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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Oct 26. 2023

영유아 검진에서 꼴등을 하면 생기는 일

 매년 영유아 검진 시기가 돌아오면 엄마들 마음 무거워진다. 지난 일 년간 아이를 얼마나 잘 키웠는지 점수를 매기는 성적표처럼 느껴져서다. 특히 나처럼 아이가 또래보다 머리 하나 정도 작은 경우엔 더 부담스러운 시험대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 검진에서 나는 아이의 키가 뒤에서 3등이라는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진료실에서 된통 혼이 났다. 태어날 때는 2.98kg라는 평균적인 몸무게였던 아이가 이렇게 작게 크는 이유는 엄마인 내 탓이라고 하셨다.

      

 문진표를 너무 솔직하게 적은 게 화근이었다. 예를 들면,

     

아이가 당분이 많은 주스를 자주 마시는가? → 네.

아이가 편식 없이 골고루 영양소를 섭취하는가? → 아니오.

아이가 하루에 1시간 넘게 영상을 시청하는가? → 네.

     

 전부 가감 없는 사실이긴 하나, 나도 억울한 구석은 있었다. 아이가 골고루 먹길 원하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나도 한때는 식판이 가득 차도록 다양한 반찬을 제공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양념에 들어간 아주 잘게 다져진 버섯이나 당근 때문에 불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아이 입에 억지로 음식을 쑤셔 넣을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 아이 안 먹는 식재료보다 먹는 음식을 세는 게 훨씬 빠르다. 먹는 것은 고기, 새우, 두부, 김, 만두, 뽀로로 떡볶이, 빵, 과자, 젤리다. 요즘엔 계란도 잘 안 먹는다. 애들이 다 환장한다는 간장계란밥도 안 먹고, 볶음밥도 안 먹는다. 카레와 짜장도 안 먹고 국도 안 먹고 국수나 우동도 안 먹는다. 자기가 싫어하는 반찬밖에 없으면 아예 맨밥만 먹거나 굶는다.

     

 한 입만 먹자고 어르고 달래면 진짜 딱 한 입만 먹고서는 맛없다며 안 먹는다. 버릇을 고치자고 계속 굶기거나 밥만 먹게 할 순 없지 않은가. 언제부턴가는 나도 단념하고 저 좋아하는 재료만 돌아가면서 주게 되었다.

      

 영상 시청이야 입이 두 개여도 할 말이 없지만, 사실 나도 복직하기 전까지는 미디어를 엄격하게 제한했었다. 아이가 세 돌이 다 되어서 복직했는데, 퇴근 후에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스마트폰은 아직 철저히 제한하고 있다.

     

 물론 나는 의사 선생님 앞에서까지 이런 변명을 늘어놓을 정도로 분별력이 없진 않다. 다만 내 처지가 조선시대에 원님 앞에서 재판받던 백성처럼 느껴져서, 속으로 뇌까렸을 뿐이다.

 ‘소인이 그걸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옵고.. 한다고 하였으나 능력이 미치지 못하였사온데..’

   

 결국 우리는 의사 선생님의 권고로 성장 검사를 받아보기로 했다. 쉽게 진료받기 어려운 대학병원 대신 시내에 새로이 개원한 성장소아청소년과에 예약을 잡았다. 성장 문제만 전문으로 다루는 소아과도 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내원해서 다시 키를 잰 결과, 우리 아이는 뒤에서 3등도 아니라 무려 꼴등이었고, 몸무게는 평균 정도였다. (누가 봐도 우리 아이는 작긴 하지만 마르고 허약하진 않다) 의사 선생님은 아이를 훑어보더니 중얼거리셨다.

 “몸무게가 괜찮은 걸 보면 너무 안 먹어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일단 등수가 이 정도면 기본적인 검사는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 다섯 살 아이에게 ‘기본’적인 검사란 없다. 나와 남편은 채혈실에서 울부짖으며 발버둥 치는 아이의 팔을 붙잡고 있느라 진땀을 뺐다. 피는 또 왜 그리 많이 뽑는지, 간호사 선생님이 길쭉한 유리병에 담아 기계에 올려놓은 검체만도 서너 개나 되었다.

      

 그래도 피는 부여잡고 뽑을 수나 있지, 더 큰 은 소변검사였다. 간호사 선생님은 보통 크기의 종이컵을 하나 주면서 아이의 소변을 받아오라고 하셨고, 나는 즉시 당황해서 질문했다.

 “혹시 아이가 바로 소변을 보지 못하면 어떡하나요?”

 선생님은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여기 정수기도 있으니 물 먹이면서 기다려 보면 돼요.”

     

 나는 그 일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단박에 예상할 수 있었다. 어른이야 변기에 앉으면 조건반사적으로 소변이 나온다 해도 아이는 그렇지 않다. 게다가 종이컵을 들이대고 있으니 긴장해서 더 소변을 보지 못했다.

      

 물을 먹이면서 노력해 봤지만, 아무리 화장실에 데려가도 소변은 감감무소식이었다.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려도 아이는 계속 쉬 안 나와,라는 말만 반복했다. 우리는 혹시 익숙한 환경에서 볼일을 보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병을 하나 받아서 집으로 갔다.

      

 평소에 본인이 쓰는 아기 변기에 아이를 앉혀봤으나 소변을 보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병원이 문 닫기 전에 검체를 가져다주기로 약속한 우리 부부는 애가 탔고, 물만 계속 먹일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면 참는 게 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남편이 단호하지만 부드럽게 말했다.

 “오늘 무조건 이걸 병원에 갖다 줘야 해. 눈 감고 종이컵이 없다고 생각하고 쉬를 해 봐.”


 아이는 시키는 대로 눈을 감고 힘을 주는가 싶더니, 이내 으아앙 울음을 터뜨리며 아빠 품에 안겼다. 작은 등을 다독이며 의기양양하게 일어선 남편의 손에는 그토록 바랐던 액체가 담겨 있었다. 우리는 이 어려운 일을 해낸 아이를 꼭 안아주고 듬뿍 칭찬해 주었다.

      

 검사 결과는 일주일 후에 나왔다. 의사 선생님이 하나씩 짚어주시는 수치를 보니 피를 왜 그렇게 많이 뽑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건 일반적인 건강검진 때 받는 피검사가 아니라, 몸속에 어떤 영양분이 부족한지 하나하나 세부적으로 알 수 있는 검사였던 것이다.

     

 다행히 (그리고 어쩌면 당연히) 수치는 모두 정상이었다. 부족한 영양소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 아이는 편식이 심하긴 해도 고기를 좋아하니 단백질과 지방도 충분히 섭취하고 있었고, 여타 다른 영양분도 정상 범위 내에 들 만큼은 먹고 있었던 것이다. 엑스레이 검사 결과에서는 뼈 나이가 어리다는 소견도 받았다.

      

 의사 선생님은 현재로서는 조치할 부분이 따로 없으니, 일 년 후에 다시 보자고 하셨다. 지금은 괜찮아도 자라는 추세가 정상보다 느리면 성장호르몬 검사를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고도 하셨다. 호르몬 검사란 듣기만 해도 아이를 몹시 괴롭게 할 것이 뻔한,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아이가 그렇게 힘든 검사를 받게 하고 싶지 않은 우리 부부는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경각심을 가지고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우선 아이가 싫어해서 안 먹는 흰 우유를 잘 타일러서 먹이고, 최대한 일찍 재우기를 실천하기로 했다.

      

 하지만 여전히 편식의 해결 방법은 잘 모르겠다. 나도 어렸을 때 고기만 먹어서 부모님이 걱정 많이 했는데, 크면서 입맛이 변해 지금은 채소도 아주 잘 먹는다. 이렇게 자라면서 저절로 나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나와 남편 둘 다 우리나라 평균보다 작아서 아이가 키 큰 성인이 될 거라는 기대애초에 전혀 하지 않는다. 어쨌든 우리 키가 병으로 진단받을 정도는 아니니까 아이도 최소 그만큼은 되리라고 낙관할 뿐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도 평생 작은 키로 살아왔지만 취직도, 연애도, 결혼도 다 무사히 해냈으니까.

     

 이렇게 조금은 안일하고 무사태평한 마음가짐을 하고 있다가도, 주위 엄마들의 경험담에 귀가 쫑긋해지 한다. 무슨 무슨 성장보조제라든가, 키 크는 젤리라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얼마 전에 예린이 엄마가 캐러멜처럼 생긴 영양제 먹여서 효과를 봤다던데, 살까 말까. 손가락이 스마트폰 위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을 큰 아이들의 엄마가 부럽기도 하지만 이 또한 내가 마땅히 거쳐야 할 관문의 하나일 터이다.

     

 그리고 우리 아이는 작은 만큼 아직 아기 같아서 너무 귀엽지 않은가. 내가 번쩍 들어 품에 안아줄 수 있는 기간이 다른 아이들보다 더 길 테니, 부러은 잠시 동안만 갖고 있다 날려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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