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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Aug 14. 2023

며느리의 취미와 시부모님

 지난 금요일 저녁이었다. 나는 난데없이 찾아온 장염의 여파로 일찌감치 작은방 이불 속에 기어 들어가 있었다. 거실에서는 남편과 아이가 각각 블록 놀이와 플레이스테이션에 한창 몰두 중이었다. 평화로운 광경에 안심한 나는 이불 속에서 마음껏 활개를 치며 뭘 잘못 먹었길래 배탈이 났을까 고민해 보았다.     


 어제는 그냥 밥 먹고 허니버터칩 사 먹었는데. 허니버터칩이 떠오르자 장염의 원인 같은 건 의식에서 멀어지고 잡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새로 나온 레몬딜라이트맛은 나름 맛있었지. 옆에 우유크림맛도 있어서 같이 살까말까 하다가 안 샀는데 어떤 맛일지 궁금하네. 안 그래도 느끼한 과자가 더 느끼해진 거 아닐까?      


 그렇게 앞으로 어떤 과자를 사야 가장 맛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다 스르르 눈이 감기려던 참이었다. 머리맡에 둔 스마트폰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잠을 깨웠다.      


 뭐, 뭐지? 내가 배민에 주문 넣어놓고 공동현관 문을 안 열어줬나? 잠결에 시키지도 않은 배달 음식을 생각하며 폰을 집어들었더니, 화면에는 ‘어머님’이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이상하다, 안부전화는 두 시간 전에 이미 드렸는데. 무슨 일이신지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았더니, 어머님이 대뜸 질문부터 던지셨다.

“야야, 니가 좋아하는 애들이 엔시티 드림이가??”

“네???”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어머님이 엔시티를 거론하시다니. 난 내가 잠이 덜 깬 줄 알았다. 그런데 연이어서 하시는 말씀이,

“지금 7번 틀어봐봐라, 가들(그 애들) 나온다. 아버지(시아버님)가 채널 돌리다가 쟈(저 애들)들이 며느리가 좋아하는 남자애들 아니냐 하시더라.”

“아~~~ 그러셨어요, 어머님? 네, 지금 가서 틀어볼게요.”     


일이 그렇게 된 거였구나. 전말을 알고 나니 피식피식 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아버님이 무려 아이돌 그룹 이름을 기억하시다니. 나는 이불을 몸에 둘둘 만 채로 연신 키득거리며 침대에서 굴러 내려왔다.     


거실로 나가니 영문을 모르는 남편이 플스 패드를 양손에 쥐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 옆에 접근한 후 리모컨을 들어 외부입력을 지상파방송으로 돌려버림으로써 간단하게 TV를 갈취했다. 그리고 어안이 벙벙한 그를 옆에 두고 태연히 어머님과 통화를 계속했다.     


“네~ 어머님~~ 정말이네요. 엔시티가 나오네요. 제가 좋아하는 애들 맞아요, 호호호~”

(사실 내가 좋아하는 그룹은 엔시티 ‘드림’ 보다는 ‘127’ 이지만 어머님이 아이돌 유닛 체제에 대해 아실 리 없다)

어머님은 내심 뿌듯하셨는지, 잘 보고 자라며 전화를 끊으셨다.

“그래, 가들이 마지막으로 하는 거 같드라. 잘 자라~”     


 마침 TV에서는 엔시티 드림이 첫 번째 곡을 마치고 멘트를 하는 중이었다. 서양권 청소년들(잼버리 케이팝 콘서트였다) 앞에서 멤버 마크가 영어로 인사를 건넸다. 나는 생각했다. 마크 영어는 언제나 매끄럽단 말이야. (캐나다인이니까 당연하지만)     


 불의의 습격을 당한 남편은 옆에서 풀이 죽어 있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때다 싶어 신나게 자랑했다.

“여보, 마지막에 한다는 건 오늘 나온 팀 중에 얘네가 제일 인기가 많다는 뜻이라구.    

 이기지 못한 빌런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던 남편의 눈빛이 퍼뜩 현실로 돌아오는 듯 하더니, 혼신의 힘을 다한 리액션이 터져나왔다.

“그러게, 여보. 엄청나네! 저 멤버가 도영? 정우? 해찬?”

 맞장구를 쳐줘서 고맙긴 했지만 그가 맞춘 멤버는 단 한 명이었다.    

 

 그건 그렇고, 아버님과 어머님이 내가 아이돌 팬임을 아신 건 우리 집 거실에 대문짝만하게 붙여놓은 포스터 덕분이었다. 나는 매사에 꼼꼼하질 못해서 포스터의 네 모서리에 테이프를 대충 붙여놓고, 덕지덕지 일어나고 떨어져도 방치하고 있었다. 아무튼 포스터가 벽에 붙어있기만 하면 모서리야 어떻게 보이든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와 정반대로 차분하고 빈틈없으신 아버님은 그 꼴을 보지 못하시고 손수 테이프를 다시 깔끔하게 발라주셨다. 그걸 떼라고 하시기는커녕 보수까지 해주신 아버님의 관대함이 나는 참 고마웠다.      


 또 아버님은 내가 매주 토요일마다 피아노 레슨을 받으러 가는 걸 아시고는, 남편이 출장으로 집을 비울 때면 대신 아이를 봐주겠다고 종종 제안하신다. 내가 레슨을 빠지지 않을 수 있게 배려해주시는 것이다.      


 사실 우리 부부는 시가와 친정 모두 넉넉한 편이 아니셔서 물려받을 재산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러면 뭐 어떤가. 시부모님의 성품이 이렇게 넉넉하신데. 며느리의 취미에 관심을 가지고 지원해주시는 두 분의 마음이 그 어떤 재물보다도 더 든든한 자산이다.     


 그다지 싹싹하지도 않고 애교도 없는 며느리를 위해주시고 배려해주시는 어머님과 아버님, 두 분이 계셔서 참 좋다. 이번주엔 전화를 더 자주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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