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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Aug 20. 2023

굶주린 곰의 일기

모차르트, 브람스, 그리고 몇 권의 책과 함께

 이번 주 공사다망한 나날을 보낸 곰 한 마리가 있었다. 바쁜 와중에도 곰은 매 끼니 과분한 먹이를 섭취하며 뱃살을 불렸으나 영혼의 굶주림은 채울 수 없었다. 마음의 양식이 모자란 거야, 곰은 생각했다.

      

 다행히 토요일에 남편이 아이를 봐주기로 한 덕분에 배고픈 곰은 혼자 곳간에 갈 기회를 얻게 되었다. 곰에게 마음의 곳간이자 영혼의 안식처는 다름 아닌 도서관이었다.

      

 어기적어기적 도서관으로 들어선 곰은 그러나 그날따라 독서는 하고 싶지 않았다. 왠지 활자를 보면 머리가 아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신 오랜만에 영화를 보기로 하고 디지털자료실로 향했다.

     

 곰은 친애하는 이웃이신 @토니 스탁 님이 훌륭히 분석하고 계신 영화 <빅쇼트>를 보고 싶었으나, 도서관에 해당 DVD가 없었다. 게다가 주말이라 멀티미디어 좌석은 모두 예약이 차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빅쇼트>는 집에서 OTT로 시청하기로 하고, 차선책을 택하기로 했다.

     

 그것은 음악감상 전용 좌석에서 CD를 듣는 것이었다. 곰은 평소 집에서는 조용히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어려웠므로, 이번 기회에 제대로 음악을 즐겨보고자 마음먹었다.

     

 음반장 앞에 두 발로 서서 유심히 CD를 살펴보던 곰의 눈에 두 가지 음반이 포착되었다. 모차르트의 목관 협주곡과 브람스의 교향곡이었다. 이거다! 곰이 외쳤다. 곰은 고전음악을 좋아했지만 매일 일터에 나가고 아이를 돌보는 일정 때문에 클래식을 오랫동안 듣지 못했다. 이제 음악에 빠져들 생각을 하니 온몸의 털이 시원해질 만큼 기분이 좋았다.

     

 곰은 CD를 들고 지정된 좌석을 찾아갔다. 푹신한 소파와 쿠션이 기다리고 있었다. 앞에 걸린 플레이어에 음반을 걸고 헤드폰을 쓰니 천상의 선율이 흘러나왔다. 첫 곡은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뒤이어 오보에 협주곡과 바순 협주곡이 차례로 재생되었다.

     

 모차르트라는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건 인류와 동물 모두에게 축복이야.

     

 곰은 생각했다. 세 가지 협주곡은 겹치는 주제 전혀 없으면서 하나같이 산뜻하고 예쁘고 명랑했다. 밝은 선율이 선사하는 충만한 행복감에 몸이 마치 중력을 이기고 구름 위를 떠다니는 듯했다.

     

 예전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곰은 관련 서적도 읽고 인터넷에서 자료도 찾아보며 틈틈이 공부를 해왔다. 그때 배우기를 모차르트라는 작곡가는 독특하게도 독주 악기로 잘 쓰이지 않는 관악기들 – 플루트, 클라리넷, 오보에, 바순, 호른 –을 주인공으로 협주곡을 작곡했다고 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은 어느 작곡가나 다 쓰지만, 상대적으로 음역과 표현에 한계가 있는 관악기를 위한 협주곡은 드물. 그래서 해당 악기를 전공하는 연주자에게는 모차르트의 협주곡이 필수 레퍼토리라고 했다.

     

 곰은 궁금했다. 모차르트는 왜 목관악기마다 협주곡을 만들었을까? 분명 피아노와 바이올린보다 작곡이 더 어려웠을 텐데 말이다. 클라리넷 음색을 좋아했다고 듣긴 했지만 그게 다는 아닐 것이다. 곰은 나중에 공부를 더 해서 답을 찾기로 하고, 일단은 이렇게 각별한 곡들을 남겨준 것에 그저 감사하기로 했다.

      

 악기를 연주하는 독주자들의 실력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이 정도면 인간이 아닌 물 아래 사는 동물들이 연주한 게 아닌가 싶을 만큼 호흡이 자유로웠다. 클라리넷과 오보에, 바순은 저마다 음색이 개성 넘치고 다 다르게 매력적이었다. 곰은 아주 황홀한 시간을 보냈다.

     

 두 번째로 플레이한 음반은 베를린 필의 브람스 교향곡 전집이었다. 곰은 대뜸 가장 좋아하는 4번 1악장부터 틀었다. 모차르트와는 판이한 음악의 세계가 펼쳐졌다. 곰은 이 악장만 들으면 쓸쓸한 가을이 떠올랐다. 황량한 벌판에 신록을 잃은 채로 혼자 서 있는 메마른 고목이 연상되었다.

    

 후반부로 가면서 고목이 울기 시작했다. 꽉 찬 관현악이 나무의 울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곰은 음표들이 층층이 두텁게 쌓인 소리가 좋았다. 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일사불란한 현의 합주에는 우수의 정점을 밟고 넘어서는 쾌감이 있었다. 곰은 음악책에서 본 노년의 브람스의 사진을 떠올렸다. 덥수룩한 수염이 인상적이었었다. 곰이 들은 소리는 그 빽빽한 수염을 닮아 있었다.

     

 음악을 듣고 기분이 한껏 좋아진 곰은 이번에는 어슬렁어슬렁 종합자료실로 향했다. 그래도 도서관에 와서 책을 보지 않고 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곰은 자료실 공기만 맡으면 스트레스가 풀리는 습성이 있었다.

      

그런데 그날 곰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 가득했다.

힐...힐링... 힐링이 필요해... ’


 왜냐하면 최근 곰은 자기가 운영하는 글방에 서평을 써 보이려고 추리소설을 잔뜩 읽었기 때문이었다. 추리소설이란 대개 가장 창의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방법에 관해 한가득 써놓기 마련이다. 곰은 그런 책을 너무 많이 읽은 나머지 정신이 피로해지고 말았다.


'..이제 유혈 사태는 그만.. 피가 안 나오는 책이 필요해.. 아주 따뜻하고 건전하고 자극 없는 그런 책이..’     

고심 끝에 곰이 고른 책은 다음 네 권이었다.



빵 자매의 빵빵한 여행     

빵을 좋아하는 여자 인간 둘이 아시아의 내로라하는 빵집을 방문한 후 쓴 여행기였다. 곰은 빵 얘기도 재미있어 보였지만 글 자체가 좋아 보여서 책을 선택했다. 그러나 앞표지 날개를 펼쳐 보고는 바로 덮어버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빵집 순례까지 할 정도로 빵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이 너무 날씬하고 예뻤기 때문이다. 곰은 휘낭시에를 먹으며 키운 자신의 몸집을 생각하고 현실 자각 타임이 왔다. 현타를 극복하기 전까지는 이 책을 읽을 수 없어, 곰이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몽테뉴 《수상록》 선집     

몽테뉴라는 옛날에 살았던 어느 현명한 인간의 저서는 요즘 글방에서 만나는 이웃들이 너도나도 읽는다는 책이다. 곰은 자기도 시류에 뒤처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과감히 수상록을 집어 들었다. 책 소개를 보니 에세이라는 장르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란다. 그럼 더더욱 읽어야 한다.

    

(지리쌤과 함께하는) 우리나라 도시 여행     

곰은 이 땅 어디에 무엇이 있고 그곳에서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항상 궁금했다. 지금 서식하고 있는 울산 말고 또 다른 도시들은 어떤 역사와 특징이 있는지 알고 싶었다. 지리 선생님들이 집필했고 문체는 친근한 경어체인 걸 봐서 전문성과 재미를 다 잡은 것으로 보였다. 곰은 집에 와서 가장 먼저 이 책부터 펴들었다.

    

채링크로스 84번지     

곰이 읽을 책을 고르는 방법 중에는 서가를 둘러보다가 제목만 보고 끌리면 무작정 뽑아보는 방식이 있다. 이 책도 그런 경우였다. 채링크로스는 이름이 해리 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킹스크로스랑도 비슷하니 뭔가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마침 곰이 찾던 힐링물 그 자체가 아닌가.

     

그건 한 헌책방 주인과 가난한 작가가 20년 동안 책을 매개로 나눈 편지를 묶은 것이었다. 책을 주고받으며, 책 얘기를 하며 우정을 쌓는 모습이 어딘가 글방 작가님, 이웃님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 곰은 바로 <채링크로스 84번지>를 챙겼다. 읽고 좋으면 서평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집에 돌아오면서 곰은 어느새 영혼과 마음이 든든해진 것을 느꼈다. 현관을 들어서니 남편과 아이가 웃으며 반겨주었다. 곰은 한층 풍요로워진 정신으로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래, 역시 인간이든 동물이든 자기만의 시간은 필요해. 곰이 두둑한 배를 두드리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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