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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Nov 27. 2023

어느 경상도 가족의 신나는 서울 여행 – 1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밝혀둘 것이 있다. 기행문을 쓰겠다고 처음부터 결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행기에 필수인 사진을 많이 찍지 않았다. 그러나 어차피 우리가 방문한 곳이 윗지방 사는 분들이라면 다 잘 아실 장소이다 보니, 사진을 찍었더라도 그다지 특별한 점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3박 4일 가족여행의 목적지를 서울로 정한 건 순전히 나 때문이었다. 여행 기간 동안 엔시티127의 콘서트가 열릴 예정이었으므로 하룻저녁을 떼어 공연에 할애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팀은 콘서트를 왜 그리 자주 하는지 궁금하실 분들에게 – 지난번 공연은 엔시티 전체 콘서트였구요, 이번엔 유닛랍니다^^;;)

  

 남편도 하룻밤 정도는 아이를 혼자 봐주겠다고 해서, 우리는 해당 일자에 맞춰 교통편과 숙소 예약을 완료했다. 그러나 이런 합의와 준비는 곧 헛일이 되고 말았다. 내가 허망하게 티켓팅에 실패해 버렸기 때문이다.

     

 각자 직장에 휴가까지 내놓은 상태에서 날짜를 바꾸기도 마땅치 않아, 우리 가족은 예정대로 11월 18일에 서울을 향해 떠났다. 3박 4일의 일정은 다음과 같았다.

     

1일 차 – 호캉스 (실내 수영 즐기기)

2일 차 – 서울상상나라 체험 및 서울어린이대공원 어트랙션 타기

3일 차 – 광화문 교보문고 방문 및 경복궁 관람, 기타 서울 시내 구경

4일 차 – 왕십리 구경

     

 일정표를 보면 의문이 들 만한 구석이 있다. 4일 차 목적지다. 왕십리엔 여섯 살짜리 아이가 즐길 만한 놀거리가 특별히 없는데 왜 저 목록에 들어가 있는 걸까.

     

 그건 순전히 남편 때문이었다. 그가 4년간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낸 대학교가 왕십리에 있는 것이다.

남편은 내가 종종 그의 모교와 비슷한 수준의 대학을 일컬어 SSH라는 이니셜로 부르면 도끼눈을 뜬다. SSH가 아니라 HSS란다. 뒤의 두 S는 뭐가 먼저 와도 상관없지만, 아무튼 맨 앞에는 H가 와야 한단다. 이제 그의 모교가 어디인지 독자분들도 감이 오실 텐데, 혹시 S대나 S대 출신인 분이 있으시다면 사과드리겠다. 이는 어디까지나 남편의 개인적 의견으로, 절대 내 의견이 아니다.

      

 숙소는 여행 목적지와 가까운 동대문역의 M호텔로 정했다. 울산에서 동대문으로 가려면 KTX를 타고 서울역에서 내리는 것이 가장 가깝지만, 우리는 부러 비행기를 택했다. 아이의 간절한 소망을 이뤄주기 위해서였다.


 아이가 비행기를 타는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작년에 제주도에 갈 때 태워줬었는데, 그때 꽤 즐거웠던 모양이다. 사실 나도 비행기 여행을 아주 좋아한다.     


 잠시 딴 얘기를 하자면, 난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비행기를 타봤다. 그때 기내에서 읽으려고 준비해 간 책까지 정확히 기억난다.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였다. 그런데 나이가 어려서였는지, 내내 귀가 아파 죽을 뻔했다.

     

 해외여행에 관심이 없었던 나는 신혼여행 때 두 번째로, 국제선으로는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다. 신혼여행지는 북유럽의 노르웨이와 핀란드였는데, 9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나는 그 9시간 내내 영화도 보지 않고 책도 읽지 않고 창밖으로 보이는 지형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으며, 신랑은 아홉 시간을 내리 잠만 잤다. 아, 기내식 먹으러 두 번 정도 깨긴 했다.

     

 그 후로 국내선은 몇 번 더 타봤지만, 여전히 내게 비행기 탑승은 몹시 흥분되는 일이다. 거대한 기체가 빙글빙글 유턴해서 엄청난 엔진 소리를 내며 활주로를 달려가다가, 이윽고 양력이 중력을 이기고 육중한 몸체를 들어 올릴 때. 그때의 짜릿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번엔 아이가 꼭 창 측 자리에 앉겠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양보해 주었더니, 이 녀석이 눈이 부시다며 창문을 다 닫아버리는 게 아닌가. 그럴 거면 대체 왜 창 측에 앉겠다고 고집을 부렸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대신 빛이 사라질 때를 틈타 창문을 다시 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산과 바다, 구름과 건물, 도로를 보면서 내가 날고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실감하려 노력했다. 인간은 그토록 오래 염원해온 비행에 성공했지만, 새처럼 신체만을 이용해 나는 일과 어떤 물체에 탄 채로 나는 일은 느낌이 사뭇 다를 것이다. 난 언제나 <드래곤 볼>에 나오는 초능력 중에서 하늘을 나는 능력을 제일 부러워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라이트 형제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다 빈치는 인류가 결국에는 비행에 성공할 것을 예상했을까? 그가 비행기를 탔다면 좋아했을까? 라이트 형제 이후로 지금의 비행기 모습을 갖출 때까지 얼마나 많은 기술자와 과학자들이 힘을 보탰을까?

      

 기체를 제작해서 파는 회사와 그것을 구입하는 항공사, 공항을 짓는 건설사와 그 일을 승인하고 감독하는 정부 등, 내가 이렇게 비행기를 탈 수 있을 때까지 거쳤을 그 모든 과정도 상상해 보았다. 그러고 보면 옛날에 배웠던 사회학의 기능론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 구성원이 거대한 체계의 일부로서 각자 소임을 완수했기에 이 무거운 물체를 하늘에 띄울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이런저런 사색에 잠기다 보니 30분이 훌쩍 지나갔다. 비행기는 건물이 드문드문 보이던 교외를 단번에 벗어나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시가지 위를 날기 시작했다. 남편이 국회의사당이 보인다며 손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은 무척 빽빽했다. 마치 아이의 레고 중에서 가장 작은 블록만 골라 한 치의 틈도 없이 판에 가득 꽂아놓은 듯했다.

      

 생전 처음 가보는 김포공항은 매우 깨끗했고, 또 매우 넓었다. 그곳에서 동대문까지는 택시를 타기로 했다. 주말이라 길이 막혀 1시간이 넘게 걸릴 테지만, 짐이 너무 많아 지하철을 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택시비는 엄청나게 나왔다.

     

 호텔에 도착하니 체크인까지 2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프런트 직원은 당장 이용할 수 있는 객실이 있으나, 건물 벽만 보이는 전망이라고 말해주었다. 우리는 동대문과 시내가 보이는 객실에서 묵기 위해 점심을 먹으며 체크인을 기다리기로 했다.

   

 배가 몹시 고팠던 셋은 맛집을 찾을 겨를도 없이 호텔 바로 앞의 현대아울렛 식당가로 향했다. 고기를 먹고 싶어 하는 아이를 위해 찹스테이크 집을 찾았는데, 예상외로 아주 맛있었다. 식당뿐 아니라 현대아울렛 전체가 꽤 고급스러운 분위기였다. 나는 이 정도면 울산의 백화점과 맞먹을 급이라고 생각했다.

   

 든든히 배를 채운 우리는 남편의 발열 내복을 사러 가기로 했다. 아울렛 내에서 내복을 구입할 수 있을 것 같아 층별 안내도를 주의 깊게 살펴봤지만, 적당한 매장이 보이지 않았다. 근처 직원분께 물어서 란제리 매장이 있는 층으로 올라갔더니,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풍경이 나타났다. 나는 곧바로 돌아서서 말했다.

“여보, 어디서 살 수 있을지 이제 알겠다. 평화시장에 가자.”

     

 우리는 호텔과 가까운 쪽의 평화시장 건물에 들어가 열심히 내복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1층을 샅샅이 뒤졌음에도 매장을 찾을 수 없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1층은 모자와 양말, 목도리 전문이었다.

     

 바깥에서 보니 건물 1층엔 헌책방도 있었는데,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이 생각나 반가웠다. 여유 있을 때 들러 헌책을 사고 싶었지만, 뭘 살지 정하지도 않고 기웃거리는 건 서점 주인께 민폐인 듯해 그만두었다.

     

 많이 들어본 청계천의 실물도 구경했다. 그런데 뉴스에 자주 오르락내리락 하고 데이트 명소로도 유명한 것 치고는 모습이 평범했다. 우리 동네 OO천과 비슷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어쩌면 밤이 되면 조명이 켜져서 아름다워질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내복은 못 샀지만 체크인 할 생각에 신난 우리는 호텔로 돌아왔다. 그리고 바로 수영장으로 향했다.

수영장엔 온수 자쿠지와 유아 풀장이 갖춰져 있어 가족이 놀기 좋았다. 유아 풀장엔 노란색 고무 오리가 아주 많았는데, 장난감 뜰채와 양동이가 함께 있어 아이가 너무 좋아했다. 아이는 뜰채로 오리를 잔뜩 포획하더니, 대뜸 이렇게 말해서 엄마 아빠를 기겁하게 했다.

“이걸로 오리탕 끓여 먹자!”

오리탕이라는 요리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우리 가족은 오리고기 집에 가도 불고기밖에 안 먹는데. 우리 부부는 대체 이 아이의 동심을 파괴한 주범이 누구인지 고민에 빠졌다.

     

 워낙 물을 좋아하는 나는 오랜만에 수영장에 와서 신이 났다. 아이보다 내가 더 좋아했다. 남편은 온수 자쿠지에서 뜨끈히 몸을 데우는 데 여념이 없었다. 아이는 몇 번의 경험으로 깊은 물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고 잘 놀았다.

     

세 사람이 마음껏 수영을 즐기고 나니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이제 여행 중에만 감히 행할 수 있는, 최대의 사치를 저지를 시간이었다. 바로 룸서비스 시켜 먹기다.

      

 절약이 몸에 밴 남편도 호캉스 중의 룸서비스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우리는 그동안 열심히 일했으니 호강에 겨울 때가 됐다며 비싼 음식을 잔뜩 시켰다. 나는 팟타이와 갑자튀김, 남편은 수제버거, 아이는 한우 불고기 정식을 주문했다. (그런데 그 비싼 한우 불고기를 반도 먹지 않고 남겨서 남편이 다 먹었다)

    

 그런데 그동안의 혹독한 다이어트 탓인지, 내 위장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부녀가 지쳐 잠이 든 밤, 나 혼자 때아닌 토사곽란에 배를 잡고 뒹굴었다. 아무래도 갑자기 기름진 음식을 섭취했기 때문인 듯했다.


 다행히 어찌어찌해서 복통은 가라앉았고, 나는 창문 옆에 있는 안락의자에 앉아 독서조명을 켜고 책을 펴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남편이 새벽에 깨서 옆자리에 내가 없는 걸 발견하고는, 화장실에서 쓰러진 줄 알았다고 했다. 아니면 혼자 구급차라도 불러서 병원에 실려 간 줄 알았단다. 그렇게 허둥지둥 나를 찾다가 문득 창문 쪽을 봤더니, 내가 의자에 늘어져 쿨쿨 자고 있었다는 것이다. 안심한 남편은 그길로 신나게 닌텐도 스위치를 즐겼다고 한다.

     

- 여행기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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