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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Mar 10. 2024

읽으면 좋지만 읽지는 못할 듯한 고전

클래식 클라우드 열아홉 번째 책, 단테

국내 유수 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 목록에서 단테의 <신곡>이 차지한 자리는 한 행을 넘어선 세 행이다. 지옥 편, 연옥 편, 천국 편이 각각 따로 출간되기 때문이다. 그토록 높은 명성을 자랑하는 <신곡>을 읽어보고 싶다는 욕망이 없지 않았지만 그 엄청난 분량은 쉽사리 도서관 대출대에 책을 올려놓지 못하게 했다.

     

게다가 인터넷의 고마운 어느 독서가 분이 지옥 편은 웬만한 고어물 저리 가라 하는 잔인성을 자랑한다고 귀띔해 주신 덕에 <신곡>을 읽고 싶은 마음은 멀찌감치 사라졌다. 언젠가 열린책들 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을 다 읽고 말리라 다짐했었지만 무릇 지적 허영심보다 정서적 평온함이 더 중한 법이다.

     

원전을 읽을 생각이 없다면 간접적으로라도 배워야 한다. 클래식 클라우드 단테 편은 그래서 건너뛰고 넘어갈 수 없었다. 민음사 판 <신곡>을 번역한 박상진 교수님이 집필을 맡은 만큼 전문성과 신뢰도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책은 그리 두껍지 않은 두께와 평이한 문장에도 독해가 결코 쉽지 않았으니, 생소하면서도 자기들끼리는 비슷해서 헷갈리는 성당 이름이 열 개가 넘게 등장하는 데다 13세기 피렌체의 정치 상황에 대한 설명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테에 관한 한 빠뜨려서 안 되는 사항이라 하더라도 800년 후 이국의 독자인 꽤나 읽어내기 힘든 부분이었다.

     

<신곡>에서 단테는 지옥 – 연옥 – 천국 순으로 내세를 탐험하게 되며 각 단계에서 다양한 인물들을 만난다. 그중엔 작가와 현실 세계에서 관계를 맺은 동시대의 실존 인물도 있고, 문학작품 속에 존재하는 허구의 인물도 있으며 고대 그리스·로마의 정치가나 사상가처럼 오래전에 죽은 사람들도 있다. 누가 되었든 현대인에게는 낯설기 그지없는 이들이므로 주석과 해설은 필수다.

     

일단 단테가 어디서 누구와 만나고, 어떤 의미의 대화를 하는지를 알고 나면 이해는 훨씬 쉬워진다. 풍성하게 사용된 비유와 상징이 그때서야 눈에 들어온다. 인용된 <신곡>의 구절들을 읽자니 작년 10월 연재를 시작한 직후 접했던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떠올랐다. 소설이 아닌 시나 희곡의 형식을 띤 것과 다채로운 묘사와 메타포가 가득하다는 점이 비슷하다. 현대의 작가들은 잘 취하지 않는 방법이지만 이런 스타일을 모방해 글을 쓴다면 예스러운 분위기를 낼 수 있을 듯하다.

     

하늘과 땅이 서로 손을 잡았던, 그래서

나를 오랜 세월 동안 쇠약하게 만든,

거룩한 시가 언제라도 일어난다면,

     

내가 양으로 잠든 포근한 우리 밖으로

쫓아낸 잔악한 마음, 싸움을 거는

늑대들을 적으로 삼아 승리를 거둔다면,

     

그때 나는 다른 목소리와 다른 양털을 지닌

시인으로 돌아가리라, 그래서 내

세례의 샘에서 모자를 쓰리라.

「천국」 25곡 1~9행, 45p

          

“아, 당신이 세상으로 돌아가서

길고 긴 길에서 휴식을 취하게 되거든,

    

나를 기억해 주세요! 나는 피아라고 합니다.

시에나가 날 만들었고 마렘마가 날 파괴했으니,

그전에 나와 결혼하여 보석으로

     

반지를 끼워주었던 그자가 잘 알고 있다오.”

「연옥」 5곡 131~136행, 114p

          

단테와 대화를 나누는 인물들의 사연에 반응할 수 있게 되면 신곡 읽기가 의외로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백 명의 인간이 저마다의 개인사를 풀어내고, 단테는 그것을 주의 깊게 듣고 동조와 반박, 연민 등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내가 단테라면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해줬을지 상상하며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 어떤 해설과 분석을 통해서도 내가 진정으로 공감할 수 없을 주제가 있으니, 단테가 <신곡>을 쓴 이유, 아니 더 나아가서 삶의 이유였을 종교적 구원을 향한 열망이다.

     

현대인이자 동양인이자 무신론자인 나는 기독교의 언어로 쓰인 이 작품의 심원한 정신을 오롯이 이해하지 못한다. 영적인 구원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본 적이 없기에 신의 섭리에 도달하고 싶어 했던 중세인들의 간절한 마음을 상상하고 그려볼 뿐이다.

      

같은 21세기 사람이며 무교를 신봉하는 이일지라도 서양 사람들은 단테의 메시지를 더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오랜 역사를 통해 뿌리내린 기독교적 세계관이 과학이 지배하는 시대에도 그들의 인식과 정서와 문화를 틀어쥐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시대를 초월한 고전으로서의 <신곡>의 가치를 종교적 차원에서 실감하는 것도 그들에게는 가능한 일일 테다.

     

내게 흥미롭게 다가오는 위대함은 <신곡>이 중세 유럽의 학문과 풍습의 보고이자 그리스·로마 시대 고전이 망라된 저작이라는 점이다. 심지어 당대의 자연과학 수준까지도 드러나 있는데, 르네상스의 지식인들이 대부분 그러했듯 단테 역시 문필가이자 철학자이자 작가이자 자연철학자였기 때문이다.

    

또 다른 중요한 정체성은 현실의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정치가로서의 단테다. 실천적 지식인을 지향한 그는 교황파와 황제파 간 벌어진 전쟁에 참여했으며 공직자로서 상당히 높은 지위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혼돈한 피렌체의 정계에서 패배해 죽을 때까지 망명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전 생애에서 망명 기간이 무려 1/3에 달한다고 하니, 얼마나 크게 졌는지 알 만하다.

     

예전 마키아벨리 편에서도 느꼈지만 동서양을 통틀어 위정자들이 실각하여 망명이나 낙향 등 정치적 죽음을 맞았을 때, 인문학적 창조력은 도리어 만개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마키아벨리와 단테가 각각 <군주론>과 <신곡>이라는 걸작을 써낸 사실에서 정약용의 강진 유배 생활이 떠오른다.

     

단테와 신곡에서 연상한 다른 작가는 또 있다. 약 500년 뒤 독일에서 태어난 괴테라는 후배다. 오래전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었었는데, 지금 <신곡>의 줄거리를 알고 나자 파우스트의 그것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후자가 전자의 영향을 받은 것이겠다. 구원이라는 테마와 주인공을 구원으로 이끄는 고결한 여인, 그리고 그녀에 대한 이상적인 사랑이라는 주제의식에서 유사성이 느껴진다.

    

단테의 그녀는 베아트리체, 파우스트의 그녀는 그레트헨이지만 나는 파우스트를 다시 뒤져보기 전까지는 이름까지 같은 줄 알았다. 무식하다는 핀잔을 들을 각오를 하고 고백하건대 나는 가끔 단테와 괴테를 혼동하곤 했었는데, 이제 다시는 그러지 않을 자신이 있다. ‘테’라는 음절 하나가 내가 그분들을 헷갈려 한 유일한 이유가 아니라는 사실로 위안을 삼고 있다.



               

네 달 가까이 읽어 온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에서 단연코 가장 자주 등장했던 나라가 단테의 고국 이탈리아다. 당연히 이번 편에서도 이전에 몇 번이나 소개되었던 피렌체의 두오모와 베키오 다리의 사진이 실려 있어 반가웠다. 이탈리아는 고사하고 지중해 근처에조차 발 한 번 내디딘 적 없지만 내적 친밀감을 착실히 쌓아가고 있다. 새삼 그 나라의 문화적 저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닫는다.

     

그 유서 깊은 땅을 단테의 행보를 따라 누비는 박상진 교수님의 여정 또한 빛이 난다. 이런 고급스러운 여행기를 쓰려면 난 몇 년 동안 어떤 노력을 얼마나 기울여야 할지 고민하며 저녁나절을 시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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