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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Feb 25. 2024

친숙한 아름다움만이 예술의 역할은 아니다

클래식 클라우드 열여덟 번째 책, 백남준

예술가에게 ‘새로움’ 이란 어떠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추구해야 할 이상일까? 기존의 예술과의 차별화를 위한 시도는 대중이 보기에는 난해한 결과물을 초래하는 것 같다. 백남준의 작품 세계도 내 눈에는 그런 수수께끼같은 이미지로 가득했다.


그래도 그의 전위예술보다는 비디오아트 쪽이 조금 더 이해하기 수월했다. 전자는 아무리 봐도 기행이었다. 자꾸 피아노를 부수고 바이올린을 부수고 넥타이를 자르는 등 파괴적인 행위를 계속하니 물자들이 아깝다는 생각과 동시에 저것도 예술인가? 라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비디오아트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으나 덜 급진적으로 느껴졌다. 몇 가지 작품은 직관적으로 아름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용인의 백남준아트센터가 소장한 <TV 정원>은 무성한 수풀 사이에 여러 대의 텔레비전을 다양한 각도로 배치한 작품으로, 기술과 자연의 조화와 공존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초록빛을 자랑하는 식물들 속에서 빛나는 휘황찬란한 이미지와 영상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상하게도 나무와 풀, 텔레비전이라는 상반된 성격의 오브제들이 이질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브라운관에서 내뿜는 빛, 다양한 종류의 음악과 춤이 끊임없이 흐르는 영상이 오히려 식물들의 생명력을 강화하고 북돋우는 듯했고 주위를 화사하게 밝혀주는 것 같았다.

  

<TV 정원>, 백남준 아트센터 유튜브 채널에서 캡쳐


인터넷의 상용화를 예견한 듯한 <전자 초고속도로> 역시 시각적으로 즐거운 작품이었다. 수십 대의 텔레비전과 형형색색의 전선들을 이용해 미국의 50개 주를 그린 이 작품은 전자 정보가 미국의 전 지역들을 연결할 것이라는 비전으로 탄생했다. 네모반듯한 서부의 주 경계선과 구불구불한 동부의 선을 크기가 다른 텔레비전들로 표현한 모습이 눈에 띈다. 재생되는 영상들은 각 주의 특징들(예를 들어 켄터키 주는 <오즈의 마법사>를, 알래스카는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풍경)을 담고 있다.

     

<전자 슈퍼고속도로>, 스미스소니언 미술관 유튜브 채널에서 캡쳐

  

88년 서울 올림픽을 개념하여 만들었다는 <다다익선>은 동원된 텔레비전의 숫자와 규모로 관람객을 압도한다. 작품이 공개되는 날이 10월 3일이라는 데서 착안해 1003개의 텔레비전으로 탑을 쌓았다. 거대한 높이의 탑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과 소리와 이미지의 향연을 실제로 본다면 감탄사가 절로 나올 것 같다.

     

<다다익선>은 브라운관이 수명을 다하는 바람에 한동안 전원을 꺼두어야만 했다. 백남준이 비디오아트로 명성을 날리던 60~80년대에서부터 이미 40~60년이 지났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다. 사회의 다른 곳에서는 배불뚝이 텔레비전이 매끈한 평면을 대체한 지 오래다.

     

<다다익선>을 소장한 국립현대미술관은 작품의 취지를 훼손시키지 않는 한에서 복원을 진행했는데, 수리가 불가능한 브라운관은 외관은 그대로 두고 내부의 디스플레이만 LCD로 대체했다고 한다. 만약 백남준이 살아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그는 예술이란 원래 수명이 다하기 마련이라는 지론으로 작품의 영원성을 주장하지 않았다고 하니, 죽음은 죽음으로 받아들이고 새 기술을 창작에 응용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평판 디스플레이를 재료로 삼은 새로운 <다다익선>을 목격했을지도 모르겠다.


다다익선,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TV 부처>라는 작품은 이상하면서도 재미있다. 부처님이 앉아서 TV를 보고 있는데 그 티비에 띄워져 있는 영상은 다름아닌 자신의 얼굴이다. 부처님과 텔레비전, 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을 보는 사람들의 머릿속엔 여러 가지 상상이 떠오르게 마련이다. 부처님도 티비를 보시네. 부처님은 어느 채널을 좋아하실까? 브라운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만족스러우실까?

    

<TV 부처>, 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은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다. 그가 그 방면에서 세계적인 예술가라는 건 초등학교 때부터 배워서 알고 있었지만 말 그대로 ‘창시자’ 였다는 사실은 몰랐다. 50년대부터 서구의 가정에 보급되기 시작한 텔레비전을 본 백남준은 그 누구보다 먼저 그것을 예술의 재료로 사용한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그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후엔 비디오아트의 후계자들이 속속들이 나타났다.

    

전통적인 화가가 종이로 된 캔버스에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다면, 백남준은 브라운관이라는 캔버스에 영상을 담은 새로운 화가였다. 국가와 언어와 민족을 초월한 언어로써 춤과 음악을 중요시했던 그는 새로운 작곡가이기도 했다. 84년 30여년만에 고국에 복귀한 후 출연한 방송에서 그는 ‘비빔밥’이라는 단어와 ‘믹스미디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미술이기도 하고 음악이기도 하고 영상이고 무용이기도 한 그의 작품은 예술 장르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든다.

    

유튜브를 통해 그 방송의 녹화본을 보니 여러모로 신기한 점이 많았다. 패션은 우리 엄마 아빠의 결혼 전 사진을 보는 것 같았고, 출연한 패널들의 말투는 최근 SNL 이라는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흉내낸 옛날 서울말씨 그대로였다.

     

사회자는 불문과 교수 김화영이라는 분이었는데, 카뮈 번역의 권위자로 세계문학전집에 자주 등장하는 바로 그분임이 틀림없었다. 이름 때문에 여자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남자분이셨다. 그런데 왜 불문학 전공자가 사회자를 맡았을까? 백남준은 일본과 독일에서 유학하고 미국에서 전성기를 맞은 예술가이기 때문에 프랑스와는 무슨 접점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가장 신기했던 건 백남준의 발화였다. 30년 넘게 고국에 들어온 적 없던 사람치고는 모국어를 거의 잊어버리지 않고 있었다. 웅얼웅얼하는 발성 때문에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가 쉽진 않았지만 구사하는 어휘나 발음이 절대 외국인 수준은 아니었다.

     

그가 전위예술가로 이름을 떨친 건 독일이고, 그 전에 대학을 졸업한 곳은 일본이며 비디오아트로 명성을 얻은 곳은 미국이지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증거는 많다. <프랙털 거북선>, <율곡>, <엄마>와 같이 한국적 색채가 진한 작품들도 있고, 한국인 앞에선 일본어를 사용하는 것도 자제했으며 아예 일본으로 귀화한 형들과 달리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경기보통학교, 그러니까 고등학교 때까지 우리나라에서 공부했으며 신재덕, 이건우와 같은 실력있는 한국인 음악가들에게 받은 개인 교습을 통해 음악적 기초를 다졌다. 특히 그가 졸업논문까지 쓴 작곡가 쇤베르크에 대해 알게 된 건 한국인 선생 덕분이었다.

     

그 시절에 개인 과외를 받았다는 데서 알 수 있듯 백남준은 대단한 부잣집 자제였다. 그의 아버지 백낙승은 중국에서 들여온 비단의 판매를 독점하여 거대한 부를 쌓았다. 어렸을 때 병약했던 백남준은 기사가 운전하는 자가용을 타고 등교하곤 했는데, 오늘날에도 부잣집 자제만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가 상위 0.1% 재벌가의 자식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백남준 편의 저자인 남정호는 그러한 집안의 부유함이 아니었다면 예술가 백남준은 있을 수 없었으리라 단언한다. 홍콩으로, 일본으로, 독일로 여러 번에 걸쳐 유학을 갈 수 있었던 것도 당연히 집이 몹시 잘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부친이 쌓은 부는 일제에 협력한 대가일 가능성이 크다. 그 시절에 친일파가 아니고서는 부자일 수 없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 것 치고는 백남준에게 친일파의 자손이라는 프레임은 거의 씌워지지 않은 편이다. 초등학교 시절 처음 그에 대해 배울 때도, 성인이 되어서도 내가 접한 자료는 모두 그가 비디오아트의 선구자라는 것에만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 백남준은 일본으로 귀화하지 않는 등 가족들과 다른 행보를 보이긴 했지만, 그의 예술적 능력의 원천이 된 고급 교육은 집안의 경제력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공격받을 여지는 있어 보인다. 심지어 백낙승은 생계형 친일이 아닌 적극적 친일을 했기에 그 정도의 부를 쌓았을 것 아닌가. 내가 받았던 교육처럼 우리나라가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라는 식으로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일도 옳다고 할 수 있을지 애매하다.

    

백남준 본인은 자신을 한국인이나 일본인, 미국인 등으로 규정하기보다는 코스모폴리탄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가 <인공위성 3부작> 등에서 보여준 세계인 간의 동시통신과 범지구적인 소통의 메시지는 그가 추구한 정체성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인공위성 3부작의 첫 작품이자 전세계에 그의 이름을 드높인 <굿바이 미스터 오웰>은 제목부터 인류의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을 품고 있다. 조지 오웰의 대표작 <1984>에서는 텔레비전이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디스토피아가 등장하는데, 백남준은 반대로 기술 문명이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인류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굿바이 미스터 오웰>을 만들었다. 그리고 당시 전세계에 영상을 동시 송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기술이었던 인공위성을 통해 작품을 송출했다.

     

AI 시대를 맞이한 현대인이라면 백남준이 만든 로봇 <K-456> 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차르트의 작품번호를 따서 이름 붙인 이 로봇은 백남준의 예술적 동지 중 한 명이었던 엔지니어 아베와 함께 만든 것이다. 백남준은 장난감 가게에서 구입한 무선 조종기로 일부러 조잡한 로봇을 만들어 우스꽝스러운 행동들을 하게 만들었다. 로봇은 거리를 돌아다니며 입으로는 케네디의 연설을 따라하고, 엉덩이로는 콩을 배출했다. 그리고 교통사고로 인해 최후를 맞이했는데, 그 또한 백남준이 의도한 죽음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로봇은 고용 창출 효과가 뛰어나다. 몇 걸음 옮길 때마다 고장나기 때문에 수시로 4-5명의 엔지니어가 달라붙어 고쳐야 한다. 요즘 같은 시절 나의 로봇은 매우 유용하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58862&docId=3574699&categoryId=58872     


<k-456>에 대한 이런 발언을 통해 백남준이 기술 발전을 마냥 낙관적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경계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에게 로봇은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AI의 발전과 그에 비례하여 높아지는 위험성에 대한 여러 가지 논의가 등장하고 있는 지금, 현대인은 이러한 백남준의 휴머니즘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백남준의 예술 세계에 대한 책을 읽고, 영상과 사진으로나마 그의 작품을 접하고 나니 그가 세계적인 예술가로 인정받은 이유를 알겠다. 그는 엄청나게 혁신적이었고 통섭적이었고 창의적이었다. 형식적인 면에서 그러할 뿐 아니라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전 세계인에게 필요한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깨달음과 감동을 주었다. 나는 그의 작품을 통해 친숙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만이 예술의 역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연재가 아니었더라면 난해한 현대예술에 대해 조금이라도 공부할 필요도, 의욕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여전히 기이하고 어렵지만 백남준을 통해 그 낯선 세계의 입구만이라도 들여다 보는 경험을 할 수 있어 유익했다. 언젠가 백남준아트센터나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들러 그의 작품을 실제로 보게 된다면 예전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감상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조금씩 내 내면에도 예술적 소양이 쌓여 가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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