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은 전국에서 손꼽히는 ‘노잼’ 도시다. 애향심이 강한 나조차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당장 윗동네 경주나 아랫동네 부산만 봐도 즐길 거리가 넘쳐나는데 우리는 그쪽으로 크게 내세울 것이 없다. 울산에서 돈 벌어서 부산가서 쓴다는 소리가 나올 만하다.
단순한 놀 거리가 아닌 문화적, 학술적 인프라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UNIST(울산과기원)의 존재나 공업도시로서의 역사 덕에 이공계 쪽은 좀 낫지만 인문학적 전통은 거의 없다시피하다.
그런데 이런 문화적 불모지에 일어난 기적적인 대발견이 있었으니, 울산이 자랑하는 국보 두 점이 그 주인공들이다. 심지어 이들은 1년 차이로 각각 12월 24일과 25일에 발견됨으로써‘크리스마스의 선물’이라고 불렸다. 바로 천전리 각석과 반구대 암각화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두 문화유산은 ‘바위에 그려진 그림’ 이다. 대체 어떤 그림이 언제 그려졌길래 국보의 자리까지 오른 걸까?
신라인들의 낙서
먼저 발견된 천전리 각석의 얘기부터 해보자. 천전리 각석엔 그림만 있는 게 아니다. 글자가 있다. 그것도 아주 귀중한 사료가 되는 글자가.
글자가 쓰인 부분은 꼭 펼쳐진 책처럼 왼쪽면과 오른쪽면으로 나뉘어있는데 둘 다 신라인들이 직접 새긴 것이다. 특히 왼쪽면에는 신라 역사, 아니 우리나라 역사의 최고 거물 중 한 분이 직접 이곳을 들렀다는 내용이 적혀있으니 그가 바로 진흥왕이다. 진흥왕의 어머니(지몰시혜비)가 친정어머니와 아들과 함께 이곳을 방문했던 것이다.
책이 펼쳐진 모양으로 새겨진 두 명문
신라의 최고위 왕족이 왜 경주를 떠나 이곳에 왔을까? 그 이유는 오른쪽면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14년 전에 사부지 갈문왕이라는 인물이 먼저 이곳에 들렀는데, 어사추여랑이라는 이름의 누이와 함께 왔다는 내용이다. 사부지 갈문왕은 지몰시혜비의 남편이었으니 진흥왕의 아버지였다.
진흥왕의 아버지는 바로 전대 왕인 법흥왕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진흥왕은 법흥왕의 외손자이자 조카였다. (신라 왕실엔 근친 결혼이 성행했다) 진흥왕이 왕위를 이을 후계자로 정해진 후, 어머니인 지몰시혜비가 남편을 그리워하여 그의 흔적이 남은 장소를 방문했다는 것이 학계의 추측이다.
또한 천전리 계곡은 수려한 산속에 하천을 끼고 있어 예로부터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했고, 한여름 무더위를 피하기에도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그래서 바위엔 앞서 말한 왕족 외에도 오랜 시간에 걸쳐 신라의 승려나 화랑들이 남긴 낙서가 가득하다.
그리고 더 윗부분엔 신라보다 훨씬 오래 전인 무려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새긴 갖가지 기하학적 문양과 그림이 있으니, 이 바위는 어마어마한 세월 동안 사람들이 남긴 흔적으로 가득찬 자연산 타임캡슐이나 마찬가지다. 이렇게 짧은 기간이 아닌 오랜 세월에 걸쳐 그림과 글자가 남아 있기에 더욱 가치가 높은 보물이 바로 천전리 각석이다.
천전리 각석 전경.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그려놓은 각종 기하학적 문양이 보인다.
물에 잠긴 국보
두 번째 주인공인 반구대 암각화가 최근 천전리 각석보다 더 유명해진 것은 안타깝게도 좋은 이유에서가 아니다. 심각한 수몰 위기에 처해 있어 울산시를 넘어 중앙정부까지 골머리를 앓고 있기 때문이다.
반구대 암각화가 물에 잠기는 원인은 근처에 댐이 존재하기 때문인데, 이 댐은 암각화가 발견되기 훨씬 전에 세워져 울산의 식수와 공업용수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미 설치된 댐을 허물자니 다른 곳에는 마땅한 입지가 없고, 댐의 수위를 낮추자니 수량이 적어져 제 기능을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물에 잠겨 훼손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뾰족한 방도가 없어 발만 동동 굴렀던 것이다.
다행히 최근 사연댐에 수문을 설치하여 필요이상으로 물이 유입되면 물이 빠지도록 하는 방안이 환경부의 검토를 통과했다고 한다. 2025년에 공사가 착공될 예정이라고 하니 이 방법이 성공하여 암각화를 지킬 수 있기를 울산 시민으로서 간절히 바란다.
반구대 암각화 전경. 바위가 하천에 잠겨 있어 멀리서밖에 보지 못한다. 71년 최초 발견 시에도 배를 타고 갔다고 한다.
그럼 반구대 암각화에는 어떤 그림이 새겨져 있기에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라고 할까?
여기엔 주로 동물 그림이 많이 있다. 고래, 거북, 바다사자, 새, 상어, 물고기, 사슴 등 다양한 동물들이 구분 가능할 정도로 특징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숫자가 많고 중요한 동물은 역시 고래로, 여섯 종이나 되는 고래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새끼를 업고 있는 고래인데, 원래 고래는 어미가 새끼를 업고 다니는 습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으니 고래의 행동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빨간 동그라미 안에 새끼를 업은 고래가 보인다.
암각화에는 고래를 사냥하는 과정도 아주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고래잡이 배와 배에 탄 사람들, 그들이 사용한 사냥 도구들이 생생히 그려져 있다. 이 그림들은 아주아주 옛날, 그러니까 신석기시대부터 그려지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니까 상상도 못할 만큼 오래된 유적인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학교 다닐 때 배우기로는 청동기시대라고 했었으니 그간 주류 학설에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다)
실제로 울산은 예로부터 고래가 많이 잡혔고 지금도 고래고기로 유명하다. 거기다 암각화라는 대단한 문화유산까지 있으니, 고래는 오늘날 울산, 특히 남구의 상징이 되어 시내의 각종 조형물이나 버스 정류장, 가로등 같은 공공시설의 디자인으로 사용된다.
또 울산시립박물관 외부 벽면엔 암각화의 고래 그림을 그대로 본딴 벽화가 그려져 있으며, 상설전시실엔 아예 실물 크기로 통째로 복제된 암각화가 있다. 이제 반구대 암각화와 고래는 공단을 대신해 울산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네이버 지식인에는 이런 드립도 있다.
Q. 울산 사람들은 고래 타고 출근하나요?
A. 울산은 광역시 중 유일하게 지하철이 없어서 사람들이 고래를 타고 다닙니다.
반구대 암각화 탁본. 고래와 사슴 등 동물들이 가득 그려져 있다.
암각화 박물관
난 고등학교 때 배운 국사 교과서에서 거의 첫 장부터 바로 이 유적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울산 시민으로서 매우 자랑스러웠었다. 그런데 최근 그 자부심을 더욱 일깨워 준 책이 있었으니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의 신간 <국토박물관 순례>였다. 이 책 1권에서 두 유적이 무려 한 챕터나 차지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반구대 암각화의 수몰 문제에 대한 내용은 이 책에서 거의 다 가져왔다.
해당 챕터에는 두 문화재에 대한 충실한 설명과 함께 근방에 세워져 있는 박물관 두 곳에 대한 소개도 실려 있었는데, 나는 주말을 틈타 그중 한 곳으로 가족 나들이를 가기로 했다. 울산암각화박물관이 그곳이다.
천전리 각석과 반구대 암각화는 서로 가까이 위치해 있지만 깊은 산골이라 오늘날의 울산 시가지에서는 한참 떨어져 있다. 그러니 두 유적 사이에 세워진 암각화 박물관 역시 꽤 멀다. 우리 가족은 40여분 간 차를 달리고 나서야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른쪽 하단 동그라미가 우리 집, 왼쪽 상단이 암각화 두 곳과 박물관. 네이버 지도에 찍어봐도 42분이 뜬다.
박물관은 <국토박물관 순례>에서 묘사된 것처럼 작지만 알찼다. 시설이 쾌적하고 깨끗했으며 아이들을 위한 놀이공간도 있어 우리 같은 가족 단위 관람객에게 친화적이었다.
박물관에서 공부한 내용은 집이나 독서실 책상에 앉아서 공부한 것보다 훨씬 외우기도 쉽고 기억도 오래 간다. 공간 전체를 사용한 전시와 풍부한 시청각 자료 덕분이다.
암각화 박물관도 다양한 형태의 안내판과 조형물, 영상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관람객이 효율적으로 지식을 습득할 수 있게 꾸며놓았다. 나와 남편은 번갈아서 이 훌륭한 전시를 감상하고 아이와 놀며 매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왼쪽은 세련된 안내판, 오른쪽은 반구대 암각화 발견 당일 연구팀의 일지를 영상으로 보여준 모습
2층 놀이공간에는 마침 우리 말고 아무도 없는 데다 신발을 벗고 올라갈 수 있는 마루까지 있어 아이가 아주 신나하며 한참을 놀았다. 1층엔 반구대 암각화 퍼즐이 있어 어린이들이 맞춰볼 수 있게 해놓았는데 난이도가 너무 높아 나와 남편조차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내가 슬쩍슬쩍 옆자리의 완성된 그림을 컨닝했더니 아이가 ‘엄마! 그건 반칙이잖아!’ 하며 나무랐다.
어려운 퍼즐을 한 조각 남기고 의기양양한 귀염둥이
박물관 문 닫을 시간인 6시가 다 되어 밖으로 나왔더니 찬바람이 몰아쳤다. 그땐 12월 초라 아직 한파가 닥치기 전이었지만 깊은 산 속이라 시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추웠다.
박물관을 둘러싼 메마른 나무와 건조한 칼바람은 평소의 내가 매우 우울하게 생각하는 풍경이지만, 그날은 새로운 지식도 많이 배우고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터라 전혀 쓸쓸해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도시에서 시골로 캠핑이나 피크닉을 온 것처럼 신선하고 상쾌한 기분이었다.
중앙의 달팽이 모양 건물이 암각화박물관.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번 크리스마스를 맞아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니, 두 암각화의 발견이 정말 선물처럼 느껴진다. 어떻게 비슷한 위치에서 비슷한 형태의 유적이 비슷한 시기에 발견될 수 있었을까.
지역별 국보 통계에 내 고장이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2’라는 숫자를 내보일 수 있게 해준 두 위대한 문화유산에 마음 속 깊이 감사함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