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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Oct 23. 2023

자유로운 우리를 봐 자유로워

J.S. 밀 <자유론>을 읽고

 대관절 나는 이 쉽지 않은 사상의 고전을 어찌하여 읽게 되었는가. 그것은 브런치의 친애하는 문우이시자 유명 출판사에서 출간을 앞두고 계신 배대웅 작가님의 추천 때문이었다.

     

 얼마 전 배 작가님과 댓글로 대화하면서, 이상주의자인 내 성격상 사회의 지독한 측면을 상기시키게 만드는 사회과학 쪽 저서는 잘 안 읽게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런 나의 무지렁이 같은 댓글에 배 작가님이 달아주신 답글은 좋은 의미로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사회과학이 꼭 현실의 모순을 지적하기만 하는 학문은 아니에요. 찾아보면 인간 이성에 대한 굳은 믿음을 토대로 희망찬 미래를 그려내는 작품도 많습니다. … 어떻게 하면 인간을 불합리한 현실에서 구해낼지, 이상적인 사회로 나아가려면 무엇을 해야 할 지가 이 작가들이 평생을 걸고 고민한 문제였어요.’

     

 난 원래 먼저 원하지 않았을 때 누가 날 가르치는 것을 싫어하지만, 이때는 예외였다. 배 작가님의 가르침을 듣고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이었다. 특히 역사에 이름을 남긴 저명한 학자들이 평생을 걸고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고민했다는 사실이 감동적이었다. 그래서 작가님이 추천하신 책 중 (작고 얇은) <자유론> 읽기를 시작으로 사회과학과 친해져 보기로 결심했다. 새로운 지적 자극을 받은 날이었다.

     

 실제로 <자유론> (J.S.밀, 책세상, 서병훈 역)은 작고 얇고 가벼운 책이긴 했다. 다만, 고전답게 내용까지 가볍진 않아서 아주 주의 깊게 읽어야 했다. 꼭 다시 고등학생이 되어 비문학 지문과 마주한 느낌이었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문장은 되풀이해서 보고, 핵심 문장은 노트에 적어가며 (이 와중에 절대 책에 밑줄을 긋진 않는다) 열심히 읽었다.

     

 그렇게 해도 나의 독해력으로는 <자유론>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할 수 없었으므로, 보충학습을 했다. 먼저 작년에 인상 깊게 읽은 휴머니스트 출판사의 <서양의 고전을 읽다>를 꺼내 들었다. 역시 거기엔 <자유론>을 다룬 챕터가 실려있었는데, 그 장을 쓰신 분이 다름 아닌 서병훈 교수님이 아닌가. 아무래도 그분이 우리나라에서 밀에 관한 최고의 권위자이신 것 같았다.

     

 그러면 이 존 스튜어트 밀이라는 석학은 어떤 사람이었나?

    

 그는 요즘 사람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금수저’였다. 경제적인 면에서라기보다는 (물론 재산도 충분했을 것 같지만) 지적인 면에서 그랬다. 아버지인 제임스 밀이 당대의 유명한 사상가였기 때문이다. 저명한 경제학자인 리카도와 절친이었을 정도니 말 다했다.

     

 그런데 아버지 밀을 알고 나니, 벤담과 더불어 공리주의자의 대표로 불리는 밀이 어느 쪽인지 헷갈렸다. 검색해보니 아버지 밀도 공리주의 학파인 것으로 나와서 더 그랬다. <자유론>에서 양적 공리주의를 비판하고 대신 질적 공리주의를 주창한 것을 보고서야, 아들 밀이 그 분임을 알았다.

     

 밀은 언행이 일치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는 여성도 참정권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잠시 정치에 발을 담갔을 때도 일절 돈을 쓰지 않아 공명선거의 신기원을 이룩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의로운 학자였던 밀의 <자유론>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물론 가장 완벽한 개요는 위에 언급한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에 실린 서병훈 교수님의 글일 것이다. 그러나 몇 장 되지 않는 그 분량조차 브런치에 옮기기에는 너무 길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요약의 요약을 해보았다. 혹여 내가 밀의 논지를 잘못 이해해서 틀리게 표현한 부분이 있다면 댓글로 꼭 알려주시길 바란다.

     

 다음은 <자유론>의 핵심 주장이 단적으로 드러난 문단이다.

     

 나는 이 책에서 자유에 관한 아주 간단명료한 단 하나의 원리를 천명하고자 한다. … 인간 사회에서 누구든 – 개인이든 집단이든 –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 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harm을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라면, 당사자의 의지에 반해 권력이 사용되는 것도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유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문명사회에서 구성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어떤 공권력의 행사도 정당화할 수 없다. 자신의 물질적 또는 도덕적 이익good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간섭하는 것도 일절 허용되지 않는다.

     

 내가 읽기로는, <자유론>의 모든 내용은 이 주장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 구체적인 예를 소개하며, 예상되는 반론에 맞서 논박을 펼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금만 더 자세히 정리해 보겠다.

     

 밀이 말하는 자유에는 크게 3가지 종류가 있는데, <자유론>에서는 ①과 ②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① 사상의 자유
 ② 선택의 자유
 ③ 결사의 자유

     

 ①사상의 자유는 생각과 토론의 자유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생각의 자유를 침해해서도, 침해받아서도 안 되는 걸까? 밀은 3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진리일 수도 있다.

둘째,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틀린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진리의 일정 부분을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

셋째, 통설이 진리이고 전적으로 옳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둘러싼 토론과 비판은 여전히 필요하다.

     

 그래서 밀은 ‘토론’의 과정을 매우 강조한다. 여러 가지 의견을 가진 사람들 간의 토론을 통해 통설이 진리가 아니라는 점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통설이 진리일 경우에조차 토론을 통해 그것을 검증할 기회를 부여할 수 있고, 통설을 믿는 사람들도 일방적으로 진리를 주입받는 것이 아니라 그 근거를 제대로 알고 믿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토론은 유독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절차인 것 같다. 내 윗세대는 물론이고, 내가 속한 세대까지도 학창 시절 받았던 주입식 교육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발표식 혹은 토론식 수업을 부담스러워한다. 어쩌다가 논쟁할 기회가 주어져도, 나서서 조리 있게 자기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물론 우리 사회도 젊은 세대로 갈수록 열린 토의를 통해 진리를 찾고 의사결정을 하는 데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인터넷이나 SNS를 통한 여론 형성이 그 보기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부쩍 밀이 가장 경계한 ‘다수의 횡포’에 해당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밀은 ‘온 인류 중에서 단 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고 했다. 이 원칙에 힘입어,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특히 그 의견이 통설과 멀다고 해서 마녀사냥을 일삼는 문화는 지양해야 할 것이다.

     

 ②선택의 자유는 각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자유이다. 밀은 이것을 ‘개별성’이라고 칭하며, 이렇게 역설한다.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자기 식대로 인생을 살아가다 일이 잘못돼 고통을 당할 수 있다. 설령 그런 결과를 맞더라도,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게 되면 다른 사람이 좋다고 생각하는 길로 억지로 끌려가는 것보다 궁극적으로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세상의 모든 꼰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밀에 따르면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라는 충고를 빙자한 잔소리와 간섭은 설 자리가 없다.

     

 이는 또 무비판적인 획일화를 경계하는 지침이기도 하다. 높은 사람이나 뛰어나게 똑똑한 사람을 무턱대고 모방해서는 안 되고, 자기만의 가치관과 철학,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브런치 글쓰기를 떠올렸다. 모두 알다시피 브런치에서 조회수를 올리고 구독자를 모으는 인기 주제는 정해져 있다. 인기 작가가 되어 유명해지고 싶거나, 숫자로서 높은 성적을 받고 싶다면 그런 종류의 주제를 택해서 쓰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해당 소재에 진심이 아닌 사람까지도 그렇게 한다면 브런치는 획일화된 글로 넘쳐나는 곳이 될 것이다. 작가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글을 쓸 자유가 있고, 설사 그 결과가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는 숫자로 나타날지라도, 줏대 없이 시류에 편승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이제까지의 논지만 두고 보면 밀은 자유주의자의 첨병이자 화신으로만 보이고, 자칫 이기심을 조장한다는 평판도 들을 법하다. 그러나 밀은 결코 사회성과 개별성의 관계를 적대적인 것으로 설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러한 인간의 두 자질을 동시에 발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에서 보호받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신이 혜택을 받은 만큼 사회에 갚아주어야 한다’는 문장에서 밀의 이러한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여기서 밀은 모두가 지켜야 할 두 가지 사회적 의무를 상정한다.

     

첫째, 개인의 권리와 이득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둘째, 사회를 방어하기 위해, 그리고 구성원이 공격과 괴롭힘을 당하지 않도록 노동이나 희생을 감당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밀은 오직 그 자신에게 ‘좋은 방향으로의 자유’ 만을 인정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방종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다. 이는 ‘자유의 원칙은 자유롭지 않을 자유까지는 허용하지 않는다’ 는 뜻이며, 그런 이유에서 노예 계약은 정당화될 수 없다.

      

 밀은 여기서 쉬운 예를 하나 들어서 이 개념을 설명하는데, 바로 다리를 건너는 사람의 예이다. 어떤 사람이 매우 위험한 다리를 건너려고 할 때 그를 막아서거나 제지한다면 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일까?


 밀의 대답은 ‘아니오’다. 왜냐하면 자유란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하는 것인데, 자신이 다리에서 떨어져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밀이 말하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하는 자유란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살 자유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발전’이라는 방향을 위한 자유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물질적 쾌락보다 정신적 쾌락을 우위에 두는 밀의 공리주의와도 일맥상통한다. 그가 말하는 자유란 물질적 쾌락을 마음껏 누리는 상태가 아닌, 지적·감정적·도덕적 쾌락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인 것이다.


 나는 여기서 지금까지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 배부른 돼지가 되는 선택을 해 온 것을 반성했다. 그러니까 배민에서 배달 음식 좀 그만 사 먹고, 그 돈으로 좋은 책을 읽거나 음반을 사거나, 아니면 아름다움을 위해 옷에 투자해야겠다. (이것도 물질적 쾌락인가?!)


    



 고전을 다룬 글인 만큼 읽는 분이 지루하지 않게 짧게 쓰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단문 쓰기에 실패했다. 명저의 내용을 내가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느라 이렇게 된 것이니, 독자분들의 너른 양해를 구한다.

     

 그리고 <자유론>은 나처럼 평범한 사람도 읽을 수 있을 만큼 고전치고는 완독이 어려운 책은 아니니, 모두 읽어서 자유로워지도록 하자. 억압된 자아는 풀려나고 자유로운 영혼은 더 자유로워질 터이니.

     

이제 이 글의 제목으로 쓴 다음의 노래 가사를 다시금 소리높여 부르며 글을 마치겠다.


 자유로운 우리를 봐, 자유로워~
 NCT127, <무한적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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