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온 Oct 20. 2023

완벽한 곡을 어떻게 리메이크할 것인가

SES와 레드벨벳의 <Be Natural>

 원곡을 전혀 바꾸지 않은 리메이크가 있다. SES의 곡 <Be Natural>를 직속 후배인 레드벨벳이 새로 부른 것이다.

      

 두 버전 사이에는 14년이라는 간격이 존재하지만, 달라진 부분은 오직 목소리뿐이다. 듣는 사람이 당황할 만큼 원곡과 리메이크의 반주가 똑같다. 대개 리메이크는 원곡과의 차별화를 위해 약간이라도 편곡을 하게 마련이므로, 이 선택은 청자의 궁금증을 자아낸다. 두 팀의 제작사인 SM 엔터테인먼트는 왜 이런 방식을 택했을까.

     

 힌트는 Be Natural의 작곡가 유영진의 성향에 있다. 그는 평소 자기 곡의 리믹스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도 본인의 음악을 모든 요소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하나의 완성품으로 보고, 어떠한 형태의 개작이라도 그 완성도를 해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실제로 Be Natural은 발표 당시 평단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유영진의 능력이 최고조로 발휘된 걸작이라는 평이었다. 아무리 후배 걸그룹이라고 해도 이 완벽한 곡을 리메이크한답시고 고치고, 넣고 빼는 행위는 작곡가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바꿀 데가 없는 그 곡을 굳이 레드벨벳이 다시 부르도록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도 역시 SES의 음악에 대한 SM의 자부심 때문일 터이다. Be Natural이 수록된 SES의 4집은 아이돌의 한계를 넘어선 명반이라는 대단한 호평을 받았었다. 그런 곡을 신인 걸그룹이 부르게 함으로써 지금의 10대, 20대에게 자사의 전통을 과시하고, 음악성에 대한 신뢰감을 부여한다는 전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물인 레드벨벳의 Be Natural을 듣고 난 내 감상은 조금 미묘했다. 팀의 메인보컬 웬디가 흠잡을 데 없는 노래 실력의 소유자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편곡이 SES의 것과 똑같은 탓에, 선배와 후배를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걸그룹 역사상 최고의 보컬로 추앙받는 바다는 이 쉽지 않은 곡을 말 그대로 휘어잡았다. 웬디가 스킬적으로 휼륭하긴 하지만 바다의 째지하면서 도도한 듯, 나른한 듯한 보컬 톤을 넘기는 어렵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서브 보컬들의 가창도 유려하고 매끄러우나, 유진과 슈의 독특한 음색에 비하면 조금 평이하다는 느낌이 든다. 사실 SES의 동생 라인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노래를 잘한다.

     

 새로운 Be Natural에 대한 나의 애매한 반응은 그러나, 뮤직비디오를 보는 순간 놀라움으로 변했다. SM이 개작의 효과를 노린 것은 음원뿐만이 아니었다. 퍼포먼스야말로 원곡의 장점을 극대화한 뛰어난 리메이크였다.

      

 고급스럽고 세련된 음악의 무드에 맞추어 미니멀한 움직임으로 그루비한 느낌을 살리는 데 집중한 SES의 안무에 비해, 레드벨벳의 춤은 테크니컬하고 정교하며 화려하다. 이 뮤비만큼은 시간을 내어 꼭 한번 시청하기를 권한다. 그들의 댄스는 케이팝 아이돌이 춤을 얼마나 호되게 단련하는지 보여주는 증거다.

     

 선배와 달리 타이트한 핏의 정장을 입고 수직 디자인이 들어간 힐을 신은 레드벨벳의 퍼포먼스는 대단히 매혹적이다. 레드와 블랙이 번갈아서 포인트 컬러로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장면도 고혹적인 이미지를 극대화한다. 올해로 벌써 10년 차가 되는 레드벨벳이 가장 농염한 컨셉을 소화한 것이 이 데뷔 초의 Be Natural이라는 사실이 아니러니하다.

     

 SM은 이후에도 <Dreams Come True>를 에스파에게 리메이크하도록 함으로써 또 한 번 SES의 유산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옛 뮤비를 리마스터링하여 공개하는 프로젝트도 진행하여 HOT와 신화, Fly to the Sky 등 본인들이 길러낸 유수의 아이돌을 재조명했다. 작년엔 NCT 드림이 HOT의 캔디를 리메이크해 음원차트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90년대에 유년기를 보낸 동시에 현재의 케이팝에도 관심이 많은 팬으로서, 이런 일련의 시도에 반가움을 느낀다. 아이돌의 음악이라도 그중 작품성 있는 곡이 변주를 통해 재생산되어 일종의 클래식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룬 레드벨벳의 리메이크도 그런 맥락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특히 근사한 퍼포먼스는 그런 계승 의식을 매우 효과적으로 드러낸 성과라 하겠다.

      

 무엇보다 SES의 팬으로서 후배 그룹이 그들의 음악을 오마주하고 커버하는 일이 매우 뿌듯하다. 비록 한 멤버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모든 면에서 모범적인 선배가 되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들의 음악이 좋았다는 사실만큼은 여전히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레드벨벳, <Be Natural> (2014)




S.E.S. <Be Natural> (2000)

매거진의 이전글 나도 공부하는 엄마가 되어야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