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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Nov 28. 2023

어느 경상도 가족의 신나는 서울 여행 – 2

 여행 둘째 날, 우리는 아침 일찍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서울상상나라에 오전 10시로 체험 예약을 해두었기 때문이다.

      

 혹여 유아 자녀가 없어 거기가 어떤 곳인지 잘 모르는 독자분이 계실 수 있으니 간단히 설명하자면, 어린이대공원 바로 옆에 위치한 총 4개 층에 달하는 박물관이 바로 서울상상나라다. 신체놀이, 과학놀이, 감성놀이, 자연놀이 등 다양한 분야의 체험을 즐길 수 있는 데다, 개관한 지 얼마 안 돼 시설이 깨끗하고 쾌적해 가족단위 방문객에게 인기가 높다.

     

 우리 아이는 이런 종류의 체험관을 무척 좋아하는지라, 한 번 입장하면 하루 종일이라도 놀 줄 알았다. 실제로 입장한 직후에는 여러 놀이를 즐기며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예상치 못한 암초를 만났으니, 자동 팽이 돌리기 기계였다.

     

 가운데의 움푹한 구멍에 팽이를 놓고 꾹 누르면, 자동으로 빠른 속도로 회전한다. 그 상태에서 후딱 팽이를 들어 올려 옆의 평평한 경사면에 옮겨야 한다. 나도 몇 번 해보고서야 제대로 된 작동법을 알았을 만큼 미취학 아동이 혼자 다루기에는 어려운 도구였다.

    

 아무리 시도해도 팽이가 휘리릭 빠르게 돌아가지 않거나, 경사면에 내려놓으며 회전이 멈춰버리자, 아이는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가 요령을 알려주려고 시범을 보였더니 엄마 아빠는 잘하는데 왜 자기는 못하냐며 울음을 터뜨렸다.


 승부욕인지, 성취욕인지, 우리 아이는 이런 욕심이 매우 강하다. 엄마 아빠는 어른이니 자기보다 잘하는 게 당연한데도 아이 눈엔 그렇지 않은가 보다. 팽이뿐 아니라 평소에도 엄마를 일종의 경쟁 상대로 생각하고 속상해하는 일이 많아, 몹시 난처하다.


 어른과 어린이는 같지 않다고, 밥 많이 먹고 쑥쑥 크면 엄마 아빠처럼 잘하게 된다고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아직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긍정적으로 보면 근성이 있는 성격이지만, 작은 일에도 금방 좌절감을 느끼고 울어버릴 땐 어떻게 해주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한 번 울기 시작하면 이성적인 말로는 잘 달래지지 않는 아이라서, 한참을 어르고 혼내고를 반복하고서야 간신히 울음을 그치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조금 더 놀이를 이어가던 중 이번엔 아이가 피곤함과 배고픔을 호소했다.


 서울상상나라는 몇 번이고 재입장이 가능한 곳이라서 나는 밥만 먹고 다시 들어와 놀게 하고 싶었으나, 아이는 조금 전의 경험 때문에 그곳 전체가 싫어진 듯했다. 계속 호텔로, 방으로 가자고 졸라댔다.

  

 어차피 아이를 동반한 여행은 모든 일을 내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점심을 근처에서 해결하고 호텔로 돌아가 오후를 보내기로 했다. 어린이대공원에 예약해 둔 티켓도 다 취소했다. 아쉽긴 했지만 호텔에서 푹 쉬는 일도 편안하고 을 것이란 생각으로 위안 삼았다.


 검색해 보니 길 건너편 세종대학교 캠퍼스에 한 패밀리 레스토랑이 있었다. 그다지 멀진 않았지만 아이가 걷기 싫다고 떼를 써 남편이 안고 걸어야 했다.


 그렇게 힘들게 식당에 도착했건만 안타까운 소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돌잔치로 전체 대관이 잡히는 바람에 일반 손님은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허탈함을 감추지 못하는 우리 부부와 식당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아이를 보고 미안했던지, 직원 한 분이 따라 나와 연신 사과하고서 근처의 중식당을 추천해 주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밖으로 나와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려는데, 바로 눈앞에 또 다른 식당이 하나 보였다. 아이가 먹고 싶어 하는 파스타도 파는 듯했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가서 식사가 되는지 물었더니, 사장님이 미취학 아동은 입장이 안 된다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일종의 식당을 겸한 음악 카페라서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필수인 것 같았다.


 그렇게 두 번째 퇴짜를 맞고 중식당을 향해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우리 가족의 눈에 이번엔 O레스토랑의 세련된 인테리어가 들어왔다. 그곳은 다행히 케어 키즈 존이었지만, 가격이 너무 사악했다. 아무래도  금액에 파스타를 먹긴 너무 아깝다는 생각에 우리는 계속 중식당을 향해 걸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해당 중식당의 대문엔 ‘일요일 휴무’라는 안내판이 우릴 조롱하듯 매달려 있었다. 허허. 오늘따라 음식점들이 우리에게 다 왜 이러나. 나는 짜증을 냈고 남편은 아이를 내려놓고는 다리가 풀렸는지 주저앉아 버렸다. 지칠 대로 지친 우리 가족은 비싸도 그냥 방금 봤던 O 레스토랑에 가기로 했다. 더는 식당을 찾아다닐 여력이 없었다.


 다행히 그 이탈리안 레스토랑은 한마디로 돈 값하는 곳이었다. 분위기는 매우 아늑하고 고급스러웠으며, 음식 맛도 아주 훌륭했다. 아이에게는 원하던 크림 파스타를 시켜 주고 남편은 피자를 주문했지만, 나는 어제처럼 배가 아플까 두려워 샐러드를 시켰다. 서울의 이 팬시한 양식당에서 토끼처럼 고작 풀과 버섯만 먹어야 한다니. 내가 생각해도 스스로의 처지가 몹시 가여웠다.

      

 나의 자기연민은 그러나, 주문한 샐러드를 한 입 떠서 입에 넣는 순간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은은한 불향이 입혀진 버섯은 어찌나 쫄깃한지 고기인 줄 알았고, 따뜻한 크림소스의 고소함에 도파민이 마구 분출되는 듯했다. 이게 바로 서울의 맛인가? 나는 복통 따위 이제 모르겠고 접시를 바닥까지 비우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한편 옆에서는 놀랍게도 입 짧은 공주가 먹방을 찍고 있었다. 아이도 배가 몹시 고팠는지, 그리고 음식이 맛있었는지 식판에 덜어준 파스타를 입가에 다 묻혀가며 허겁지겁 흡입하고 있었다. 일 년에 몇 번 볼 수 없는 이 광경을 목격하고 우리 부부는 대단히 기분이 좋아졌다.

     

 즐겁게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부른 배를 안고 호텔 방에 가서 드러누웠다. 아이가 TV를 보는 동안 남편은 게임을 했고 나는 낮잠을 잤는데, 깨보니 벌써 저녁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난 아직 다 쓰지 못한 페소아 편 연재를 떠올리고 얼른 노트북을 켰다.

    

 남편과 아이는 그동안 또 한 번 수영을 즐길 계획이었다. 둘을 보낸 후 나는 책상에 앉아, 동대문과 평화시장 뷰를 뒤로 하고 글을 썼다. 어스름한 저녁 시간에 은은한 조명을 켜놓고 객실에서 글을 쓰는 일도 꽤 낭만적이었다. 문득 조앤 롤링이 유명해지고 난 후에는 호텔에서 해리 포터 시리즈를 집필했다던 얘기가 떠올랐다. 난 그처럼 호텔을 전세 낼 만큼 부유하진 못하지만, 하룻밤이라도 이렇게 색다른 장소에서 조용히 글 쓸 수 있어 가슴이 설렜다.

     

 부녀는 수영장 마감 시간인 10시가 다 되어서 돌아왔는데, 아주 재미있었던 모양이었다. 남편은 아직도 그때 아이와 둘이서만 즐긴 물놀이가 여행 전체를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할 정도다. 내가 없어 힘들었을까 걱정했는데, 그렇게 느꼈다니 다행이었다.

     

 고생한 남편을 위해 저녁 거리는 내가 나가서 사 오기로 했다. 아빠는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딸은 흰 밥과 김을 요청했다. 남편이 가장 가까운 편의점으로 가는 법을 알려주어서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동대문역 지하로 들어가서 7번 출구로 뿅 나오니 눈앞에 바로 보였다. 난 마치 슈퍼마리오가 된 기분에 작은 재미를 느끼며 가게에 들어섰다.

    

 그러나 편의점의 전자레인지 상태를 보는 순간 비위가 확 상했다. 내부가 너무 더러웠다. 아이에게 밥을 먹이고 싶은 마음과, 이렇게 지저분한 물건을 쓰긴 싫다는 마음이 충돌했다. 곰곰이 생각한 결과 여기에 돌린 밥을 나나 남편은 몰라도 아이를 줄 순 없겠다 싶었다. 결국 즉석밥 대신 딸이 언제나 좋아하는 네모치즈빵을 사 들고 가게를 나섰다.

     

 호텔로 돌아가기 전 할 일이 하나 더 있었으니, 그건 하루의 피로를 씻어 줄 커피를 사는 일이었다. 늦은 밤이라 영업 중인 카페가 많지 않았으나 반갑게도 근방에 E 커피가 아직 문을 열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문제는 길 건너편으로 가는 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지하를 통하면 되겠거니, 하고 계단을 내려갔는데, 그쪽 출구로는 지상으로 통행해야 한다는 안내문이 떡하니 붙어 있는 게 아닌가. 난 네이버 지도를 살펴보며 일단 다시 지상으로 올라왔다.

     

 밖으로 나온 내 눈 동대문의 정면 모습들어왔다. 호텔에선 뒷면만 보였었던지라, 앞면은 또 새로웠다. 밝은 조명이 아래에서 위로 퍼지며 흥인지문이라는 현판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상상에 잠겼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여기로 사람들이 드나들었겠지. 소가 끄는 달구지, 여인들이 탄 가마, 지게를 진 나무꾼도 들락날락했을 테고.

      

 그 옛날을 지켜봤던 건축물이 같은 장소에서 이제는 현재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문득 타임머신을 탄 듯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나만 쏙 빼놓고 전부 천지개벽하듯 변해버릴 수 있어? 만약 동대문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렇게 투덜거릴 것 같았다. 도시 한복판에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는 점, 역시 그것이 내가 느낀 서울의 최대 매력이었다.

     

 그건 그렇고, 현실로 돌아온 나는 아직도 E커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횡단보도가 보이지 않았다. 지도 앱을 켜 따라가 보려 해도 이상하게 계속 카페와 반대쪽으로 가라고 하는 통에 혼란스럽기만 했다. 안 그래도 길치인데 낯선 곳에서, 또 어둠 속에서 길을 찾으려니 도통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나는 더 멀리 걸어가 보려다가,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배고픈 부녀를 떠올리고는 발길을 돌렸다. 방에 도착해 음식을 나눠주고는 배달 앱을 켜서 커피를 시켰다. 배달료가 아까워도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한 잔의 아이스 디카페인 카페라떼가 절실했다.

      

 그러나 도착한 라떼는 내가 원한 맛과 거리가 멀었다. 왠지 그다지 맛이 없을 듯한 느낌에, 주문할 때 샷 추가를 두 개나 체크한 탓이었다. 알약을 통째로 씹은 듯한 강렬한 쓴맛에 난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심지어 또 배탈 날까봐 그 한잔으로 저녁을 해결할 생각이었단 말이다.

     

 내가 깊은 수심에 잠겨있는데, 남편이 불쑥 물었다.

“여보! 근데 삼각김밥이 왜 이렇게 차가워? 편의점에서 안 데웠어?”

아차. 딸래미 햇반을 데울지 말지 고민하느라 서방 밥은 생각조차 못 했네.

     

- 여행기 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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