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내 글에 어린 시절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워낙 이른 시기부터 무엇인가를 덕질하며 살아온 까닭이다. 이번엔 중학생 때 좋아했던 팝 가수와 노래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 주인공은 아마도 역사상 가장 유명한 보이밴드인 백스트리트 보이즈다.
그때 나는 어떤 계기로 인해 영어 공부에 완전히 꽂혀 있었다. 이왕 공부할 겸, 평소에 듣는 음악도 영어 노래로 전부 바꿔버리면 어떨까. 우리나라 아이돌을 다 제쳐두고 외국 가수들에게 눈을 돌린 건 그런 단순한 생각에서였다.
그 길로 바로 마트에 가서 음반 코너를 살펴봤더니, 백스트리트 보이즈의 베스트 앨범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이 그룹, 잘 모르지만 이름은 들어봤는데. 나는 5,500원을 지불하고 그 앨범의 테이프를 샀다. 그리고 전곡을 듣자마자 그들의 팬이 되었다.
90년대 후반과 20년대 초반에 전성기를 보낸 백스트리트 보이즈(BSB)는 최근까지도 앨범을 내고 활동 중인 현역이다. 그러나 그들 음악의 정수는 역시 1~4집에 있다. 그 네 음반에 실린 곡 중 내가 특히 좋아했던 노래들에 대해 얘기해보겠다.
(나열한 곡 수가 많아 영상 링크는 생략했습니다. 혹 글을 읽고 마음이 동하는 곡이 있으시다면 찾아 들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I Want It That Way
두말할 것 없이 BSB 최고의 히트곡이다. 난 우연한 기회에 노래의 유명세를 실감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라는 TV 프로그램에 스페인 친구들이 출연했는데, 단체로 우리나라의 노래방에 간 장면이 나왔다. 거기서 친구들은 노래방 책자에서 아는 제목을 찾다가, BSB의 I Want It That Way를 발견하고는 다 같이 신나게 노래를 부른다.
또 한 번은 유튜브에서 <브루클린 나인 나인>이라는 미국 시트콤의 한 장면을 봤을 때다. 1분 30초밖에 안 되는 짧은 영상(자막 포함)이어서 이렇게 가져와 봤다. 노래를 아는 분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개그다. 영상을 본 내 반응은 댓글과 똑같았다.
이 곡은 이렇게 대중적으로 히트했을 뿐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음악평론가 임진모는 <세계를 흔든 대중음악의 명반>이라는 저서에서 90년대 명곡 중 하나로 I Want It That Way를 꼽았는데, 나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서점으로 달려가 해당 페이지를 들춰보았다. BSB가 비틀스, 밥 딜런, 롤링 스톤스 등 역사에 남을 위대한 아티스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걸 보고 어찌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른다.
음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전세기도 팬으로서의 자부심을 한껏 추켜올려 주었다. 이게 바로 세계적인 그룹의 인기란 것이구나. 우리나라에선 대통령만 타고 다닌다는 전세기까지 보유한 저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구나. 나는 그렇게 동경심을 키워갔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 마음엔 약간의 사대주의도 있었던 것 같다.
I Want It That Way는 리듬이나 멜로디도 훌륭하지만, 멤버들의 파트 분배가 매우 적절해서 좋았다. 노래를 못해도 단 한 줄의 파트라도 부여받는 우리나라의 아이돌과는 달리, BSB는 리드보컬 세 사람 – 브라이언, 닉, AJ –를 제외한 둘은 거의 파트가 없었다. 하위와 케빈, 두 사람은 각각 고음과 저음을 담당하며 하모니에서만 존재감을 발휘하곤 했다.
그러나 I Want It That Way에서는 모든 멤버가 벌스와 브릿지를 적절히 나눠 부른다. 다섯 명의 보컬 합은 내가 이들을 그토록 열렬히 좋아한 이유다. 각자의 개성 강한 목소리가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보컬 그룹. BSB는 내게 언제나 그렇게 가창력이 훌륭한 팀이었고, 결코 틴 팝만 부르는 아이돌이 아니었다.
이 노래의 백미는 역시 후반부 닉의 고음, don’t wanna hear you say – 이다. 닉은 디카프리오를 닮은 잘생긴 외모로 소녀팬들을 잔뜩 끌어모았던 데다가 노래도 잘했다. 그의 독특한 음색과 가창력은 BSB 음악의 주축이었다.
마지막 후렴을 장식하는 브라이언의 애드립도 감정을 한층 고조시킨다. 브라이언은 가장 어려운 부분을 도맡는, 최고의 보컬리스트였으나 성대에 이상이 온 후엔 예전의 실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의 라이브를 들으면 전성기 시절 그의 미성이 BSB의 노래에서 얼마나 큰 지분을 차지했었는지 실감할 수 있다.
I Want It That Way에서 또 하나 특기할 부분은 후렴의 가사에서 ain’t이라는 표현이 반복해서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런 단어를 처음 봤던 나는 영어사전에서 뜻을 찾아보았는데, be not의 축약형이라고만 되어 있었다. 아직까지도 이 표현의 뉘앙스를 잘 모르겠다. (영어에 능하신 독자분이 계시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곡이 담긴 BSB의 3집 <Millennium> 앨범은 그들의 커리어 최고작으로 불리는데, 그만큼 수록곡들의 면면도 훌륭하다. 싱글로 먼저 나온 곡들이 유명하긴 하지만, 나는 그중 가장 잘 알려지지 않은 곡을 좋아한다.
바로 <Spanish Eyes>인데, 멤버들의 보컬과 화음을 감상하기에 적합한, 잔잔한 발라드다. 멜로디가 아름답고 특히 브라이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매우 듣기 좋다.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저 제목을 우리말로 번역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스페인 사람의 눈이라고 하면 너무 멋없지 않은가. 언제나 그런 음악 외적인 궁금증을 가지고 음악을 감상하는 나다.
It’s Gotta Be You 라는 트랙은 처음 들었을 때부터 곡 흐름이 너무 익숙해 깜짝 놀랐다. 내가 익히 들어오던 국내 댄스곡의 작법과 무척 유사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작곡가들이 BSB를 비롯한 당시 미국의 음악 트렌드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보았다. 그래서 뻔하게 들리기도 했지만, 브라이언과 닉의 시원시원한 고음은 언제 들어도 짜릿하다.
Shape Of My Heart
제목을 검색할 때마다 동명의 스팅 곡이 먼저 등장하는 비운의 노래다. 난 아무리 들어도 BSB의 것이 더 좋던데, 세상 사람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래도 이 곡 또한 꽤 히트했고,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다. 난 이 노래가 호불호 갈리지 않는 스탠더드한 팝발라드라고 생각한다. 특히 후렵의 합창과 감미로운 선율은 청자의 귀를 단숨에 잡아끈다.
앞의 I Want It That Way와 마찬가지로, 닉의 고음이 제일 드라마틱한 곳에서 폭발한다.
I’m here, with my confession got nothing to hide no more I don’t know where to start But to show you the shape of my heart
난 이 구간의 애절한 파워풀함이 너무 좋아 반복해서 듣곤 한다.
그런데 shape of my heart는 또 정확히 어떤 뉘앙스의 말일까? 직역하면 내 심장의 모양...이라는 뜻인데 당연히 말이 안 된다. (이번에도 독자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만약 BSB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내게 노래를 추천해달라고 하면, 난 Shape of My Heart를 골라줄 것 같다. 4집에는 타이틀인 이 곡 말고도 좋은 곡이 많은데 그중 단 두 개만 더 고르라면 다음 트랙이다.
More Than That
애절한 현악 반주와 AJ의 허스키한 보컬이 인상적인, 비애감이 담긴 곡.
I Promise You
전매특허인 풍성한 화음이 돋보이는, 매우 감미로운 발라드.
앞에서 추천한 트랙이 거의 발라드인 데서 알 수 있듯, 나는 BSB가 강하고 빠른 곡보다는 감성적이고 느린 곡에서 더 진가를 발휘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들의 댄스는 기술적으로 정교한 케이팝 댄스에 길들여진 나에겐 너무 쉬워보인다. 다음은 BSB의 전 앨범을 통틀어 빼놓을 수 없는 발라드 트랙이다.
I’ll Never Break Your Heart
고등학교 때 영어 선생님이 이 노래에 얽힌 일화를 하나 들려주셨다. 지인이 여자친구와 싸웠는데, 화난 애인을 달려주려고 전화를 걸어 이 노래를 불러주었더니 그녀의 화가 사르르 녹았다는 것이다. 물론 좋은 곡이긴 하지만, 대체 노래를 얼마나 잘해야 가능한 일일까.
이 곡 역시 듣자마자 너무 친숙해서 놀랐다. 어디서 많이 들은 듯한 전형적인 알앤비 발라드랄까. 난 처음엔 그 통속성이 싫어서 잘 듣지 않았는데, 어째 나이가 들수록 이 노래가 점점 좋아지고 있다. 세련되지 않게, 정직하게 사랑하는 이의 마음에 호소하는 듯한 매력에 빠졌나 보다.
Anywhere For You
위 곡과 비슷한, 편하게 듣기 좋은 트랙. 열여섯 살 닉의 앳된 목소리가 두드러진다.
10,000 Promises
내가 듣기엔 조금 독특한 발라드다. 밝진 않지만 또 너무 슬프지도 않은, 묘한 웅장함이 있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AJ의 애드립이 멋지다.
Like A Child
이 노래 정말 좋은데, 이상하게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숨은 명곡 느낌.
Drowning
이 곡 덕에 drown이라는 단어를 알게 됐다. BSB하면 딱 생각나는, Shape of My Heart를 잇는 시그니처와 같은 곡.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무조건 좋아할 것 같은 쉽고 아름다운 멜로디다.
Missing You
발라드라고 하긴 애매하고, 댄스곡도 아닌 미디엄한 템포의 리드미컬한 트랙. 특유의 비트가 내 취향저격이다. 여러 번 반복되는 후렴구는 귀에 맴도는 중독성이 있다.
As Long As You Love Me
내게 베스트는 아니지만, 가장 유명한 노래 중 하나라서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순 없다. 이 곡은 무조건 뮤직비디오를 보자. 전성기 닉 카터의 화려한 꽃미모를 감상할 수 있다. 팀에서 막내인 그는 내가 한창 팬이었을 때 23살의 청년으로, 소녀의 홈모를 유발하고도 남는 존재였다.
영어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as long as ~ 표현의 예시로 흔히 틀어주는 곡이기도 하다. 이 노래의 가사를 배우면 그 표현만큼은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Siberia
그룹이 인기의 정점에서 내려온 2005년, 오랜만에 들고 온 5집의 수록곡이다. 싱글 컷도 안 된 노래인데 은근 유명하다. 시종일관 잔잔하고 담담한데 그 속에서 진한 쓸쓸함이 느껴진다. 시베리아를 연상시키는 외로운 곡. 난 이 노래를 듣고서야 시베리아를 영어로는 ‘사이비리아’라고 발음한다는 걸 알았다.
영어 공부하려고 듣기 시작한 BSB의 노래지만, 실력을 키우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진 못했다. 차라리 단어장 한 권을 외우는 게 더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보이밴드의 대표이자 표준으로 남아있는 그들의 음악을 즐길 수 있었던 건 원래의 목표를 뛰어넘는 기쁨이었다. 순수한 감상의 즐거움에 더해 널리 알려진 이들의 음악을 매개로 소통하고 공감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도 반가운 일이다. 남들 다 듣는 것, 보는 것은 안 듣고 안 보려는 나지만, 때로는 보편적으로 사랑받는 대상엔 관심을 가질 필요도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 알게 된다.
최근 배대웅 작가님의 글을 통해서, 그리고 스스로 이 글을 쓰면서 다시 BSB의 음악을 들어보니 변함없이 좋았다. 예전만큼의 인기는 누리지 못하지만, 더 이상 ‘Boys’가 아닌 ‘Men’의 나이지만, 여전히 전 세계에 수많은 팬을 보유한 그들이 오랫동안 음악 활동을 지속 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