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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Feb 04. 2024

최고가 아니라면 최선을

클래식 클라우드 열다섯 번째 책, 에리히 프롬

<에리히 프롬 × 옌스 푀르스터> 편은 시리즈 중 처음으로 외국인 학자가 집필에 나섰다. 옌스 푀르스터는 독일의 심리학자로, 공감과 존경, 때로는 날카로운 비판을 통해 선학의 사상으로 독자들을 이끈다.

     

그런데 클래식 클라우드는 본디 거장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기’로 기획되었으므로 한 사람의 생애나 학문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주는 편은 아니다. 이는 에리히 프롬 편도 마찬가지여서, 나는 프롬의 사상을 좀더 쉽게 배우기 위해 다른 책과 논문 몇 편을 추가로 참고했다.

    

먼저 <에리히 프롬 × 옌스 푀르스터> 편을 읽고 머릿속에 떠오른 여러 의문들에 대한 답을 참고 도서를 통해 찾고, 그렇게 알게 된 내용을 다시 클래식 클라우드 책을 보며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번 글도 프롬에 대해 무지했던 사람으로서 떠올린 가장 초보적인 의문점부터 출발하려 한다.

     

★ 프롬은 어느 분야의 학자인가? 애초에 학자가 맞는가?     

에리히 프롬의 대표 저작인 <사랑의 기술>이나 <소유냐, 존재냐>는 작가의 살아생전에 이미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크게 어렵지 않은 내용 덕에 오늘날에도 대중에게 널리 읽히는 고전에 속한다.

    

처음에 난 이러한 점 때문에 프롬의 정체성을 명확히 알 수 없었다. 그는 작가나 저술가인가? 아니면 전문 학자인가?


답은 후자다. 프롬은 학문의 정통 코스를 밟은,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학자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느 분야의 학자인가? 철학? 심리학? 사회학?

     

전부 다이다. 그럴 설명하는 텍스트의 대부분이 ‘사회심리학자’라는 용어를 쓰지만 실상 그는 영역을 굳이 제한할 수 없는 르네상스적 사상가라고 볼 수 있다.

     

★ 프롬의 사상은 어떤 면에서 독창적인가?     

내가 느끼기에 프롬의 사상을 집대성한 것이나 다름없는 <소유냐, 존재냐>는 도덕 교과서에서 배우는 내용과 크게 차별화되지 않는 것 같았다. 어떤 점에서 그의 사상이 독창적이라고 인정받는지 알고 싶었다.

      

우선 <소유냐, 존재냐>는 소유와 존재 양식의 개념 정립이 도덕책보다 훨씬 더 엄밀하다.      

또한 프롬은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해결 방안을 제시할 때 사회와 개인 어느 한쪽의 변혁이 아닌, 양자 모두의 개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종합한 결과이다. 아마 이 점이 철학자로서 프롬이 가장 독창적이었던 지점 같다.

    

그의 다른 대표 저서에서 남다른 부분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랑의 기술>에서 프롬은 사랑을 감정적 상태만이 아닌 학술적 연구의 대상으로 끌어 올렸다. 사랑이란 누구나 배우지 않고도 가질 수 있는 마음가짐이 아니라 ‘훈련해야 할 기술’이라고 주장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는 독일에서 파시즘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파헤치며 ‘권위적 성격’이라는 개념을 상정한다. 독일의 소시민과 노동자들은 결정의 책임이 따르는 자유를 두려워하여 자발적으로 통제와 권위에 복종하는 성격을 갖게 되었고, 히틀러는 바로 그것을 이용해 집권했다는 것이다.

     

★ 프롬이 현대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한 방안은 실현 가능한가?     

이 의문은 프롬의 사상을 좀더 자세히 알아본 후에 답하는 것이 좋겠다. 주로 <소유냐, 존재냐>의 내용을 중심으로 얘기하고자 한다.


소유 양식과 존재 양식

    

프롬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제기하는 것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그가 보기에 물질만능주의, 천민자본주의 등으로 일컬을 수 있는 현대사회의 병폐는 심각한 인간 소외를 불러왔다. 즉 현대인은 인간보다 돈이 더 우선시되고 더 대접받는 세상에서 살게 된 것이다.

     

인본주의 학자로서 인간의 가치와 잠재력을 굳게 믿었던 프롬에게 이런 인간 소외는 심각한 문제였다. 그는 이것이 사회와 개인이 ‘존재 양식’ 대신 ‘소유 양식’ 을 택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라고 진단하여, 소유와 존재의 차이를 설명하고 존재 양식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역설한다.

     

소유와 존재를 구별하는 방법은 아주 쉽다.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이 문제가 나온다고 해도 누구나 맞힐 수 있을 정도이다. 한마디로 소유 양식의 키워드는 부정적이고, 존재 양식의 키워드는 긍정적이다.

    

소유 양식의 키워드 : 물질적 소유, 힘, 지배, 권위주의적, 사이비적, 자기만족적, 집단 과대망상적, 죽음 지향적, 비창조적

     

존재 양식의 키워드 : 사랑, 공유, 창조적 생산성, 휴머니즘적, 현실지향적, 생명 지향적

    

그런데 프롬은 소유 양식을 비판하긴 했지만, 생존에 꼭 필요한 소유마저 부정하지는 않았다. 배고픔이나 추위 같은 생리적 욕구를 채우는 데 필요한 소유는, 프롬이 병폐로 생각한 소유를 위한 소유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후자에는 전자와 달리 포화점이 없다.

    

프롬은 또한 존재 양식과 금욕주의를 혼동해서도 안 된다고 하였다. 존재 양식은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억압하는 금욕주의와는 다르다.

     

쾌락과 기쁨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쾌락은 순간적인 흥분을 가져올 뿐이며, 인간의 성장을 저해한다. 반면 기쁨은 생산적이고 능동적인 성격을 띠며 인간의 자아실현에 이바지한다.

     

프롬은 우리가 쉽게 겪는 일상경험에서의 소유와 존재의 차이도 설명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일상경험에는 학습, 대화, 독서, 권위의 행사, 지식, 종교, 사랑 등이 있다. 특히 ‘사랑’의 경험에서 존재 양식이 어떤 것인지 또다른 대표작인 <사랑의 기술>을 통해 강조했다고 보면 되겠다.

     

프롬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 개개인에게는 소유지향적인 성향과 존재지향적인 성향이 함께 존재하는데, 양자는 어느 한쪽이 강화되면 다른 한쪽이 약화되는 관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지향적 성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종교와 프롬

     

종교에 대한 프롬의 시각도 특기할 만하다. 프롬은 1900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독실한 유대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프롬 집안이 얼마나 신실했는지는 증조부의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증조부는 탈무드 연구가인 동시에 와인 판매상이었는데, 종일 가게에 앉아서 경전을 연구했으며 때로는 탐구할 시간이 모자란다며 오는 손님조차 쫓아낼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프롬은 훗날 유대교를 종교로서 신봉하기를 포기했고, 유대교의 인본주의 정신만을 계승했다.

     

프롬이 가장 이상적으로 여긴 종교는 특이하게도 선불교였다. 그는 자신이 주장한 존재 양식을 따르는 삶이 불교 교리에 담겨 있다고 보았다. 일본의 불교학자인 다이세츠 스즈키와 긴밀하게 교류하며 공동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했다. 나 역시 프롬의 주장을 보며 우리나라 법정 스님의 저서 제목으로 유명한 <무소유>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기독교에 대한 프롬의 생각은 어떠했을까?

     

프롬은 기독교 중에서 14세기에 활동한 종교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를 이상적인 종교로 여겼다. 반면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에 대해서는 날선 비판을 가했다. (옌스 푀르스터는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읽을 때 어서 파시즘이 성공한 이유를 파헤쳐 줬으면 좋겠는데 주구장창 루터와 칼뱅 이야기만 나오더라고 했다.)

   

프롬은 칼뱅의 예정론이 나치 사상와 공통점이 있다고 보았다. 칼뱅 역시 나치처럼 인간의 불평등을 전제조건으로 삼아, 애당초 가치있는 사람과 가치 없는 사람을 나누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72p)

     

또한 칼뱅의 프로테스탄트 직업윤리 때문에 인간은 창조적 노동 대신 마르크스가 말한 소외적 노동에 얽매이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프롬은 칼뱅에 대해 ‘역사의 지도자들 중 가장 심한 혐오자’라는 격한 표현까지 사용했다.

    

현대 서구사회의 기독교에 대해서는, 비록 외관상으로는 여전히 기독교가 세계인의 정신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일 지라도 예수의 주장을 따르는 교리의 진정성은 잃었다고 보았다. 즉 현대인은 전혀 사랑하지 않고 있는 자신들의 행태를 감추기 위해 기독교라는 사랑의 신앙을 믿는다고 공언함으로써 양심의 가책을 무마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영향

     

1922년 프롬은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사회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4년 후 열한 살 연상인 정신분석학자 라이히만과 결혼했다. 프롬은 그녀를 통해 본격적으로 정신분석학을 접했다.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에 들어가 연구하던 프롬은 마르크스의 이론만으로는 여러 가지 사회현상을 설명할 수 없음을 알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사회현상 분석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270p)

     

프롬이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림으로써 만들어 낸 개념이 바로 ‘사회적 성격’이다.

     

프롬은 개개인처럼 집단과 환경, 사회에도 성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회적 성격은 한 집단의 구성원 대부분이 갖는 성격의 핵심으로, 그 집단의 경험과 생활 방식의 결과로 발달한다.

     

옌스 푀르스터는 친구와 함께한 멕시코 여행(프롬은 멕시코에 정신분석연구소를 세웠다)에서 겪은 일화를 통해 이 개념을 설명한다. 

    

단체 관광으로 방문한 멕시코의 한 식당에서 아침 식사가 차게 나오자 독일인들이 불평을 늘어놓는 것을 본 푀르스터의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왜 저 사람들은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걸까? 멕시코 사람들이 우리와 같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거 아니야? 이곳 사람들은 조금 느릴 뿐이잖아.”


친구의 말에 푀르스터는 프롬의 사회적 성격 개념을 차용한 답변을 한다.


“그게 우리의 사회적 성격인 거야. 독일인들은 늘 능률과 성과를 강요당해왔어. 프롬은 프로테스탄티즘을 그 원인으로 보았지. 날 때부터 신이 흡족할 만큼 성과를 올려야만 신에게 다가간다고 배웠어. 그래서 열심히 일해야 하고, 속도를 내야 하고, 효율적이어야 한다고 말이야. 그게 규범이야. 그러한 것들을 학습한 독일인들 눈엔 당연히 이곳 웨이터들의 태도가 납득이 안 되겠지.”- 41p

     

다시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로 돌아가보자. 잘 알려져있듯 프로이트는 인간이 겪는 문제는 성적 충동을 억압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프롬은 인간의 사고와 감정과 행동에는 충동 뿐 아니라 ‘사회적 힘’이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마르크스에 대해서는 반대되는 입장을 취했다. 프롬은 마르크스의 사상이 법칙을 증명하느라 인간의 의지와 역할, 열정을 과소평가했다고 말했다. 인간 소외 현상이 사회적 환경에서만 비롯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개개인의 변화보다 사회구조의 변혁에만 관심을 두었다는 것이다.

     

즉, 프롬은 현대 사회의 물질주의 병폐를 해결하고 존재 양식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정신혁명과 사회구조의 근본적인 변혁이 모두 필요하다고 보았다. 바로 이 지점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프롬 사상의 독창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롬이 제시한 해결방안의 실행 가능성

     

그렇다면 개인과 사회는 어떤 방법으로 혁신되어야 할까? 프롬이 제시한 해답을 들여다보자.     

먼저 개인의 의식에 필요한 변화로서, 존재지향적 태도를 갖기 위한 구체적 방안이다.

    

a. 모든 소유물을 자진하여 포기하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b. 주고 나누는 데서 기쁨을 느낀다.

c. 생명, 자연 현상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d. 지금 여기에 완전히 존재한다.


등등이다.

     

이러한 개개인의 정신 혁명과 동시에 이루어져야 할 사회구조의 혁신, 즉 현대인이 지향해야 할 사회를 프롬은 ‘인본주의적이고 공동체주의적인 사회주의’라고 불렀다. 그 특징은 이러하다.

    

a. 생산과 광고 등을 국가가 통제한다.

b. 무한한 성장이 아닌 선택적 성장을 촉진한다.

c. 공동 경영의 원리가 현대 기업체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특히 노동자들이 기업의 경영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d. 인본주의적 사회주의는 사적인 소유를 무조건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들이 산업과 정치에 능동적으로, 책임있게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e. 물질적 이익이 아닌 정신적 만족이 노동의 동기가 되는 풍조를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들은 현실에서 도저히 실현 불가능해 보인다. 너무 이상적이지 않은가. 옌스 푀르스터 역시 <소유냐 존재냐>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고 말한다. 경각심을 일깨우는 정도에서 책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 동시에 이렇게 얘기하기도 한다.

    

“그래도 프롬의 공이 크지. 정치가와 사상가들이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프롬이 사람들의 생각을 많이 바꾸어놓은 것은 사실이니까. 지금은 모두가 기후 보호를 외치잖아. 플라스틱을 금지하는 나라도 생겨났고. 게다가 평화운동 덕분에 유례없이 긴 평화를 누리고 있으니, 프롬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거야.”- 32p

     

그렇다면 프롬은 내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배워오던 기후 위기와 환경 오염의 위험성을 경고한 선구자이며, 그래도 오늘날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지속 가능한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데 그의 공이 있다는 뜻이 된다.

     

물론 프롬 본인도 자신이 지향하는 사회가 쉽게 도래하리라고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소유냐 존재냐>에서 이렇게 말한다.

     

최신 자연과학 덕분에 비행과 같은 기술 유토피아는 이미 실현되었다. 메시아 시대의 인간 유토피아 … 는 기술 유토피아에 들인 것과 똑같이 에너지, 지성, 열정을 쏟아부을 때 현실이 될 수 있다.

     

솔직히 나는 이러한 낙관론에 반대한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유토피아는 있었던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프롬과 같은 선각자들, 철학자들이 아무리 위기를 부르짖어도, 아무리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어자고 주장해도 이기적인 인간들이 들어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는 도덕적인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비윤리적인 사람들도 많다. 어떠한 교육과 교화로도 그들을 일깨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프롬의 사후 40년이 지났음에도 그가 진단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은 그대로 남아있다.

    

인류는 자제할 수 없는 이기심과 탐욕으로 인해 종말을 향해 가고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자본주의 체제가 종말을 맞거나, 지금과 비슷한 정도로 죽 계속되거나. 그동안 소외되는 인간은 어떠한 현자도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 모두를 도덕적으로 탈바꿈시키지 않는 한은.

     

이런 나의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에서 프롬의 경고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최대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존재지향적 양식을 추구하게 하여 인간 소외 현상을 늦추거나 완화시키는 것이다. 비록 모든 인간이 그러진 못할지라도 존재 양식을 따르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진다면, 소외되는 인간도 줄어들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최고는 아니더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 참고문헌 - 

박찬국,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읽기』, 세창미디어

박흥규, 새로운 삶의 예술,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삶이냐』,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휴머니스트) 中

최흥순, 건전한 사회에 대한 소고 – 에리히 프롬의 사상을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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