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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Feb 12. 2024

철학적 사유의 세계에서 이방인이 되어버린 나

클래식 클라우드 열여섯번째 책, 카뮈

변명 한 보따리


어제의 사과문에서 예정한 오늘 오전까지도 글을 다 쓰지 못했어요. 이번에 공부한 카뮈와 그의 대표작 <이방인>은 정말 몹시 어려웠거든요. 철학의 세계에서 저는 ‘이방인’ 그 자체였습니다.

     

카뮈의 작품에는 (본인은 부정했지만) 실존주의 사상의 핵심이 담겨있기에 <카뮈 × 최수철> 편을 이해하려면 먼저 실존주의에 대해 알아야 했습니다. 카뮈 뿐 아니라 사르트르도 공부해야 했고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식이 얕은 저는 그 난해한 철학에 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죠.

     

실존주의의 기본 개념을 이해하는 데만 해도 꽤 많은 시간을 투자했지만, 솔직히 아직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당연한 일일지도 몰라요. 철학 전공자들은 실존주의만 최소 몇 년씩, 심지어 평생동안 공부하니까요. 고작 일주일 남짓한 시간으로 그 심오한 사상을 어찌 파악하겠습니까.

      

그래도 저에겐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만큼의 공부를 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기본서이자 텍스트인 책이 있다 하더라도 글을 쓸 때는 그 내용을 그대로 베껴써서는 안 되니까요.

      

원래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글쓰기 수칙이지만 최근 한 작가님의 브런치북을 통해 확실히 배웠어요. 책 내용을 체득하고 이해해서 제 문장으로 풀어낼 줄 알아야 한다고요. 인용문만 잔뜩 늘어 놓은 글을 서평이나 독후감이라고 할 수 없겠죠.

     

그러니 최소한 제 문장으로 풀어낼 수 있을 만큼은 실존주의에 대해, 부조리에 대해 공부해야 했어요. 결국 성공하진 못했지만요. 이번 글에서 인용문의 비중을 줄이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완벽히 제 문장으로 풀어내는 데는 실패했어요.

     

무엇보다 검증된 텍스트에 의지하지 않았을 때 생겨날 오류의 가능성이 두려웠습니다. 제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중요한 개념을 설명하려 들다가 틀릴까봐, 그래서 독자분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게 될까봐 걱정이 되었어요. 출판사에서 펴내는 책이라면 편집자가 오류를 걸러내 주겠지만, 제 글에 빨간펜을 죽죽 그어줄 사람은 없잖아요.

    

그래서 이번 글도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차라리 훌륭한 학자분들의 설명을 요약하고 정리하기만 하는 편이 독자분들에게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럼에도‘내 문장으로 써보기’라는 과제를 완전히 포기하지 못한 것은 순전히 저의 욕심과 이상 때문입니다.

     

변명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저의 모자란 공부 결과를 함께 들여다 봐주세요.     


카뮈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철학적 개념

     

실존과 본질     

실존주의 철학의 거두이자 한때 카뮈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했던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했다.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     

철학적 사유 방법에 무지한 나는 이 문장이 대단히 유명하고 멋진 말이라는 건 알아도 그 뜻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도움을 준 것이 망치의 예시이다.

    

여기 망치라는 물건이 있다. 다른 말로는‘존재’한다. 우리는 못을 박을 때 그것을 쓴다.‘못을 박기 위한 도구’라는 사실은 망치의 쓰임새이자 망치의 성질, 즉 ‘본질’이다.

      

망치에 관해서는 본질과 존재 중 무엇이 우선일까? 당연히 본질이다. 못을 박기 위해서라는 본질이 아니라면 망치가 존재할 이유도 없다. 못을 박기 위한 용도에만 충실하면 되므로 망치끼리 바꿔 쓰는 일도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망치와 달리 처음부터 ‘어떠한 것’으로 규정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고유한 가치가 있는, 대체불가능한 존재이므로 상황에 따라 이 사람을 저 사람으로 바꿀 수도 없다. 인간에 있어서는 망치와 달리 실존이 본질에 우선한다.

     

비슷한 예시로 종이 자르는 칼을 생각해 보자. 장인은 종이 자르는 칼을 만들기 위해 먼저 종이를 잘 자를 수 있는 도구라는 생각(개념)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다. 그런 생각 없이는 종이 자르는 칼을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종이 자르는 칼은 존재하기 전에 이미 그것이 무엇인지 정해져 있으며, 존재는 그 후에 만들어진다. 종이 자르는 칼은 본질이 실존보다 앞서는 것이다.

    

반면 인간은 어떠한가? 인간을 만드는 제작자, 장인이란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이 무엇인지 미리 염두에 두고 인간을 태어나게 하는 이는 없다. 인간은 아무런 정해진 성질이 없이 세상에 태어나고, 그런 후에야 자신을 그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성질이나 정체성을 찾아 나간다. 그러므로 인간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그래서 인간은 자유롭다. 인간이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규정하는 운명이나 본성이 없기 때문에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으며, 선택을 통해 자신을 어떻게 만들어 가도 괜찮다. 단 이런 무한한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여기서 누군가는 반기를 들 수 있다. 기독교인이라면 인간이 무엇인지 규정하는 존재, 즉 신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무신론적이다. 거기에는 인간의 본성을 미리 결정하는 신이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

    

부조리와 반항     

‘부조리’는 카뮈의 철학과 문학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이다. 카뮈가 삶의 부조리에 맞닥뜨리게 된 것은 그가 평생 시달린 병(폐결핵)과 관련이 있다.

    

카뮈는 폐결핵으로 인해 대학 시절 즐겨 하던 축구를 그만두어야 했고,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못했으며, 교수로 임용될 수 없었다. 그는 건강한 이들보다 죽음의 그림자를 훨씬 자주, 가깝게 느꼈다.

     

언젠가 죽어야 한다는 명제는 카뮈에게 큰 부조리로 다가왔다.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을 왜 사는가? 죽기 위해 사는 삶은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은 왜 자살하지 않는가?

     

<시지프스 신화>는 카뮈의 부조리 3부작 중 하나이다. 카뮈는 부조리의 문제를 세 가지 장르의 텍스트로 만들어 탐구했는데, <시지프스 신화>는 그중 철학서에 해당한다. 소설에 해당하는 것이 그 유명한 <이방인>이며 희곡은 <칼리굴라>이다.

     

<시지프스 신화>에서 카뮈는 부조리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그가 말하는 부조리란 합리적 인간이 비합리적인 세계를 이해하려 시도할 때 느끼는 감정이다. 인간은 무릇 세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싶어하지만 비합리적인 세상은 그것을 쉬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부조리라는 감정이 발생하는 것이다.

     

카뮈에 의하면 인간과 세계는 어느 한쪽도 그 자체로서 부조리한 것이 아니다. 부조리란 인간과 세상의 ‘사이에’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조리는 합리적이지도, 비합리적이지도 않은 뒤섞임이다. 이는 논리로써 증명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 감정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한 인간’이란 무엇일까? 부조리한 인간은 단어의 속성에 따라 부정적인 존재로 오해되기 쉬우나, 실상은 그 반대다. 부조리한 인간은 ‘부조리를 의식하는 인간’이며 깨어있는 사람이므로 카뮈가 추구하는 인간상이다. <시지프스의 신화>에서는 ‘시지프스’로 대변된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인 시지프스는 신을 기만한 대가로 무거운 바윗돌을 산의 정상까지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는다. 밀어올린 바윗돌은 바로 다시 굴러떨어지므로 다시 밀어 올려야 한다. 이런 과정은 무한히 반복되며, 시지프스는 영원히 바윗돌을 밀어 올리는 고통에 처한다. 카뮈가 보기에 시지프의 시련은 인간이 살아가며 느끼는 부조리와 같았다.

      

인간은 삶을 이해하고 세계와 하나 되기 위해 열심히 돌을 굴린다. 하지만 정상까지 굴려 올린 돌은 다시 굴러 떨어지고, 세계는 아무런 의미도 희망도 우리에게 주지 않는다. 인간과 세계의 이러한 대립의 상태가 바로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이다. - <알베르 카뮈를 읽다> 중

     

그렇다면 이 부조리 속에서 인간은 어떤 대책을 실행할 수 있는가? 카뮈는 세 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자살, 희망(종교), 반항이 바로 그것이다.

     

그 중 가장 바람직한 해결책은 반항이다. 왜냐하면 자살과 희망은 인간과 세계 중 어느 한쪽을 말살시키기 때문이다. 자살은 부조리를 느끼는 인간의 의식을 제거하고, 희망(종교)는 세계를 이상적인 곳, 신의 힘이 미치는 곳으로 설정함으로써 세계의 불합리성을 삭제해버린다. 그러므로 자살과 희망은 둘 다 직시가 아닌 회피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반항이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똑바로 바라보며, 운명에 의해 굴복하거나 체념하지 않고, 부조리에서 발을 빼지 않고 삶을 끝까지 이어나가는 것이다.

      

반항의 자세를 시지프스로 비유한다면 이러하다.

      

카뮈는 시지프스가 바위를 산 정상까지 굴려 올리고 내려올 때 잠시 동안의 휴식에 초점을 맞춘다. 카뮈는 그의 얼굴에서 말없는 기쁨을 발견한다. 그는 바위가 정상에서 굴러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지 않는다. 그는 바위가 정상에 도달하는 즉시 다시 굴러떨어질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다시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맹렬히 노려보며 체념하지 않고 다시 바위를 굴린다. - <알베르 카뮈를 읽다> 중에서

     

(이 대목에서 어느 중요한 철학자의 향기가 느껴진다면 제대로 짚은 것이다. 바로 니체다. 카뮈의 부조리와 반항 개념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과 깊은 유사성이 있다.)


<이방인> 이해하기

     

카뮈의 사상에 대한 기본 지식을 갖추었으니 이제 그것을 바탕으로 그의 문학을 읽어보자. 여기서는 대표작인 <이방인>을 다루어 보겠다. <이방인>은 카뮈의 실존주의와 부조리 개념이 녹아든 철학적인 소설이므로, 나 같이 철학적 사유를 단련하지 못한 평범한 독자가 아무런 길잡이 없이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방인>의 줄거리     

주인공 뫼르소는 알제(알제리의 수도)의 선박 중개인 사무실 직원이다. 그는 양로원에 계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향한다. 그가 슬픔에 몸부림칠 것으로 예상한 양로원 사람들과 어머니의 친구들은 뫼르소의 무덤덤함에 당황하고 놀란다. 장례식 다음날 뫼르소는 마리라는 여자와 영화를 보고 관계를 가진다.

     

어느 날 뫼르소는 이웃 레몽과 친구가 되고, 변심한 아랍인 애인에게 복수하려는 레몽의 계획에 휩쓸린다. 레몽, 뫼르소, 마리는 레몽 친구의 소개로 해변에 놀러가는데, 그들을 미행한 레몽 애인의 오빠를 만나 결투를 벌인다. 레몽은 다치고 싸움은 일단락된다.

     

뫼르소는 레몽이 쓰지 못하게 권총을 빼앗아 지니고는 혼자 해변을 거닌다. 그러다 아까 싸웠던 레몽 애인의 오빠와 마주치고, 그 아랍인은 칼을 꺼낸다. 뫼르소는 견디기 힘들 만큼 강렬한 태양빛을 느끼며 총을 꺼내 아랍인에게 쏜다.

     

살인죄로 기소된 뫼르소는 재판을 받는다. 그런데 그에게 쏟아지는 질문은 살인 그 자체가 아닌 어머니의 장례식 때 보인 무심한 태도에 대한 것이다. 그는 무정하고 냉혈한 데다 신을 믿지 않는 살인자로 낙인찍혀 사형을 선고받지만, 오히려 죽음을 앞두고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느낀다.

     

<이방인>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실존과 부조리, 그리고 반항     

<이방인>에서 대립하는 두 인간상인 뫼르소와 그를 심판하는 사람들은 상반되는 두 요소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뫼르소는 실존적인 인간이며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타인들은 본질적 사유에 매몰된 인간들이다.

    

소설 내내 뫼르소에게 결여된 것은 ‘의미의 망’이다. 뫼르소는 자신의 행동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의미와 상호연결성에 대한 자각이 없다.

     

예를 들어 보통 사람이라면,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 일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냉혈한으로 판단하는 구실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혹은 어머니의 장례식 바로 다음날 여자와 놀고 자는 일이 사회적인 관습 상 어떻게 보일지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뫼르소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없다. 뫼르소에게 어머니의 죽음과 장례식장에서 자신이 보인 태도, 여자와 즐기는 일 등은 서로 아무 관계가 없으며 연결되어 있지도 않은 파편적이고 분절적인 사건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다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망이 그에게 없다는 것은 그를 소설 속 인물치고도 이상하고 기괴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카뮈는 그런 뫼르소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의미의 사슬이 옳은 것인지, 인간의 실존에 부합하는 것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왜냐하면 개별의 사건과 행동에 인간이 부여하는 그 질서와 구조와 의미는 거꾸로 인간을 옥죄기 때문이다. 현상의 구체성과 실존은 구조와 의미에 의해 본질로 왜곡되고 변질되며, 그 결과는 생각보다 참혹하다.

      

우선 뫼르소를 단죄하는 재판의 부조리함이 그러하다. 뫼르소가 살인을 저지른 것이 정당하다거나 옳은 일이라는 뜻이 아니다. 뫼르소는 ‘살인이라는 행위’그 자체로 단죄받아야 마땅하지만, 소설 속에 묘사되는 재판은 살인 자체가 아닌 뫼르소의 인격에 대한 엄벌로 귀결된다.

     

재판정에 증인으로 불려오는 양로원 사람들은 뫼르소가 어머니의 죽음을 두고 얼마나 비인간적인 반응을 보였는지 증언한다. 마리의 말은 뫼르소가 어머니의 사망 다음날에 애도는커녕 여자와 데이트를 할 만큼 부도덕한 인격의 소유자라는 증거가 된다. 뫼르소가 신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러한 판단을 강화한다.

    

이는 뫼르소의 실존보다 본질을 우선에 둔 심판이다. 뫼르소에게 살인을 일으키는 본질이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소설을 읽으며 뫼르소가 필연적으로, 반드시 살인을 저지를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뫼르소는 총을 쏠 수도 쏘지 않을 수도 있었으며 레몽에게서 총을 뺏지도, 뺏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는 그가 살인자가 되리라고 미리 정해져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순간에 뫼르소가 총을 쏘지 않는 대신 쏘는 것을 선택한 유일한 이유는 견디기 힘들 만큼 강렬한 태양빛이었다. 그래서 그는 왜 죽였는가? 에 대한 대답으로 태양을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사고하는 습관이 들어있는 사람들은 그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대신 익숙한 의미의 인과관계, 구조화 같은 작업을 통해 뫼르소에게 원래 살인자로서의 본질이 있다고 규정지어 버린다. 그래서 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그러므로 이 재판은 부조리하다.

     

그렇다면 뫼르소는 그 부조리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시지프스처럼 그 역시 자살이나 신이 아닌 반항을 택한다. 뫼르소는 신에 귀의하라며 감옥으로 찾아 온 목사의 멱살을 잡고 내쫓는다. 목사는 죽음을 앞둔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신에 의지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고, 뫼르소는 바로 그점에 분노했다. 그런데 분노하는 동시에 기쁨도 느낀다.

    

그가 사는 방식은 죽은 사람과도 같으며 심지어 실제로 살아있다고도 말할 수 없지. (...) 하지만 나는 (...) 내 인생과 닥쳐올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 나는 이렇게 하는 것을 택했고 다른 것은 택하지 않았어. - <이방인> 중

     

뫼르소는 죽음을 두려워해 신이라는 허구를 만들어 내고, 거기에 의탁하기까지 하는 목사를 살아있는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그보다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끝까지 신(희망)을 거부한 자신에게 기쁨을 느끼고 자랑스러워한다. 그는 부조리를 똑바로 응시하며 반항하는 인간으로, 행복한 시지프스로서 용감한 죽음을 맞는다.

     

그런데 본질적 사유가 불러오는 재앙은 현실 세계에서는 더 잔인하게 나타났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바로 그것이다. 나치는 6백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을 오로지 유대인이라는 본질로만 파악했다. 그리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살인을 저질렀다. 인간의 이성에 근거한 역사의 진보를 주장한 근대인의 믿음은 박살났다. 부조리를 의식하는 인간, 실존적인 인간이 지녀야 할 도덕적 책임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나치 산하의 조직에 속해 학살에 가담하고 협력한 많은 사람들은 과연 악마처럼 사악했을까? 아니다. 그들은 지극히 평범하고 상식적인 사회인이었다. 그들은 오히려 너무 평범해서 본질적 사유의 위험성을 몰랐고, 그래서 선동당했다.

     

만약 그들이 부조리한 인간이었다면, 뫼르소나 시지프스였다면 유대인이라는 본질을 앞세워 학살을 자행하는 나치에 설득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의식하며 직시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인간의 본질이 아닌 실존을 우선시하는 철학을 지니고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홀로코스트와 같은 거대한 비극을 막을 수 있다.


나에게 실존과 부조리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신기하게도 나는 글의 서두에서 말한 대로 실존주의 철학을 알지 못했지만, 삶의 불합리성과 그로 인한 부조리를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인생이 과연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가? 라는 회의가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고 그에 대항해 나름대로 치열한 생각과 고민을 해왔던 것이다.

    

고민은 몇 년 전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되면서 훨씬 깊어졌다. 나는 아이에게 삶을 주었으나 그것이 진정으로 가치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정말 솔직하게 말해서, 아이의 존재가 나에게 순수하고 온전한 기쁨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나는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육아서를 읽고, 심리상담센터를 찾아가고, 주위 엄마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내가 만족할 만한 시원한 해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들은 이런 문제로 고민할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왜 나만 그런 염세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의문에 시달렸을까? 나 이외의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겪는 부모됨이라는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이는 인생의 과업을 왜 나만 그토록 힘겨워했을까?

    

아마 내가 기질적으로 나밖에 모르고 자식을 위해 희생하기 싫어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라서 그랬을 것이다. 또 육아라는 일이 내가 원한 대로, 내가 애쓴 만큼 수월하게만 풀리지 않아서 더 그랬을 것이다.

     

나는 상담사에게 육아에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아이와의 관계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과는 달리 육아의 ‘성과’나 ‘성적’은 자꾸 기대를 벗어나기만 했다.

    

아이는 말하기와 배변 가리기 같은 중요한 발달 단계가 또래보다 느렸고, 매 단계는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법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다 한다’는 말은 내 아이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나는 물리치료를 배워서 아이의 사경(목이 기우는 질환)을 고쳐주어야 했고 언어치료 상담을 예약해야 했으며 변기에 소변을 보지 못하는 아이에게 미친 듯이 화를 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을 원망해야 했다. 아이의 모든 문제는 엄마의 양육 방법이 잘못되서라고,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이집을 빨리 보내자는 남편과 싸워가면서 육아휴직 기간을 꽉 채워 가정보육을 했고, 영상을 노출하지 않았고, 엉망진창으로 나빠진 건강 때문에 천식까지 왔음에도 책 육아와 놀이터 육아를 고집했다. 그런데 그토록 열심히 아이를 위해 애쓴 결과가 언어 지연에 소아강박증이라니. 타고난 질환도 아닌 내 양육 태도 때문이라니. 나보다 훨씬 대충 키우는 엄마들의 애들도 다 아무 일 없이 잘 크는데. 나는 그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것은 내가 살아 오면서 가장 뼈저리게 느낀 세계의 불합리이자 비합리이자 잔인성이었다. 나의 합리적인 지각으로는 그 사실을 납득하기 힘들었다.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이 카뮈 식으로 말한다면 ‘부조리’ 였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부조리를 직시하고 반항할 만큼 용감한 사람이 아니었다. 갑자기 종교를 믿기도 싫었다. 대신 깊은 우울감에 빠졌다. 카뮈가 말한 육체적 자살은 아니었지만 내 도파민은 자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출산과 육아가 싱글이나 딩크의 편리함을 포기할 만큼 가치있는 일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내 아이에게 기꺼이, 기쁘게 줄 수 있을 만큼 인생 자체가 의미있는 일이라고 여길 수도 없었다. 나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을 안고 여러 해를 보냈다.

     

다행히 지금은 과거에 날 힘들게 한 여러 사항이 대부분 해결된 상태로, 나는 비교적 평온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브런치에 이렇게 무겁고 진지한 글을 쓰거나 문사철예 공부에 바쁠 만큼 여유가 생긴 것이 그 증거다.

      

이번 글을 쓰며 조금이나마 실존주의에 대해 알게 되니, 내가 삶의 무상함과 무의미를 느낀 것이 단지 부정적인 가치관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카뮈 같은 사상가이자 대작가조차 세상이 그 자체로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오랜 의문에 답을 찾을 수 없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실존주의가 내게 준 도움은 언제 닥칠까 두려운 인생의 시련과 고통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르쳐 준 것이다. 예전엔 감당하기 힘든 일이 생기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어 억울하기만 했었다.

     

그런데 실존주의적 관점에서는 거꾸로 그런 일이 왜 내게 일어날 수 없는지 물어야 한다. 고난은 나에게 일어날 수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지 내게는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건이 아니다. 그러한 사실을 안 지금 이후부터는 좀더 의연하게 삶의 시련에 대처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실존 철학이라는 바다의 가장 깊은 곳까지 닿지 못해서인지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한 의문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실존주의는 도덕적 규범과 사회적 관습 등을 그대로 따라서는 안 되고 자신이 직접 새로운 가치를 찾아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전통적 가치를 선호하고 그에 따라 살고 싶다.

     

나는 나태보다는 성실이, 거짓보다는 정직이, 오만보다는 겸손이, 무지보다는 지성이, 미신보다는 과학이, 비합리보다는 합리가 더 좋다. 이건 내가 실존보다 본질을 우선해서일까? 다른 사람들이, 사회가 강요하는 가치에 세뇌당한 결과일까? 나만의 가치를 스스로 찾지 못한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 정말로 그런지 아닌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어린 시절 읽은 책들의 영향으로 지나치게 모범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동경하는 면이 있긴 하다.

     

그러나 어떤 가치가 다른 것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 선택이기도 하다. 난 언제나 요령보다 정도를, 퇴폐보다 건전을 택하고 싶다.


    

이번 주엔 좀 수월하기를

     

카뮈, 이방인, 사르트르, 실존주의.. 선생님이라고는 급하게 알라딘에서 구입한 전자책과 어렵게 찾은 논문 몇 편이 다인 상황에서(물론 한 권 한 권이 다 가뭄의 단비같은 존재이며 아주 좋은 내용을 담고 있는 유익한 저서들이다) 이 난해한 단어들은 내 지적 능력의 한계 너머에 있었다. 그들은 그 너머에서 나를 놀리고 비웃고 괴롭혔다. 힘들었다.

    

다음 연재는 베토벤이다. 너무나 반갑다. 음악을 들으며 지친 머리를 식히고 편안히 쉬어야겠다. 카뮈가 뭐라고 했든 간에 음악은 내게 있어 삶의 무의미를 유의미로 바꾸어주는 희망이자 종교다. 플라톤 식으로 말하면 내가 생각하는 음악의 가장 완전하고 이상적인 상태, 즉 음악의 이데아는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명곡들이다.

     

그러니 이번 주엔 좀더 쉽고 수월하기를.


카뮈에 대한 다른 중요한 탐구 주제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카뮈와 사르트르와의 견해 차이 : 두 사람은 철학사에서 자주 묶여서 탐구된다. 나도 그들의 친교와 절교, 사상의 차이에 대해 열심히 읽긴 했지만 이 글에서 다루진 못했다.

    

알제리 독립전쟁에 대한 카뮈의 입장 : 알제리 독립전쟁에 대한 그의 미온적 태도는 폭력에 반대하고 그리스적 중용을 중요시했기 때문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알제리인과 프랑스인 양쪽의 미움을 샀다.

    

지중해인으로서 카뮈의 정체성 : 가난한 어린 시절 알제리의 바다와 태양은 카뮈에게 청구서를 보내지 않는 풍요와 감동의 원천, 사랑의 대상이었다. 그는 그리스의 균형과 중용을 추구한 지중해인이기도 했다.

   

<반항인>, <페스트> 등 다른 대표 저작들의 메시지 : <이방인> 말고도 카뮈의 깊은 사유가 담긴 작품이 많다. <반항인>에서는 부조리에 대한 반항을 한층 자세하게 다루었으며 <페스트>는 연대하는 반항, 개인 차원에서 벗어난 사회적 반항의 의의를 역설한다.

     

연극과 희곡 : 카뮈는 가난과 질병으로 인해 느낀 부조리함을 연극과 희곡을 통해 해소하거나 승화시키곤 했다. 실감나는 연기를 할 줄 아는 배우이기도 했다.


- 참고 도서 -     

유기환, <알베르 카뮈 – 살림지식총서 51>

박윤선, <알베르 카뮈를 읽다>

신성림,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강대석, <카뮈와 사르트르>

양자오, <자기 자신에게 성실한 사람>

이서규, 《카뮈의 부조리철학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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