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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90년대 과학학습만화

by 세온

어린 시절 나는 항상 읽을 책이 부족한 아이였다. 부모님이 사준 전래동화, 세계동화와 위인전은 진작에 다 떼고 책장 가장 높은 단에 있던 아빠 책까지 꺼내볼 정도였다. 그런 내게 친척 언니, 오빠들이 물려주는 전집은 가뭄에 단비처럼 고마운 존재였다.

아마 5학년 정도 됐을 때의 어느 날,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이모가 사촌오빠의 학습만화 한 질을 내게 주겠다고 하신 것이다. 그게 바로 오늘 글의 주인공인 금성출판사의 과학학습만화 전집이다.


그 시절 친구 집이나 동네 언니들 집에 놀러 가면 거의 매번 책장에 이 전집이 꽂혀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만큼 유명하고 대중적인 학습서였다.

총 40권의 만화는 모두 무척 재미있었다. 물리학, 화학, 생물학, 지구과학, 컴퓨터 공학 등 과학의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각 권의 내용 또한 매우 알찼다.

다루는 지식의 수준은 꽤 높아서 초등학생인 난 전부 제대로 이해하진 못했다. 그렇지만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아는 대로 흥미롭게 읽어나갔다.

그중 가장 재미있었던 편은 역시 <요술의 세계>였다. 당시에 널리 알려진 마술을 소개하고, 이면에 숨은 트릭을 밝혀주는 방식이어서 어려운 부분이 전혀 없이 흥미진진했다. 트릭에 응용된 과학 원리도 함께 설명해 주어 유익하기도 했다.

<요술의 세계> 에서 거울 요술의 원리를 설명한 부분

그리고 내용을 10분의 1도 이해하지 못했으나 이상하게 내 마음을 잡아끄는 책이 있었으니, <원자력과 핵융합> 편이었다. 여러 명의 과학자가 등장해 각자 다른 모양의 모형을 만들어 내는 내용인데, 각 모형의 장점과 단점 등이 함께 기술되어 있던 파트가 특히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무엇을 위해 만든 모형인지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각각의 형태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얼마 전 나는 이 만화에 대한 추억을 떨치지 못해 중고서점에서 전집을 구입하고야 말았다. 마침 상태가 최상급이면서 가격대가 적당한 물건을 발견하고 바로 결제했더니, 기쁘게도 하루 만에 도착했다. 전집은 과연 30년 된 책 치고는 매우 깨끗하고 튼튼했다. 나는 상자를 개봉하자마자 감회에 젖었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어 엄마 아빠가 이 책을 몽땅 버리겠다고 통보했을 때, 나는 왜 말리지 않았단 말인가. 그때의 실책 때문에 결국 이렇게 돈을 주고 다시 사게 되지 않았나.

전집을 책장에 가지런히 꽂아두고 나서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옛날의 그 ‘모형’을 찾는 것이었다. 분명 아주 어려운 물리학 내용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니까, <원자력과 핵융합> 편에 있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 거기 있었다. 다음 페이지다.

사실 이 파트는 여전히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제1권 <컴퓨터의 세계>를 처음부터 찬찬히 읽어보니, 타임머신을 탄 듯 기분이 참 이상했다. 386인지 486인지 모를 컴퓨터를 4세대 최신 모델로 소개하며 데이터를 옮길 수 있는 매체로 플로피디스크를 예로 들고 있었다. 5세대는 인공지능의 세대라며, 가정용 로봇이 모든 가사일을 도맡아 하는 장면을 그려놓기도 했다. 여기에 따르면 2023년 현재는 4세대와 5세대의 중간이라고 볼 수 있겠다.

마음 같아서는 딸아이가 고학년이 되면 이 만화를 읽히고 싶지만, 여러 문제 때문에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과학 분야 특성상 지난 세월 동안 지식이 너무 많이 업데이트되었고 기술도 어마어마하게 발전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애는 이 책의 그림체를 무지 올드하다고 생각할 게 뻔하다.

그저 내가 한 권, 한 권 꺼내 읽으면서 옛날 추억을 회상하고, 아직까지도 변하지 않은 진리와 원리를 학습하는 용도로만 써야겠다. 그리고 아이에겐 훌륭한 최신 전집을 보여주어야겠는데, 최근에도 이렇게 수준 높은 학습만화가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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