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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Nov 29. 2023

어느 경상도 가족의 신나는 서울 여행 – 3

 둘째 날 나와 딸아이는 밤 늦게까지 놀았다. 샷이 과다하게 들어간 커피가 내 뇌를 각성시켰고, 아이는 엄마가 자지 않고 자기와 놀아준다는 데 고무되었기 때문이다.

    

 집에서 챙겨 온 놀잇감도 많지 않은데 뭐가 그리 재밌는지, 아이는 호텔 가구와 비품까지 동원해 역할극을 하며 즐거워했다. 고맙게도 움직이는 역은 다 자기가 하고 나는 그냥 의자에 기대서 리액션만 할 수 있게 해주어서, 오랜 시간 흐뭇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아이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그동안 세심히 신경 써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비싼 놀잇감이나 교구 없이도 엄마가 자기에게 집중해 주는 것만으로 저렇게 좋아하는데 내가 너무 무심했다 싶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원하는 만큼 깨어있게 두다 보니 어느새 새벽 두 시에 가까운 시간이 되었다. 일정이 빡빡한 다음 날을 위해 더 놀고 싶다는 아이를 달래 재우고, 나도 금방 잠들었다.

     

 셋째 날의 첫 행선지는 창신동 완구 거리였다. 우리는 근처 초밥집에서 배를 채우고 지하철을 탔는데, 아이는 제법 기분이 좋은지 승강장에서 신나게 춤을 췄다. 요즘 흥이 나면 언제 어디서든 춤추려고 해서 참 귀여우면서도 조금 부끄럽다.

  

 완구 거리에 도착한 우리는 주위를 구경하다가 그중 가장 큰 매장에 들어갔다. 자기만의 파라다이스를 돌아다니며 설레어하는 아이의 모습에 우리 부부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최근 아이가 제일 갖고 싶어 하는 것은 티니핑(내 눈엔 변신 공주물과 포켓몬스터를 합쳐놓은 듯한 애니다) 놀잇감이지만, 너무 비싸고 무거워서 크리스마스에 산타 할아버지가 사주실 예정이었다. 대신 엄마 아빠는 작은 옥토넛 탐험선 두 개를 사주었다.

     

 이제 내가 언제나 서울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하는 경복궁으로 갈 차례였다. 그런데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중 아이가 피곤하다며 방에 돌아가고 싶다고 호소했다. 평소보다 많이 걸었으니 힘들기도 했겠지만, 아무래도 새 탐험선을 가지고 놀고 싶은 마음이 더 커 보였다. 그렇지만 전날도 오후 내내 호텔에서 시간을 보낸 마당에 이번에도 관광을 포기할 순 없었다. 나는 대신 지하철에서 내린 후엔 카페에 가서 쉬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다행히 경복궁역 출구로 나와 길을 건너니 스타벅스가 하나 보였고 놓칠세라 얼른 자리를 잡았다. 거기서 한 시간 정도 휴식을 취하고 드디어 경복궁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는데, 또다시 아이가 걷기 싫다며 고집을 부렸다. 추운 바깥에서 계속 실랑이를 벌이기도, 주저앉는 아이를 강제로 걷게 할 수도 없어 결국 다시 남편이 딸을 들어 올려 안았다.

     

 최소한 근정전과 경회루까지 보는 것이 원래 목표였지만 끊임없이 칭얼대는 아이와 허리 통증을 호소하는 남편을 두고 내 욕심만 내세울 순 없었다. 경회루를 포기하고 근정전까지만 가기로 했으나 그조차도 아이를 안고 걷기엔 꽤 먼 거리였다.

    

 간신히 근정전에 도착한 우리는 내 제안에 따라 앞뜰을 둘러싼 회랑의 남쪽, 우측 모서리로 갔다. 지난번 브런치에 간단한 서평을 올린 바 있는 책 <시간이 놓친 역사, 공간으로 읽는다>에서 그 지점에서 감상하는 경복궁의 모습이 가장 멋지다고 했기 때문이다. 다음 문단이다.

                         

필자는 경복궁을 답사할 때, 곧바로 근정전 전각으로 다가가지 않는다. 근정문을 들어선 다음, 오른쪽(동쪽)으로 방향을 꺾어 회랑의 열주를 따라 동남 모서리까지 간다. 그곳 기둥에 기대어 좌우로 펼쳐진 회랑 사이를 바라보면, 위로는 높다란 하늘, 뒤쪽 좌우로는 백악산(세온 주 – 북악산이라고도 함)과 인왕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근정전의 웅장한 모습, 그리고 그 앞쪽의 넓은 뜰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규모 조회와 각종 국가 의례가 열리던 ‘조선 조정의 웅장한 모습’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 <시간이 놓친 역사, 공간으로 읽는다> 102~103p


 과연 그 자리에 서니 정면으로 보던 것과는 또 다른 웅장한 느낌이 일었다.

      

 경복궁에 올 때마다 감동을 자아내는 모습이 또 있으니 근정전 뒤에 우뚝 솟아있는 북악산 봉우리다.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 유홍준은 서울의 산을 극찬했는데, 나도 이백 퍼센트 공감했다. 다음은 답사기에서 해당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서울을 처음 찾아오는 이방인을 맞이하여 올림픽대로를 타고 달릴 때 한강 건너 먼 산을 가리키며 그들에게 저 산 밑에 서울 시가지가 있다고 하면 모두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어떻게 도심 속에 저렇게 준수한 산이 있고, 어떻게 이처럼 장대한 강물이 도시를 가로지를 수 있느냐며 이구동성으로 ‘믿을 수 없다’(unbelievable)를 연발한다.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0 (서울편 2)> 18~19p


 드높은 첨단 빌딩과 자연, 그리고 왕조 시절의 문화유산이 공존하는 서울의 특색이 잘 드러나는 것, 바로 그 점 때문에 경복궁과 광화문 일대는 언제 봐도 새롭고 아름답다.

     

 그러나 감회에 젖은 건 나 혼자였다. 징징거리며 끈질기게 보채는 아이와 지친 기색이 완연한 남편 때문에 주위 풍경을 여유롭게 감상하기란 불가능했다. 둘 다 경복궁이 자아내는 역사적 흥취에는 관심이 없고 전날처럼 호텔로 돌아가 쉴 생각밖에 없어 보였다.

      

 나는 다음 목적지인 광화문 교보문고에는 편하게 택시를 타고 갈 수 없냐고 물었고, 남편은 거리가 애매해 택시가 잡히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럼 지하철은 있냐고 했더니 그것도 없는 데다가 버스를 타봤자 도보 거리가 더 길단다.

      

 결국 걸어갈 수밖에 없다는 소린데 본인은 아이를 안고서는 한 발자국도 더 못 가겠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은 에스컬레이터가 없는 지하철역의 긴 계단을 무거운 배낭을 메고 아이를 안은 채로 몇 번이나 올랐던 것이다. 나는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는 그의 푸념을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일정을 포기하기도 싫었다. 다음 날이면 우린 울산을 향해 떠난다. 하루 종일 서울에 있을 수 있는 마지막 날을 호텔에 틀어박혀 보낼 수는 없었다. 나는 결심했다. 근정전에서 교보문고까지 직접 아이를 안고 걸어가기로.

     

 지도 앱에 검색해 보니 약 1.1km의 거리에 도보로는 19분이 걸린다고 나왔다. 쉽지 않을 테지만 중간중간에 아이를 내려놓고 조금씩 걸리고 쉬면서 가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나는 튼튼한 내 허리를 믿고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아이의 체중에 두꺼운 겨울옷까지 더해져 17킬로그램이 넘는 무게는 확실히 버거웠다. 나는 채 삼십 미터도 가지 못하고 내려놓고, 또 안았다가 내려놓고를 반복했다. 그래도 아이에게 화를 내고 싶진 않았다. 경복궁이든 교보문고든 나에게나 좋은 곳이지 어린이에게 어필할 요소는 거의 없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집에 고이 모셔놓은 기내 반입용 유모차 생각이 절실해졌다. 나와 남편은 왕십리의 언덕을 대비해 유모차를 가져가려고도 했었지만, 캐리어가 3개나 되는 통에 짐을 더 늘리기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해서 최종적으로 빼버렸다. 겨울 여행이라 패딩 등의 보온 의류가 캐리어의 공간을 대부분 차지해 버린 것이다.

      

 아니면 졸업한 지 오래된 아기띠나 힙시트라도 가져올 걸 그랬다. 그것들은 25킬로그램까지는 너끈히 버틸 수 있다. 혹시 몰라 버리지도 않고 보관해 두었는데 하나라도 챙겨 올 걸.

    

 나는 힘들어 끙끙거리면서도 서울 시내 풍경을 충분히 구경하려고 노력했다. 세계적인 대도시의 시가지야말로 이번 여행에서 내가 꼭 구경하고 싶은 것이었다. 고개 들어 올려다본 거대한 빌딩엔 저마다 대기업과 보험사, 신문사의 이름이 커다랗게 박혀있었는데, 그 건물이 그 유명한 기관들의 본사라는 게 신기했다. 세종대왕 동상과 세종문화회관도 흥미로운 볼거리였다.

    

 그렇게 부지런히 주위를 살피며 끝이 없어 보이는 길을 걷고 또 걸어, 우리 가족은 드디어 교보문고에 도착했다. 내가 생각해도 난 의지의 한국인이었다. 여자는 약해도 엄마는 강하다는 말은 진실이었다. (대신 며칠간 허리와 옆구리에 심한 통증을 느껴야 했다)

     

 교보문고 특유의 향기가 풍겨오자 어찌나 반가웠는지, 나는 부녀가 서점 안 스타벅스에서 놀며 쉴 수 있게 티니핑 색칠 공부 책과 색연필을 사주고는 책을 둘러보러 훌쩍 떠났다.

     

 광화문 교보에 온 건 18년 만이었다. 오래전 고등학생 때 처음 왔었는데 어마어마한 규모에 기절초풍했었다. 그동안 더 넓어지면 넓어졌지 좁아지진 않았을 테니, 면적으로는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교보 울산점도 두 개는 들어갈 것 같이 보였다.

     

 나는 그 광활한 공간의 수많은 매대를 하나씩 탐방하며 아이쇼핑에 몰두했다. 거기 있는 책을 전부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저 책 표지와 제목을 구경하고, 목차를 살펴보고, 무게를 가늠해 보고 종이 질과 글꼴을 살피는 일만으로도 즐거웠다.

      

 신상들을 구경할 땐 브런치의 문우들이 떠올랐다. 어떤 분들은 이미 출간 작가이시고, 또 어떤 분들은 출간을 앞두고 계시다. 그분들의 책은 이미 여기 어딘가에 꽂혀 있거나, 곧 매대에 좍 깔리겠지. 앞면과 뒷면엔 출판사의 홍보 문구가 쓰여 있을 테고 띠지도 매고 있겠지. 책날개엔 사진과 본명, 프로필이 나와 있을 테고.

      

 그렇게 상상하니 내가 프로 작가분들과 아는 사이(브런치 안에서만이라도)라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난 일개 아마추어이자 취미로 글 쓰는 사람일 뿐인데 말이다. 언제나 고마운 그분들의 새 책이 나오면 상위 1프로의 속도로 달려가 사리라 다짐했다.

     

 한 시간 반을 넘도록 무릉도원을 거닌 끝에 구매하기로 정한 책은 다음 세 권이었다.

     

<방주> : 예전부터 눈여겨보고 인터넷 서점 보관함에 담아둔 추리소설. 번역을 맡은 김은모는 내가 신뢰하는 번역가이다. 그분이 옮긴 소설은 대부분 수준이 높다.


<샤론 저택의 비밀> : 역시 전부터 읽고 싶었지만 지역 도서관에서도, 서점에서도 구하지 못한 추리소설. 아껴놓았다 이번 기회에 사니 딱 좋았다. 신간도, 베스트셀러도 아니지만 어엿하게 서가에 꽂혀 있어 우리나라 최대 서점의 위용을 느낄 수 있었다.


<일상이 고고학 – 남한산성 편> : 작년부터 재미있게 읽고 있는 역사 에세이의 신작. 이 시리즈에 관해서는 브런치에 따로 글을 쓸지도 모르겠다.

     

 책값을 계산한 후 우리 가족은 그날의 마지막 행선지로 출발했다. 그곳에서 저녁도 해결할 예정이었다. 바깥 하늘은 벌써 조금의 희끄무레함도 없는 진한 까만색이었다. 어둠 속에서 남편은 카카오 택시를 불렀고 아이는 노래 부르며 춤을 췄다.


(셋째 날 저희의 마지막 행선지는 어디였을까요? 왕십리는 아니랍니다.)     


- 여행기 마지막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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