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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Feb 18. 2024

음악은 숭고한 예술이다

클래식 클라우드 열일곱 번째 책, 베토벤

베토벤 편을 집필한 최은규는 뛰어난 음악 칼럼니스트이다. 나는 옛날 네이버 캐스트의 클래식 코너를 통해, 그리고 다른 저서를 통해 그의 글을 먼저 접했다.

     

쉽고 부드러운 문체는 클래식이 난해하다는 편견을 깨게 해주었고, 해박한 음악사 지식을 바탕으로 곁들이는 비화나 일화들은 흥미진진했으며, 바이올리니스트 출신으로서 들려주는 생생한 경험담은 언제나 재미있었다. 대중성과 전문성을 겸비한 보기드문 해설가였다.

     

<베토벤 × 최은규> 편 역시 진지한 의문 하에 쓰인 책임에도 시종일관 평이하고 가뿐하고 친근한 어조를 유지하고 있다. 프롤로그에 등장하는 그의 문제제기는 이것이다.


베토벤은 어렵고 진지하고 복잡한 음악으로 어떻게 큰 성공을 거두었는가?

     

아래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최은규는 그 해답을 사회적, 역사적 요인에서 찾는다. 나는 거기서 몇 년 전에 읽었던 그의 저서 <교향곡은 어떻게 클래식의 황제가 되었는가>를 떠올렸다. 그 책 역시 교향곡이 지금의 위상을 차지하게 된 원인을 사회 변동의 맥락에서 조명하고 있었다.

    

베토벤의 성공에 대한 해석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지만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음악 자체의 특성에 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베토벤의 음악이 어떤 점에서 위대하고, 다른 음악가들과 어떻게 다른지, 어디에 유의해서 들으면 좋을지 더 자세하게 알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보충교재로 사용한 책이 <난처한 클래식 2권 베토벤 편(민은기)>이다.

    

이 글에서는 먼저 클래식 클라우드 책에서 시대적 배경과 연결지어 제시된 베토벤의 성공 요인을 정리하고, 그 다음 베토벤의 음악에 대한 민은기 교수의 분석을 빌려 실어보고자 한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위의 세 작곡가는 오늘날의 대중들도 대부분 이름을 알고 있는 네임드 음악가들이며, 서양 음악사에서 ‘고전파’라고 불리우는 사조의 대표 주자들이다.

     

태어나고 활동한 순서는 빠른 순으로 하이든 – 모차르트 – 베토벤인데, 그중 모차르트가 가장 먼저 요절했으며, 당시 기준으로 수명이 길었다고 할 수 있는 하이든이 그 다음, 제일 어렸던 베토벤이 마지막으로 죽었다.

     

베토벤은 두 선배를 실제로 만났는데, 모차르트와의 만남은 일회성이었지만 하이든에게는 정식으로 음악 수업을 받았다. 그래서 그의 초기작에는 두 선배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역력하다.

     

세 사람은 공존했던 시기가 있을 만큼 나이차가 크지 않았지만, 음악가로서의 정체성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다. 급격한 시대상의 변화 때문이었다. 이를 쉽게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하이든 (수공업 예술가) → 모차르트 (과도기) → 베토벤 (예술가로서의 예술가)

     

하이든이 활동하던 시기의 음악가들은 교회나 궁정에 소속된 장인이나 다름없었다. 종교적 행사나 귀족들의 사교 모임에 필요한 음악을 주문하면 제깍제깍 작곡하여 가져다 바쳐야 하는 신세였다. 당연히 음악가의 창조성이나 예술성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짧은 시간에 다량의 곡을 써내야 했기 때문에 작품 하나하나의 완성도에 신경쓸 겨를도 없었다.

     

모차르트 역시 궁정음악가로서의 시절이 있었으나 자유로운 영혼이자 예술적 지향점이 높았던 그에게 궁정은 갑갑한 새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결국 자유음악가, 즉 프리랜서로 전환했으나 평생 경제적 궁핍에 시달려야 했고 후기 작품은 청중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베토벤은 달랐다. 물론 그도 평생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후원을 원하긴 했으나, 두 선배와 달리 ‘예술가’로서 높은 명성을 쌓았다. 베토벤이 성공한 시기에는 음악가들을 옛날의 기능인으로서가 아닌 천재 예술가로 상정하여 존경하고 숭배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베토벤의 인생과 겹치는 아주 중요한 역사적 사건과 깊은 연관이 있었으니, 바로 프랑스 혁명이다.



    

음악 취향의 변화

     

1782년 태어난 베토벤은 1789년 발발한 프랑스 혁명의 전유럽적인 영향력을 체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혁명의 정신 하에 중산층 부르주아는 성장했고 전통의 지배계층인 왕족과 귀족, 성직자들에게 위기가 닥쳤다.     

베토벤이 활동했던 오스트리아 빈은 보수 세력의 본산이었으나 부르주아에 대한 귀족들의 견제는 존재했다. 책에서 설명하기로는, 베토벤이 빈의 음악계에 진출할 때만 해도 쉽고 가벼운 여흥을 위한 음악이 유행 중이었고 그것이 귀족의 취향이었다.

      

그러나 재력을 갖춘 중산층이 성장하면서 음악의 또다른 수요 계층으로 자리잡자, 귀족들은 졸부들과의 차별화를 위해 새로운, 더 고급스러운 취향을 개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진지하고 엄숙하고 어려운 음악에 대한 선호이다.

     

마침 이는 베토벤이 추구한 음악적 이상과 일치했다. 여기서 민은기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베토벤은 음악이 오락처럼 소비되는 것을 참지 못했습니다. 음악이 편안한 여흥이 아니라 숭고한 예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 <난처한 클래식 – 베토벤> 6p


내가 클래식 음악을 들을 때 느끼는 감상 역시 베토벤의 의도가 관철된 결과라는 걸 이 대목을 읽고 알 수 있었다. 클래식은 길고 정교하고 스케일이 크기 때문에 유달리 집중력이 필요한 대신 느껴지는 쾌감과 감동이 거의 이 세상 것이 아닐 정도로 황홀하며, 연주가들의 실력은 오랜 엘리트 교육으로 인해 일반인들이 범접할 수조차 없는 경지에 올라 있다. 자연히 이런 훌륭한 음악을 들을 때는 오락을 즐기는 자세가 아닌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런데 베토벤 이전에는 음악이 작품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녹음기도 없던 시절이니, 문학이나 미술과 달리 청각적 예술인 음악은 한 번 연주되고 나면 사라진다고 생각했으며 악보에도 저작권이 없었다.

    

베토벤은 그때까지의 관행과 달리 자신이 음악이 영원히 존재할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악보를 출판하는 데 매우 신중을 기했으며 작품번호를 매겨서 엄격하게 관리했다.

     

다행히 빈의 귀족층은 이렇게 엄숙하고 진지한 태도로 작곡한 베토벤의 음악을 이해하고 향유할 수 있는 음악적 소양이 있었다. 민은기 교수의 표현대로, 베토벤은 모차르트보다 고작 10년 늦게 빈에 데뷔했지만 그에게는 선배와 달리 ‘음악 자체에 집중해 줄 청중이 있었다.’

    

특히 베토벤의 중요한 후원자였던 리히노프스키 후작의 장모인 툰 백작부인이 주최하는 살롱은 수준이 높기로 유명했다. 백작부인은 자신의 살롱에 결코 아무나 초대하지 않았으며, 다른 어떤 살롱에서도 볼 수 없는 최고의 공연을 기획했다.

    

그녀의 살롱에서는 소위 ‘피아노 배틀’이 벌어지고는 했는데, 남아있는 기록에 따르면 베토벤은 백이면 백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피아니스트로서의 그의 최대 무기는 즉흥연주로, 이는 악보대로 완벽하게 연주하는 것을 넘어서 즉석에서 제시된 주제에 따라 화려한 변주를 선보이는 능력이다. 춤으로 치면 짜여진 안무가 아닌 ‘프리스타일 댄스’ 랄까.

     

빈 상류사회에서 베토벤은 즉흥연주의 최강자로 드높은 명성과 인기를 누렸다. 콧대높은 귀족들이 베토벤에게 제발 피아노를 연주해달라고 매달리는 일까지 있었다고 하니, 피아니스트로서 그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베토벤은 연주자를 넘어 작곡가로서 인정받고 싶어했다. 작곡가로서의 출발 역시 귀족 후원자들의 비호 아래에 있었다. 귀족들의 보호가 아니었다면 베토벤의 혁신적이고 개성 강한 음악이 대중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대중들은 베토벤의 음악에 서서히 익숙해졌고 베토벤은 귀족과 대중 양측 모두에게 인정받는 예술가가 될 수 있었다.

    

작곡가로서의 베토벤은 남들의 취향에 맞추기보다 자신의 취향을 강요하는 완고함이 두드러졌지만 그 고집의 끝은 해피엔딩이었다.


베토벤의 음악

     

소리가 음악으로 들리려면 일단 ‘규칙성’을 느껴야 한다. 베토벤은 그때까지 통용되던 규칙을 응용하고 확장하고 새로 썼다. 교향곡을 예로 들면, 베토벤은 각 악장을 마치 하나의 문학작품처럼 논리적이고 유기적이고 통일성 있게 연결했다.

      

예를 들어 <합창 교향곡>의 4악장 초반에는 1, 2, 3악장의 동기(곡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가 차례로 반복되는데, 그럴 때마다 현악기의 거친 연주가 등장하여 그것을 부정한다. 새로운 선율, 즉 우리가 잘 아는 환희의 테마가 나오고 나서야 바로 이거야, 라고 말하듯 반갑게 화답한다. 이런 식으로 베토벤은 동기를 비롯한 모든 소리와 음표들을 치밀하게 배치하여 음악에 구조적 탄탄함을 부여했다.

     

아울러 <합창>의 4악장은 교향곡과 성악의 결합이라는, 그때까지 시도된 적 없던 독특한 조합으로도 유명하다.     


앞서 설명한 과정을 거쳐 등장한 환희의 선율은 처음에는 아주 작게, 아주 낮게, 더블베이스와 첼로의 연주로 제시된다. 그 다음엔 비올라가 가세해 한 단계 높은 음역으로 등장하고, 세 번째로 드디어 바이올린이 존재감을 뽐낸다. 마지막에는 금관과 팀파니가 가세하여 마치 행진곡과 같은 위풍당당한 기세로 연주한다. (나는 이 네 번에 걸친 변주가 너무 좋다. - 45분 10초부터)

    

그 후 갑자기 감미로운 선율이 사라지더니 왁자지껄 요란한 불협화음이 한바탕 난리를 치다가, 예상치 못하게 사람의 목소리가 솟아오른다. 바리톤의 독창이다. 이후 성악 파트는 2중창, 4중창, 대편성 합창 등 다양한 형태로 환희의 선율을 변주한다.

     

4악장에서 보여주는 성악과 기악의 어우러짐은 극도의 감동과 황홀감을 선사한다. 내가 가장 감탄하며 듣는 구간은 53분 15초 ~ 55분 35초 구간으로, 관현악의 어마어마하게 치열한 연주와 잠깐의 공백, 뒤따라 터지는 거대한 합창이 폭풍같은 전율을 몰고 온다.

      


이번엔 피아노 소나타를 통해 베토벤의 혁신성을 살펴보자. 그는 <월광 소나타>의 1악장을 당시에 통용되던 소나타 형식이 아닌 환상곡 형식으로 작곡하는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

    

소나타 형식은 하이든과 모차르트를 거쳐 확립된 고전파의 상징과도 같은 엄격한 악상 전개 방식으로, 특히 1악장만큼은 소나타 형식으로 작곡하는 것이 관례였다. 반면 환상곡은 일정한 형식 없이 악상을 자유롭게 펼치는 음악을 뜻하니, 베토벤은 그때까지의 작곡 문법을 과감히 거스른 것이다.

     

그밖에도 베토벤은 당시에 통용되던 화성법에 통달하되,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자기만의 개성적인 방법을 개발하려 골몰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동시대 다른 작곡가들의 음악보다 조바꿈이 훨씬 자주 일어나고, 불협화음의 사용도 빈번하다.

     

나는 처음에 베토벤의 음악이 그렇게 파격적이라는 데 동의하지 못했다. 후대 낭만주의 음악 중에 훨씬 더 길고 어렵고 자유롭고 특이한 곡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후대의 작곡가들이 베토벤의 혁신성을 본받았기 때문이었다.

     

리스트와 바그너 등 낭만주의 음악가들은 더욱 격한 형식과 복잡한 화성을 사용했어요. <합창 교향곡>에서 시도된 성악과 기악의 결합은 말러에게, 옛날 음악을 발굴하는 움직임은 신고전주의 음악가들에게 이어졌죠. 한 사람이 음악에 이렇게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례는 아직까지도 베토벤이 유일합니다. - <난처한 클래식 – 베토벤> 282p

    

인용문에서처럼, 베토벤 이후의 작곡가는 그 누구도 베토벤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현대에 교향곡이 예전처럼 많이 작곡되지 않는 이유로 베토벤이 해당 장르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기 때문에, 그보다 더 뛰어난 교향곡을 쓰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을 정도다. 베토벤 이후로 중요한 교향곡을 쓴 작곡가들이 하나같이 베토벤의 교향곡 개수인 9개를 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신기한 우연이다.

    

마지막으로 <베토벤 × 최은규> 편에서 중요하게 언급된 작품 몇 가지를 더 들어본 후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긴 곡 중에서 꼭 들어봐야 할 ‘주제’ 구간을 표시해두었으니 그 부분만이라도 들어보기를 권한다.

    

피아노 협주곡 <황제>  (2분 40초까지)

        

내게는 이탈리아의 명피아니스트 마우리치오 폴리니가 칼 뵘의 빈 필하모닉과 협연한 <황제> 음반이 있다. 예전에 음원으로 자주 듣곤 했던 <황제>와는 완연히 다른 매력이 있는 음반인데, 음원은 누구의 연주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음원 연주는 엄청난 파워와 웅장함이 돋보이는 호쾌한 연주(그래서 에밀 길렐스의 것이었나 싶다)였던 반면 폴리니의 음반은 귀족적인 기품이 넘치는 연주다. ‘황제’의 미덕으로 권위보다는 품위와 우아함을 강조하는 듯하다. 음표들이 찬란한 햇살처럼 쏟아지며 눈부신 빛을 발한다. 이런 천상계의 연주를 감상한다는 것은 내가 누리는 최고의 사치라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한다.

     

참, <황제>는 화려한 1악장과 대비되는 2악장의 서정성이 유명하다. 아름다운 발라드를 연상시키는 2악장의 선율을 감상하려면 22분 50초부터 들으면 된다.

          



피아노 3중주 <대공>  (3분 27초까지)         

 

베토벤의 후원자 중엔 루돌프 대공이라는 이가 있었다. 그는 음악적 소양이 뛰어난 훌륭한 후원자였기에 베토벤은 이 피아노 3중주 곡을 그에게 헌정했다. 제목처럼 매우 고상하고 품위가 넘쳐흐르는 음악이다. 특히 1악장의 주제는 언제 들어도 차분하고 잔잔하다.

      

피아노 3중주는 피아노 + 바이올린 + 첼로의 3악기로 이루어진 구성인데 어제 <대공>을 들으면서 가장 귀에 잘 들어온 소리는 의외로 첼로였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이라는 ‘센터’ 들을 받쳐 주기에 상대적으로 수수해 보이지만, 풍성하고 따스한 저음이 듣는 이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는 듯했다.


            

교향곡 7번

      

베토벤의 교향곡은 짝수보다 홀수가 대중적으로 유명하다. 3번 영웅, 5번 운명, 9번 합창 등 걸작의 향연이다. 7번은 익숙한 두 글자 제목은 달고 있지 않지만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매우 인기가 좋다.

     

리듬이 넘쳐나는 이 곡은 드라마나 영화에 삽입되어 일반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일본의 인기 음악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에서 중요한 레퍼토리로 등장했고, 아카데미 작품상을 탄 영화 <킹스 스피치>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다.

     

<킹스 스피치>의 주인공은 영국의 국왕 조지6세로,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어 연설을 기피한다. 언어치료사의 도움으로 꾸준히 훈련과 교정에 매진하던 그는 일생일대의 중요한 연설을 해내야 하는 임무를 맡는다. 나치에 맞서 용감히 항전하자는 내용의 대국민 연설이다.

     

몹시 긴장한 채 마이크 앞에 선 조지6세가 입을 여는 순간, 베토벤의 교향곡 7번 2악장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2악장의 슬픈 리듬과 처연한 선율은 연설 내용과 함께 비장함의 미를 극대화한다.

    

나는 이 장면을 보는 순간 음악이 어쩜 그토록 잘 어울릴 수 있는지 놀랐다. 마치 이 영화의 OST가 될 것을 염두에 두고 작곡한 것만 같았다. 콜린 퍼스의 명연기에 베토벤의 명음악이 더해진 데다 불변의 역사적 사실이자 스포일러인 연합군의 승리라는 위대한 서사가 이어지니, 이 씬은 명장면이고 명연설일 수밖에 없다. 

 

해당 장면을 인용한 해설 영상 (1분 35초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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