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내가 받았던 성교육은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가 만나면 아기가 생긴다.’여기까지 배우고 나면 몇몇 아이들은 의문을 품었다. 그래서 정자와 난자가 어떻게 만난다는 거지?
아마 그들은 대개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어쩌다 보니,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질문의 답을 알게 됐을 것이다. 언제나 ‘크면 알게 돼’라고 했던 어른들 말처럼.
그러나 나는 내가 생명 잉태의 비밀을 알게 된 시기와 계기를 비교적 정확히,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건 순전히 어떤 책 때문이었다.
지난 과학학습만화 글에서도 얘기했듯이, 초등학교 고학년에 위인전과 세계명작전집을 졸업하고 읽을 게 없어진 나는 아빠 책에 눈을 돌렸다. 내 방 커다란 책장의 제일 높은 단엔 아빠의 오래된 책들이 가득 꽂혀 있었는데, 의자를 딛고 올라서면 손이 닿았다.
나는 그중 알록달록한 표지에 제목이 한자로 되어 있는 두꺼운 책을 꺼냈다. 먼지를 대충 털어내고 펼쳐보니, 내지는 누렇게 변색돼 있었고 폰트는 예스러웠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책이 틀림없었다.
책의 외관
내지. 오래된 티가 풀풀 난다.
촌스러운 외관에도 불구하고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한 건 본문 내용 때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역사 이야기였던 것이다. 나중에 한자를 더듬더듬 찾아서 알아낸 그 책의 제목은 <조선왕조 500년>이었다. 역시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80년대에 MBC에서 같은 제목으로 사극 시리즈를 방영했었는데 바로 이 책이 원작이었다.
<조선왕조 500년>은 故신봉승 작가가 조선의 역사를 소설식으로 재구성한 작품으로, 대하소설답게 무려 48권이나 되는 장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시리즈다. 나는 그중 한 권부터 시작해 금방 흥미진진한 역사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옛날 책인 만큼 본문에도 한자가 많이 섞여 있었지만, 다행히 한글 독음이 작게 달려 있어서 읽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조선 9대 왕 성종의 이야기를 읽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 성종이 후궁인 정씨의 침소로 향했다. 그런데...
오 마이 갓.
이후 나온 장면이 어떤 것이었는지 독자들은 능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적.나.라.하기 그지없는 묘사였다. 그때 난 겨우 5학년, 만으로 열한 살이었다. 어리고 순진했던 나는 거대한 충격에 휩싸였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날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문제의 장면을 묘사한 구절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그렇다고 부모님께 말할 수는 없었다. 생각만 해도 너무 민망하고 부끄러웠던 데다, 어른 책을 마음대로 봤다고 혼이 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끙끙거리던 나는, 결국 다음날 긴히 할 말이 있다며 제일 친한 친구 한 명을 불러냈다. 친구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다가왔다.
“왜, 무슨 일인데?”
나는 대단한 비밀을 폭로하려는 사람의 자세로 말했다.
“있잖아, 너 그거 알아? 그거 말야.. 그거..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지..”
나는 의아해하는 친구의 귀에다 대고 속닥속닥 어제 책에서 본 것을 얘기했다. 친구는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진짜??? 라며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날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래, 진짜라니까!”
우리는 한동안 같은 말만 반복하며 이 믿기 힘든 사실을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친구한텐 좀 미안하다. 나 때문에 너무 일찍 동심을 잃어버린 것 같다.
그렇게 이 새로운 발견에 한창 놀라워하던 중, 갑자기 뇌리에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일 년 전 일이었다.
영화 타이타닉이 개봉한 해, 막내 이모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이모는 타이타닉을 극장에서 보지 못한 엄마를 위해 비디오를 빌려 왔고, 나와 동생까지 네 명이서 다 같이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이모는 셀린 디온의 노래가 요즘 가장 인기가 많다고 알려주었고, 잭과 로즈의 사연은 나와 동생이 금방 정신을 집중할 만큼 재미있었다. 영화는 어느새 중반부에 접어들었고 드디어, 그 유명한 마차(정정-자동차였다고 합니다)이 등장했다.
나는 그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쫓아오는 사람들을 피해 차 안에 숨은 건 알겠는데, 왜 유리창에 목욕탕처럼 김이 잔뜩 서렸지? 그리고 옷은 왜 벗었지?
나는 순진무구하게 고개를 돌려 엄마와 이모에게 물었다.
“근데 옷은 왜 벗고 있어?”
순간 약 10초 정도의 정적이 흘렀다.
“……”
엄마와 이모는 약속이라도 한 듯 TV 화면만 쳐다보며 말없이 앉아 있었다. 나는 알 수 없는 어른들의 반응에 한층 더 어리둥절했다.
“...?”
마침내 엄마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더웠나 보지.”
그 대답으로 의문을 전부 해소할 순 없었지만, 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다음 얘기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일 년 후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나는 책에서 읽은 것과 자동차 씬을 어렵지 않게 연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섬광과도 같은 직관으로 깨달았다. 잭과 로즈가 대체 그 안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를.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나는 여중과 여고에 차례로 진학했다. 전자였는지 후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쪽이든 그땐 이미 반 친구들이 대부분 금지된 비밀을 알아낸 상태였다. 한술 더 떠 그 과정을 더 자세히 알기 위해 서로서로 자료를 모아보자고 결의할 지경이었다. 탐구심이 넘치는 급우들 사이에서 나는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우리 집에 진짜 야한 책 있어.”
다음 날에 문제의 책을 챙겨 온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20년을 넘게 수명을 이어 온 종이가 처참하게 찢어질 뻔했다는 정도로만 적어두겠다.
지금까지 어그로성 이야기만 잔뜩 써놨지만, 사실 <조선왕조 500년>은 단순히 야하기만 한 책은 아니다.
역사적 사실을 재미있는 소설로 풀어내는 故신봉승 작가의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특히 조선 전기에서 그 점이 여실히 드러나서, 태종과 양녕대군의 갈등, 세종의 한글 창제, 수양대군의 쿠데타 등의 굵직한 서사는 그 어떤 드라마보다도 흡입력이 강하다. 조선 후기에 가서는 천주교 박해 사건의 전개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소설치고는 의외로 실록에 충실한 편인데, 80년대가 조선왕조실록이 완전히 번역되어 데이터베이스화되기 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일이다. 작가는 한문을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은 나이가 지긋하신 노인분들에게 물어가며 실록을 읽었다고 한다.
그래서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나 신하들의 상소, 유명 인사의 졸기 등은 실록에 실린 글이 거의 그대로 실려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정소공주(세종의 딸)이 죽었을 때 세종이 슬픔에 잠겨 친히 지은 글이 인용돼 있어, 대왕의 인간적인 면모와 애틋한 부성애를 엿볼 수 있다.
그 밖에 대마도 정벌이나 임진왜란과 같은 굵직한 전쟁도 큰 비중으로 다루고 있어 역사 공부에 큰 도움이 된다. 정사와 야사, 허구와 사실이 적절히 섞여 있고, 작가의 상상력을 동원해 기술한 부분이 어디인지 쉽게 구별할 수 있어 최근의 판타지 사극과는 결이 다르다.
그런데 이 재미있는 시리즈가 이상하게도 우리 집엔 반 질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총48권 중에서 1~24권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을 봤다고 해도 혼나지 않을 만큼 충분히 컸을 때 아빠에게 물어보았더니, 나머지 반을 다 사기에는 돈이 모자랐다고 했다.
그러나 어리고 경제력 없었을 때의 나는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하필 24권이 정난정과 문정왕후가 등장하는,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도 다룬 흥미진진한 시대로 들어가기 직전이었기에 더 궁금했다.
구원투수는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도서관에 있었다.
나는 책을 좋아하면서도 중학교 2학년 때까지도 도서관 종합자료실에서 책을 빌릴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나처럼 독서가 취미이던 친구 한 명이 나를 데리고 가 2층의 문을 열어줬을 때까지, 어린이자료실에서 아동용 도서를 뒤적이며 채워지지 않는 욕구를 삼켰었다.
종합자료실의 대출증을 만들자마자 가장 먼저 <조선왕조 500년>의 25권부터 찾았다. 너무나 기쁘게도 48권까지 다 있었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며 대출 창구로 다가갔더니, 직원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알고 보니 책이 너무 오래되어 지하 서고에 따로 보관 중이었다.
난생처음 들어간 도서관 지하 서고는 책에서 봤던, 서양의 저택 안에 있는 거대한 서재 같았다. 들어서자마자 천장을 찌를 듯한 높이의 육중한 서가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옆면에 붙은 커다란 손잡이를 잡고 빙글빙글 돌리자 서가가 하나씩 떨어져 나왔다.
퀘퀘한 공기 속 직원분은 서가 사이의 좁은 통로에 서서 장갑을 끼고 책을 찾았고, 곧이어 내 손에 25권을 건네주었다. 그때의 그분 표정이 아직도 기억난다. 웬 여자애가 이런 케케묵은 책을 다 찾고, 참 이상하네. 그 눈빛은 정확히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토록 원하던 책을 드디어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신이 난 나는 도서관 서비스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희망 도서 신청까지 했는데, 가장 먼저 신청한 책이 신봉승의 <성공한 왕, 실패한 왕>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참 특이한 애였다. 한창 팬픽이나 로맨스 소설을 즐길 나이에 이런 책을 읽고 앉아 있었다니. 친구들이 날 두고 매사 너무 진지하다고 한 이유를 알 만하다.
어쨌든 그렇게 꾸역꾸역 48권까지를 다 읽고, 입시와 대학 생활을 거치며 그 존재를 잊었다가, 대학교 졸업 후 고향에 내려와서야 옛날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성인이 된 나는 <조선왕조 500년>의 나머지 반 질을 구입해 소장하고 싶었다. 전국의 헌책방 열 몇 군데에 전화를 돌린 끝에, 전남의 한 서점에서 반 질만 택배로 부쳐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바로 계좌이체를 결행했다.
그래서 그 책은 지금 어떻게 되었냐고? 결혼과 동시에 친정에서 내 물건을 옮겨오면서 함께 들고 왔다. 현재 우리 집 책장 가장 아래를 세 칸이나 차지하고 있다.
여전히 가끔 한 권씩 꺼내보면 참 재미있긴 한데, 이제는 예전만큼 욕심이 나진 않는다. 잡은 물고기 느낌이라고 할까. 전권이 내 소유가 되면서 옛날에 느꼈던 소중함과 간절함은 옅어졌다.
그리고 문제의 19금 장면들은, 아줌마가 된 지금의 내겐 소설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선정적이고 부담스러운 요소일 뿐이다. 앞에서 언급한 곳 이외에도 시리즈 전체에 걸쳐 노골적인 묘사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쪽(?)으로만 자극적인 게 아니라 잔인한 장면도 너무 많아서, 지뢰가 깔린 길을 걷듯 무섭고 불편하다. 약간의 잔인한 연출도 견디지 못해 15금 영화도 조심스러워하는 내겐 너무 강력한 지뢰다. 마음 같아서는 가위로 전부 오려내 버리고 싶은, 그런 오점이다.
그래서 나는 아빠와 달리 실수하지 않을 작정이다. 딸아이가 호기심에 이 책을 집어 드는 불상사가 없도록 철저히 단속하려 한다. 지금은 그 단이 보이지 않도록 침대를 바짝 붙여놓은 상태고, 아이가 더 자라면 몽땅 꺼내서 금고에 넣고 잠가버리거나, 금고값이 아까우면 상자에 넣어 테이프로 친친 감아서 창고에 숨겨버리거나 할 테다. 그렇게 해서라도 아이의 동심을 오래오래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