견을 받아적는 게 다였기 때문에 별 불만 없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감투가 엄청나게 싫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그때 우리의 시간표에는 특이하게도 ‘무용’이라는 수업이 들어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 혹은 세 번 있던 체육 시간 중 한 번은 무용을 배우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수업도 운동장이 아니라 한쪽 면이 발레교실처럼 완전히 거울로 된 교실에서 진행되었다. 문제는 그 무용 수업에서 발생했다.

   

 선생님이 우리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신 것은 체조였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대부분 학창 시절에 체조를 배운 기억이 있을 것이다. 우선 가장 잘 알려진 ‘국민체조’가 있고,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역시 인지도가 높은‘청소년 체조’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무용 시간에 배운 건 국민체조도 청소년 체조도 아닌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새천년건강체조’라는 작품이었다.

    

 새로운 체조를 배우는 것까진 괜찮았지만, 나는 곧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닥쳤다. 무용 선생님이 시범 동작을 앞에 나와서 따라 할 학생으로 반장, 부반장, 그리고 총무까지 선발해버린 것이다. 반 친구들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말이다.     


 예전 글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나는 그 누구와 붙어도 이길 자신이 있는 매우 높은 수준의 몸치다. 그런 내게 무용 선생님이 부과한 미션은 너무 가혹했다.

     

 열심히 시범을 보이는 선생님 뒤로 반장과 부반장은 꽤 빠른 속도로 동작을 캐치해서 비슷하게 따라하고 있었지만, 나는 팔다리를 허우적대며 몸짓 같지도 않은 몸짓만을 계속했다. 그러다 너무 창피해서 잠시 가만히 있기라도 하면 ‘총무! 해봐라~!’라는 선생님의 질타가 날아들었다. 대위기 상황이었다.     


 그런 나를 보며 비웃는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지만, 스스로 부끄럽고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대로 가다간 체육 실기 시험에서 D 이하의 점수를 받을 것이 자명했다. 뭔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했다.  

   

 다행히 내게는 막 꽃피기 시작한 문명의 이기, 초고속 인터넷이라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다. 인터넷에 새천년 건강체조를 검색해보니 관계 부처에서 제작한 공식 영상이 떴다. 나는 그날부터 매일 동영상을 보며 혼자 동작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주 후. 무용 시간의 나는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몸놀림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고 방구석에서 갈고닦은 자세에는 자신감이 넘쳐났다. 선생님과 친구들도 달라진 내 모습을 눈치챈 듯, 박수갈채와 환호성을 보내왔다.      


 나는 긍정적인 반응에 힘을 얻어 더욱더 크고 힘차게 동작을 선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환호와는 약간 다른, 키득거리며 숨죽여 웃는 소리가 귓전에 들려왔다. 웃음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급기야 반 전체로 번졌다. 그와 동시에 목소리가 허스키한 한 친구가 커다랗게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닌가.

“야! 세온아! 너 왜 머리카락을 먹고 있냐!”     


 이 외침 후 웃음은 폭소로 변해서 교실 전체를 뒤덮었다. 나는 그제서야 급우들이 웃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도 과격하게 체조를 하다 보니 숨이 가빠 입을 약간 벌리고 있었는데, 마구 휘날리던 머리카락이 그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심지어 그걸 씹기까지 했다.      


 그 정도면 미리 머리를 묶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범생이의 상징인 귀밑 5cm 머리를 자의로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이미 시대착오적인 두발 길이 규정 따위는 없어지고 염색이나 펌을 금지하는 규정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외모나 패션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나는 가장 학생답고 편하다고 생각한 단발머리를 고수했고, 묶지도 못한 머리카락이 그런 볼썽사나운 꼴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나는 열심히 연습한 동작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일념에 가득 차, 그대로 동작을 이어가기에 바빴다. 머리카락 따위 머리에 붙어있든 입으로 들어가든 내 알 바 아니었다. 그 열성적인 모습에 친구들은 더 크게 웃기 시작했다. 바닥을 두드리고, 눈물을 닦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미처 예상치 못한 복병이 있었으니, S라는 친구였다. 그 아이는 모든 동작을 고른 퀄리티로 연습한 나와 달리 ‘몸통돌리기’동작의 스페셜리스트였다.     


 S가 몸통돌리기를 하는 걸 보면 거북목이 펴지고 허리 디스크가 나을 것 같았다. 그 정도로 그 친구의 동작은 크고 시원시원했다. S를 보고 위기감을 느낀 나는 더 힘을 줘서 몸통을 돌려봤지만, 그 아이를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용 선생님은 우리 둘의 과격함을 높이 샀는지 둘만 앞으로 나와서 체조를 해보라고 시키셨다. 우리는 서로 질세라 힘차게 신체를 전후좌우로 뻗으며 동작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체조에는 보기에 조금은 민망한 무브가 꽤 많이 들어 있다. 마음 같아서는 공식 영상을 캡처해서 설명하고 싶지만 시연을 해주신 영상 속의 그분들에게 좀 미안한 마음이 들어, 우리의 졸라맨을 소환해보기로 했다.


 새천년건강체조는 시작하자마자 이런 쩍벌(?) 동작이 여러 번 등장하는데, 하체 운동에는 아주 좋겠지만 반 친구들 앞에서 선보이기엔 사실 많이 부끄러운 몸짓이긴 하다. 심지어 연속해서 보면 기를 모아서 에네르기파를 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아무리 졸라맨이라지만 충격적인 그림 퀄리티에 이걸 올릴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치만 내 그림을 보고 나면 글이 상대적으로 좋보일 것 같아서 올리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의지 하나로 아주 당당하게 이 모든 안무를 소화해냈다. 그러니까 한쪽에서는 내가 쩍벌 자세를 한 채 양손으로 에네르기파를 쏘고 있고, 옆에서는 S가 로켓이 돼서 천장이라도 뚫고 나갈 듯 온 힘을 다해 상체를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대환장파티를 보고 친구들은 정신을 못 차릴 만큼 웃어댔다. 배를 부여잡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도 했다. 심지어 선생님도 웃으셨다.

    

 나는 예상치 못한 열광적인 반응에 조금 머쓱하긴 했지만, 그래도 매우 기분이 좋았다. 친구들에게 큰 웃음을 줬을 뿐 아니라 노력의 성과도 증명했기 때문이다. 포기하지 않고 하면 되는구나. 뿌듯함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때 느낀 성취감은 학창 시절 내내 나의 자양분이 되어주었다.     


 어른이 된 후에도 이따금 몸이 많이 무겁고 찌뿌드드할 때면 배경음악을 틀어놓고 새천년건강체조를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는 데 6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지만 상당히 힘든 동작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한 번만 해도 땀이 주르륵 흐른다. 짧은 시간 안에 굳어진 신체의 구석구석을 풀어주고 적당히 숨차게 해주니, 유익한 운동임이 틀림없다. 널리 알려 추천할 만하다.     


 단, 체조하기 전 머리카락은 꼭 묶도록 하자. 나처럼 공기 말고 다른 것을 입에 넣는 불상사를 겪지 않도록 말이다. 자, 그럼, 헛둘헛둘!


(글을 다 쓰고서야 알았는데요, 새천년건강체조의 이름이 국민건강체조로 바뀌었다고 하네요. 동작은 그대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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