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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Sep 20. 2023

행복 터지는 콘서트 후기, 두 번째

왼쪽과 오른쪽의 그들, 그리고 개막

(이전 편에서 이어짐)    

 

프로관람러

    

 좌석 상태가 준 실망감은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경기장과 무대세트를 보는 순간, 불평불만은 자취를 감췄다. 잘 보였다.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무대가 잘 보였다. 2층에 앉았던 잠실보다도 더 가까이 보였다.

      

 게다가 메인스테이지에서 가장 멀리 위치한 우리 구역에도 무려 바로 앞에 서브스테이지가 마련되어 있었다. 나는 그곳을 보면서 두 눈을 의심했다. ‘설마 엔시티가 여기까지 오겠어? 여긴 멤버들이 서는 곳이 아닌 다른 용도일 거야.’라고 생각했다. 그 작은 무대는 그만큼 가까웠다. 나는 이 정도 거리라면 망원경을 통하면 이목구비까지도 볼 수 있겠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관중이 들어차기 전의 콘서트장. 동그라미 친 부분이 내 구역과 가까웠던 서브스테이지다.


 

콘서트 시작 시각인 여섯 시까지는 한 시간 정도가 남은 상황, 내 양옆 자리는 아직 비어있었다. 나는 거기에 사람이 오기 전까지만이라도 다리를 뻗고 있으려고 왼쪽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앉아 무릎을 쫙쫙 폈다. 그러나 양다리에 자유가 주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오른쪽 좌석에 주인이 들어섰다.

      

 작년 잠실에서 옆자리의 팬과 대화를 텄던 일이 아주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때처럼 처음 만나는 팬과 소통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내가 먼저 말을 걸 용기는 없어서 괜스레 어색함에 쭈뼛거리며 정면만 바라보고 앉아있었고, 새로 도착한 팬은 짐을 정리하느라 주변엔 전혀 관심이 없어보였다.

    

 등산용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배낭을 들고 온 그녀는 먼지투성이 바닥에 망설임 없이 가방을 내려놓더니, 지퍼를 열고 물건을 줄줄이 꺼내기 시작했다. 뭘 그렇게 열심히 사부작거리며 꺼내는지 궁금했지만 대놓고 쳐다보는 건 너무 무례했으므로 슬쩍슬쩍 곁눈질밖에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믐뭔봄을 끄집어내는 것 같더니 이내 망원경을 손에 쥐었다. 맙소사, 나는 그녀의 망원경을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것은 내가 준비한 뮤지컬 관람용 소형 망원경과는 상대가 안 되는 대구경이었다. 그걸로 보면 저기 멀리 메인스테이지에서 발가락 꼼지락거리는 것까지 보일 것 같았다.

      

 그런데 저거 무거워서 어떻게 들고 있나, 하고 신기해하는 찰나, 그녀가 또 다른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삼각대였다. 그랬다. 그녀는 프로였다. 콘서트에 한두 번 와본 솜씨가 아니었다. 없는 게 없었다.

      

 프로는 그 좁은 통로에 삼각대와 망원경을 세팅하고는 또 부시럭부시럭 무언가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등을 휙 돌렸다. 뭘 하나 했더니 핸드폰을 꺼내 셀카를 찍고 있었다. 아, 이게 바로 인스타나 블로그에서 봤던 관중석 배경 셀카구나. 감이 왔다.

     

 뭐, 누구나 셀카는 찍을 수 있으니까. 처음엔 그러려니 했는데 찰칵 소리가 끊이질 않고 이어졌다. 사진을 정말 엄청나게 많이 찍는 모양이었다. 바로 옆의 나는 슬슬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전혀 나오지 않게 찍고 있는 게 맞을까? 본인도 자기 사진에 내가 나오면 싫겠지만 나 역시 약간의 뒷모습조차 등장하고 싶지 않았다.

     

 운전할 때 오른쪽 사이드미러를 보는 속도로 곁눈질을 해봤더니, 다행히 액정 화면에는 본인의 얼굴과 아직 많이 비어있는 반대쪽 좌석들만이 떠 있었다. 나는 새삼 그녀의 스킬에 놀랐다. 어떻게 이렇게 밀착해서 앉아있는데 나만 안 보이게 쏙 빼고 촬영할 수 있지? 도저히 넘볼 수 없는 경지였다.

    

 내 호기심이 온통 오른쪽 사람에 가 있을 때, 공연 시작을 불과 10분 정도 앞두고 왼쪽 자리의 주인이 나타났다. 나는 황급히 옆좌석에 올려두었던 가방을 다시 무릎 위로 올렸다. 그런데 그 자리에 앉는 팬을 본 순간 나의 모든 호기심이 단숨에 방향을 급선회했다. 그녀 외국인 팬이었기 때문이다.

    

노 코리안?

     

 광장에서 외국인을 많이 보긴 했어도, 내 바로 옆자리에 앉을 줄은 몰랐다. 엔시티가 해외 팬층이 두텁다는 것도 진작 알고 있었지만 그제야 실감이 났다. 콘서트를 보러 우리나라까지 온다는 건 웬만한 팬심이 아니고서야 하기 힘든 일 아니겠는가.

    

 그녀는 왠지 루마니아 사람처럼 보였다. 새빨간 머리에 날카로운 콧날, 창백한 얼굴빛이 내 머릿속엔 동유럽 사람의 특징으로 저장되어 있었나 보다. 순간 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불쑥 질문을 던졌다.


“죄송한데 혹시 어디서 오셨어요?”

 우리말로 말을 건 이유는, 한국 아이돌을 보러 올 정도면 한국어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왼쪽의 팬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난 그제야 아차, 싶었다.

“노 코리안?”

“노, 노 코리안.”

“오케이, 쏘리...”


 그렇게 나의 대화 시도가 무산되려 할 때였다. 불굴의 호기심이 소심함을 이겨버렸다. 미처 저지하기도 전에 내 입에서 단어가 튀어 나갔다.

“잉글리시, 오케이?”

 옆자리 팬은 약간 밝아진 표정으로 오케이,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음 질문을 던졌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는 그 마법의 영어 문장이었다.

“익스큐즈 미, 웨얼 알 유 프롬?”


 참고로 나는 영어를 읽는 데는 큰 불편함이 없지만 말은 잘 못한다. 그런 내가 용감하게 영어로 말을 걸다니,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 그녀는 내 말을 용케 알아듣고는 아메리카, 라고 대답해주었다. 미국 사람이라고? 루마니아가 아니었구나. 그러나 나의 궁금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유 케임 히얼 포 디스 콘서트?”

 그녀가 엔시티를 보러 태평양을 건너왔다는 사실이 놀라웠던 나는 이렇게 물었다.

“노, 잇 워즈 코인시던스.”

 그녀는 콘서트와 상관없이 한국에 놀러왔다가, 마침 여행 기간 중에 공연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표를 샀다고 했다. 한마디로 우연이라는 것이었다.


“Then, 아 유 엔시티 팬?”

 나는 그녀가 한국 여행 중 유명 아이돌의 공연이 열린다는 소문을 듣고 구경 온 평범한 대중인 줄 알았다. 그래서 팬이냐고 물어보았더니, 그녀가 대답 대신 갑자기 치마를 걷어 다리를 보여주는 게 아닌가. 뭐, 뭐지???

     

 순간 당황했지만, 그녀의 허벅지를 본 순간 당혹감은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그곳엔 <To the World, We Are NCT>라는 문구가 한 뼘 크기나 되는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와우.

    

 감탄해서 말도 나오지 않았던 나는 대신 엄지손가락을 크게 치켜들며 고개만 연신 끄덕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리스펙! 이라고 크게 외쳐줄 걸 그랬다. 그녀는 내 얼굴과 몸짓을 보고 대충 말하려고 하는 바를 알았는지 자랑스럽고 흐뭇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런데 이 정도로 열렬한 팬이 한국 여행을 왔는데, 하필, 마침 그 기간에 좋아하는 아이돌의 콘서트가 열리는 우연이 벌어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는 재차 물어보았지만 그녀는 코인시던스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굿 포 유, 라고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대단한 행운에 내가 다 부러울 정도였다.

    

Neo Got My Back

     

 나는 이후에도 미국 팬과 계속 대화를 이어 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드디어 콘서트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조명이 꺼지고 전광판에 멤버들의 얼굴이 하나씩 빠르게 등장했다. 엔시티 전체 리더 태용의 페이스를 마지막으로 영상은 미래적인 도시와 UFO를 연상케 하는 배경으로 바뀌었고, 인트로 음악 Neo Got My Back(NCT는 Neo Culture Technology의 약자이다)이 흘러나왔다. 관중석을 가득 메운 수천 명의 팬들은 일제히 흥분에 휩싸였다.

     

 나도, 미국 팬도 SNS 중독 팬도 너 나 할 것 없이 참아왔던 비명을 목청이 터져라 질러대기 시작했다. 음반으로 들었을 때는 그저 난해한 연주곡인 줄만 알았던 음악이 콘서트 오프닝으로 쓰이니 그렇게 두근거릴 수 없었다.

      

 메인 무대의 막이 서서히 올라가고 3층짜리 구조물에 줄지어 선 멤버들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관중석은 거의 광란의 도가니였다. 형광연두색의 바다에 물결이 출렁였고 거친 함성의 파도는 무대를 삼켜버릴 듯 치솟았다.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 막이 오르는 그 순간, 도파민이 마구 분출되며 몸 전체가 흥분으로 떨리는 느낌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공연장이 통째로 현실 세상과 분리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는 기분, 그곳에 있는 사람들만이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듯한 기분이랄까.

     

 공연이 끝난 후 인터넷에서 후기를 찾아보니 많은 팬들이 막이 오르던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 역시 한 달 가까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떠올릴 때면 간절히 시간을 되돌아가서 한 번 더 그 흥분을 느끼고 싶어진다. 당장 이 글의 대문 사진인 막이 오르기 직전의 공연장 모습만 봐도 다시금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다.

     

 막이 다 오르자 3층의 꼭대기에는 엔시티를 구성하는 3개의 유닛, 127, Dream, WayV의 리더 세 명이 카리스마 넘치게 자리해 있었고 그 밑으로 열여섯 명에 달하는 멤버들이 늠름히 서 있었다. 부상 중인 태일을 제외하고는 모든 멤버가 그곳에, 나로부터 불과 몇백 미터 앞에 있었다. 나는 그들이 컨디션 관리를 잘해서 무사히 팬들 앞에 섰다는 사실에 마음속으로 무한히 감사했다.

     

 공연장을 땅에서 뽑아버릴 듯한 무지막지한 함성 속에서 단 다섯 명의 멤버만을 남겨두고 엔시티들이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그 다섯 명은 당연히, 데뷔곡을 함께 했으며 가장 최근에 발표한 곡도 합작한 최정예 멤버들이었다. 무대 중앙에 덩그러니 남겨진 그들이 안무 대형으로 서서 포즈를 취했다.

      

드디어, 쇼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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