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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Jan 28. 2024

찰나의 인상을 포착한 빛의 화가

클래식 클라우드 열네 번째 책, 모네

모네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명이다. 2019년의 한 경매에서 모네의 대표작 중 하나인 <건초더미>가 무려 1,315억 원에 낙찰되었다고 하니, 그 인기를 알 만하다.


<건초더미>

     

나도 그의 대표작들을 익히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집에 있던 명화 전집 시리즈 덕분이다. 총 8권으로 이루어진 그 전집은 르네상스부터 현대까지 가장 중요한 화가들을 다뤘으니, 그 중 한 권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은 모네가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증거다.

     

그러나 다른 많은 예술가들이 그렇듯 모네도 처음부터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와 동료들이 제창한 인상주의가 주류로 떠오를 때까지 그들은 줄곧 세상의 편견과 싸워야 했다.

     

이번 <모네 × 허나영> 편은 그 힘겨운 싸움의 과정을 모네의 대표작인 <인상, 해돋이>에서 착안하여 여명 – 일출 – 아침 햇살 – 정오 – 오후의 햇살 – 노을의 순으로 설명한다. 나도 이 구성을 착실히 따라가 보려 한다.

     


여명     

모네는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르아브르에서 보냈다. 르아브르는 우리나라의 인천처럼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큰 항구도시였고, 모네는 공부 대신 바닷가에서 놀거나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비교적 풍족하게 자란 모네였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림을 공부하고 싶어하는 아들의 소망을 이해하지 못했다. 모네에게 구원자가 되어 준 사람은 고모였다. 르카드르 고모는 조카가 화가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었다.

    

모네의 첫 스승은 부댕이라는 화가였다. 부댕은 모네가 평생을 걸쳐 지킨 예술적 신념을 전수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야외’에서 자연을 직접 보며 그림을 그리라는 것이었다. 마침 물감과 튜브, 이젤이 휴대가 용이하도록 개조되거나 새로 발명되면서 화가들이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이 물리적으로 가능하게 된 시기였다.

     

부댕의 가르침과 고모의 지원을 등에 업은 모네는 파리로 진출해 미술을 공부하게 되고, 그곳에서 소중한 친구들을 만난다.

    

일출     

19세기의 파리는 산업혁명과 시민사회의 발달로 인해 급격한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상하수도가 정비되고 편리한 대중교통이 등장했으며, 자본주의 체제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술계의 안목은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다. 프랑스 미술계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자랑하던 살롱전은 시대착오적인 신화나 종교, 영웅주의를 주제로 한 그림을 당선시키곤 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살롱전에 출품하여 당선되어야만 화가로서 입신양명할 수 있었으나, 혁신을 추구하던 모네와 친구들이 보수적인 살롱전에 설 자리는 없었다. 그들은 언제나 가난했지만 자신들의 예술을 세태에 끼워맞추지 않았고, 함께 도움을 주고 받으며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이 시기 모네는 그의 생애 전체를 통틀어 중요한 몇 명의 인물을 만나는데, 그중 한 사람이 화가 마네다. 마네는 <풀밭 위의 점심>으로 미술계에 엄청난 충격을 선사했고 심하게 비난받았다.


마네, <풀밭 위의 점심>

     

그러나 모네와 동료들은 마네의 혁신성을 존경하고 따랐다. 마네는 친구인 드가를, 모네는 르누아르 등을 대동하여 어울렸고, 여기에 세잔이나 에밀 졸라 같은 예술가들이 함께하기도 했다. 프랑스 미술사와 문학사에 굵직한 이름을 남긴 이들이 서로 친밀한 사이였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모네가 파리에서 만난 또다른 중요 인물은 뒤랑뤼엘이라는 화상이다. 그가 없었더라면 오늘날 모네의 명성은 없었을 것이다. 뒤랑뤼엘은 모네를 비롯한 젊은 화가들의 인상주의가 결국에는 주류 미술로 인정받으리라 예측했고, 그래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때 그들의 작품을 대거 구입해 주었다. 뒤랑뤼엘의 선견지명은 훗날 현실이 된다.

(파리지앵답게 유행에 민감했던 모네는 언제나 좋은 양복을 새것으로 잘 갖춰입곤 했는데, 의복 대금을 뒤랑뤼엘 앞으로 달아두곤 했다고 한다.)

     

아내 카미유를 만난 것도 파리에서였다. 모네는 귀부인이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떠들어댔었지만, 화가들의 모델 일을 하던 평범한 출신의 카미유를 만나 반해버린다.

     

카미유를 모델로 그린 <초록 드레스의 여인>은 살롱전에서 호평을 받으며 당선되었고(인상주의적 그림은 아니다), 모네는 여전히 가난하긴 했으나 작품을 판매할 수 있었다. 둘 사이에는 아들 장이 태어나고, 가정을 꾸린 모네는 따스한 아침 햇살의 기운 속으로 들어선다.

카미유를 모델로 그린 <초록 드레스를 입은 여인>

  

아침 햇살     

모네 가족은 센 강 유역의 아르장퇴유라는 도시에서 단란한 한때를 보낸다. 모네는 여전히 풍족하진 못했지만 약간의 경제적 안정을 얻었고, 아내와 아들의 모습을 자주 화폭에 담았다.

    

아르장퇴유의 양귀비 꽃밭


스튜디오 보트라고 부른 화실용 배를 산 것도 이 시기였다. 모네는 그 배에 화구와 이젤을 갖춰 놓고 강을 떠다니며 자연을 그리기를 좋아했다.

     

한편 모네와 친구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예술이 인정받지 못하는 살롱전에 매달리는 대신 자금을 모아 스스로 단체전을 개최하기로 결정한다. 1874년에 열린 첫 전시회는 그러나, 대중과 평단의 비웃음을 샀다. 이 첫 전시회에 모네가 제출한 작품이 바로 인상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작품, <인상, 해돋이>이다.

     

그러면 여기서 인상주의가 대체 어떤 예술인지 알아보자.


인상주의impressionism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한순간의 인상을 표현하는 미술 양식.

     

인상파 화가들은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 인식하고 느끼는 것보다는 눈에 보이는 순간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려고 한다.

     

그들은 을 사물의 표면에 반사될 때 보이는 모습 그대로 재현한다. 그래서 인상주의 회화는 대개 반짝반짝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인상파 화가들은 격식이 없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구도를 좋아했다. 대상을 연구하거나 밑그림을 그리면서 구도를 잡지 않고 재빠르게 그림을 그렸으며, 또한 야외의 자연 광선 아래에서 그리기를 좋아했다.

     

때로는 하루에도 색채와 표면 효과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 보이려고 같은 대상을 각기 다른 대기 상태에서 여러 번 그리기도 했다.

- 웅진학습대백과 사전 발췌


모네의 <인상, 해돋이>에는 위 설명에서 나타난 인상주의의 특징이 명확히 나타나 있다. 바다의 수면에 아른거리는 햇빛과 형체를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만큼만 그려진 배와 사람, 짙은 안개까지 모네가 머리로 알고 기억하고 있던 풍경이 아닌 그 시각에 ‘눈에 보인 그대로’ 를 그린 것이다.

    

<인상, 해돋이>


다시 인상주의자들의 첫 전시회 이야기로 돌아가서, 인상주의라는 용어는 한 평론가가 그들의 그림을 비웃으려고 쓴 단어였지만 종래에는 그 유파를 일컫는 용어로 자리매김했다.

     

10년 동안 여덟 번에 걸쳐 열린 전시회를 통해 인상주의자들은 이름을 얻었고, 살롱과 경직된 제도에 대항하는 도전적인 예술가로 자리를 굳혔다. (116p) 이는 고난과 역경을 뚫고 꾸준히 자신들의 예술을 선보인 결과 얻어낸 성과였다.

     

이 시기 모네의 주요 작품으로는 <생 라자르 역 연작>이 있다. 생 라자르 역은 모네가 다른 도시로 이동할 때 필수로 거쳐야 하는 역이자 19세기의 첨단문물인 철도의 상징이었다.

     

다른 화가들은 대부분 기차와 역의 모습을 도시 풍경의 일부로 다룰 뿐이었지만, 모네는 증기기관차가 뿜어내는 증기 그 자체를 그렸다. 그 순간의 포착을 위해 빠른 붓질로 매우 짧은 시간 안에 그림을 그려야 했다. 당시의 사진술은 아직 그런 순식간의 변화를 담을 만큼 발달하지 못했기에, 모네의 방식만이 찰나의 모습을 포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생라자르 역> 연작 중

    

정오     

정오라는 단어는 하늘 높이 뜬 태양의 강렬한 햇빛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정오는 오후의 찬란한 햇살 이전의 고비이자 슬픔의 시기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모네는 파리에 가기도 불편한 작은 마을로 이사하고, 그곳에서 사랑하는 아내 카미유의 죽음을 겪는다. 카미유의 임종을 그린 모네의 그림은 다른 그림과 완전히 다르게 칙칙한 색채와 거친 붓질이 난무한다. 마치 혹독한 눈보라를 맞으며 눈길 위에 잠든 듯한 느낌을 주는, 죽음의 차가움과 비정함이 느껴지는 이 그림을 보며 모네의 슬픔을 짐작할 수 있다. 


<카미유 모네의 임종>

    

여러 가지 상황이 겹쳐 모네는 카미유가 아팠을 시절부터 후원자의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살게 되었고, 카미유의 죽음 후에는 후원자의 아내(알리스)와 연인이 되었다. 모네는 아이들로 북적대는 집을 벗어나 노르망디의 해안을 따라가며 그림에 매진했다.

     

한편 그의 스승이자 동료인 마네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당한 부상의 여파로 고통에 시달리다 세상을 뜬다. 인상주의자들에게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던 마네의 죽음은 그들 사이의 균열을 더 벌어지게 만들었다. 크고 작은 견해 차이와 노선 차이로 인해, 마지막 전시회 이후 인상주의자 그룹은 해체한다.

     

오후의 햇살     

다시 가족들 곁으로 돌아간 모네는 센강의 지류에 위치한 아름다운 농촌 마을 지베르니에 정착했다. 이 시기 모네는 옛날 아르장퇴유에서 그랬던 것서럼 양녀(알리스와 전 남편의 딸들)들이 자연에서 노는 모습을 자주 그렸다. 그림이 옛 분위기를 회복한 데서 그의 상황과 마음이 아르장퇴유 시절만큼이나 안정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178p)

     

<앱트 강에서의 뱃놀이>


직업적 성공이 개인 생활의 안정을 뒤따랐다. 비록 인상주의는 해체되었지만, 앞서 언급한 선견지명이 있던 화상 뒤랑뤼엘은 미국 시장을 노렸다. 미국 본토에서 열린 인상주의 전시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파리와 미국의 반응이 달랐던 이유로는 10년이라는 시간 차와 두 나라의 특성 차이를 들 수 있다. 유럽의 전통 문화 강국 프랑스와 달리 신흥 강국 미국에는 온갖 새로운 것들이 용인되었던 것이다.

     

19세기 후반, 모네는 인상주의 첫 전시회에서 <인상, 해돋이>를 선보인 지 17년만에 세속적 성공과 예술적 성취를 모두 거머쥐었다. 그는 더 이상 가난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위대한 화가의 도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모네는 형이 살고 있던 루앙에 갔다. 루앙대성당의 연작을 그리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모네는 이때 자신이 루앙대성당이라는 대상이 아니라, 대성당과 자신 ‘사이에 있는 것’을 그린다고 했다. 즉 대상과 자신 사이에 있는 공기, 바람, 안개, 온도, 습기, 시간 그리고 빛을 그리려고 했다. 그는 이렇게 사이에 있는 것들을 ‘덮개’라고 불렀다.

    

<루앙대성당> 연작 중


성공한 모네는 말년의 예술혼을 불태우기 위해 정원을 아름답게 꾸몄다. (당시 정원 딸린 집에 사는 것은 중산층의 꿈이었다고 한다.)

     

그는 정원에 연못을 만들고 물, 즉 수면을 연구했다. 수면을 통해 빛의 시각적 효과를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유행했던 자포니즘(일본 문화에 대한 관심) 역시 모네가 연못을 만든 이유였다.

     

모네가 만든 정원의 핵심은 일본에서 들여 온 수련이었다. 그는 수련을 연못에 띄우고 죽기 직전까지 혼신을 다해 <수련> 연작을 그렸다. 모네의 예술혼은 현재까지도 잘 보존된 그의 연못처럼 마를 새가 없었지만, 안타깝게도 화가의 건강은 가뭄에 바닥이 드러난 호수처럼 말라가고 있었다.

    

노을     

모네는 <수련> 연작을 모아서 연 전시에 ‘물의 풍경’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연꽃과 연잎, 나무와 풀, 하늘과 구름이 수면에 어른거리며 만드는 형태와 색이 매 순간 바뀌었고 그는 이것을 효과적으로 포착해서 표현했다. (224p)

     

인기를 끈 <수련> 연작과 함께 모네의 작품을 찾는 이들은 갈수록 많아졌으나 화가는 그 수요를 모두 만족시킬 수 없었다. 시력이 떨어지면서 앞을 잘 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력을 잃어가던 시기의 작품을 보면, 형상은 흐릿하여 간신히 실루엣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고 붓질과 색감은 매우 강렬하다. 이런 변화조차 모네가 감퇴한 시력으로 본 풍경을 ‘보이는 그대로’ 묘사한 것이라고 하니, 그가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얼마나 일관되게 유지했는지 알 수 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가가 된 모네는 자신만을 위해 지어진 미술관에 작품을 기증하는 영광을 얻게 된다. 모네는 자신의 대작을 걸기 위해 독특한 형태의 건축물을 제안했다. 수학의 무한 기호처럼 둥근 벽이 있는 두 개의 타원형 공간에, 천창이 있어 햇빛이 자연스럽게 들어올 수 있는 구조였다. 그러한 설계로 만들어진 곳이 오랑주리미술관이다.

     

그러나 모네는 그림이 그곳에 걸리는 것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미술관을 위해 그려 온 자신의 대작을 미완성이라며 걸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오랑주리에서 볼 수 있는 모네의 대장식화들은 그의 사후 아들 미셸이 총리와 상의 끝에 전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오랑주리미술관에 걸린 <수련> 대장식화 (오랑주리미술관 홈페이지)


모네는 대장식화 <수련> 연작을 구상했을 때, 물의 풍경 속에서 사람들이 긴박과 긴장을 내려놓고 평화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랐다고 한다.

      

실제로 오랑주리에 들어가 거대한 <수련>을 감상하면, 둥근 벽에 설치된 긴 그림 덕에 마치 연못에 둘러싸인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고 한다. 나는 사진으로만 구경했을 뿐인데도 은은한 청록색에서 평안함이 배어나오는 듯했다. 평소 강박과 불안이 많은 성격인 내게 고요한 수면처럼 잔잔한 위로를 선사하며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풍경이었다.


     

녹색 반사


구름들




책의 에필로그에 쓰인 것처럼, 오늘날 모네의 그림을 보고 파격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봄날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아른아른한 형상과 색채는 현대인에게 호불호가 갈리는 요소가 아니다. 훨씬 실험적이고 틀을 깨는 미술을 많이 보아 온 우리에게 모네의 작품은 아름다운 그림에 속한다.

      

그래서인지 19세기 초중반의 프랑스에서 인상주의가 환영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살롱전의 보수적인 심사위원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가서 야수파나 입체파 등의 작품을 봤다면 기절해 나자빠질 지도 모르겠다.

     

저자 허나영은 인상주의가 완고한 전통의 굴레를 벗어나 서양 주류 미술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혼자가 아니라 함께여서 가능한 일이었다고 설명한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사람들도 모네를 만든 이들이었다.

     

최초의 스승 부댕, 파리에서 만난 인상주의자 친구들 – 특히 상대적으로 부유해서 친구들을 물질적으로 도와주었던 바지에 -, 선구자 마네, 노선을 달리했던 드가, 그리고 인상주의의 성공을 이룩한 뒤랑뤼엘까지, 모네라는 거장은 혼자 힘으로 탄생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영감의 원천이 된 첫 번째 부인 카미유와 두 번째 부인 알리스,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모두 모네를 만든 사람들이었다.

    

모네는 가난과 몰인정 속에서도 자신의 미술을 지켰다. 그 점이 바로 오늘날 예술가를 꿈꾸는 모든 이들이 본받아야 할 자세가 아닐까. 평생 자신의 예술관을 일관되게 유지한 모네의 신념과 그것이 세상의 인정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그의 수련 연작처럼 차분하고 평온한 감동을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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