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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Mar 25. 2024

북구의 모나리자가 전해주는 이야기

클래식 클라우드 스물한 번째 책, 페르메이르

페르메이르라는 이름을 보고 나는 아직도 모자란 스스로의 교양을 탓했다. 그동안 등장한 거장 중 페소아를 제외하면 들어보지도 못한 분은 없었으니 페르메이르는 이름만으로 나를 움츠리게 한 두 번째 인물이었다. 대체 어느 분야의 누구이신지 알아보려 검색창에 다섯 글자를 쳐 넣자 곧바로 어떤 그림이 모습을 드러냈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베르메르였구나! 페르메이르라는 네덜란드어 발음보다 영어식의 베르메르에 익숙해져 누군지 전혀 감도 잡지 못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얼굴을 보고 그 즉시 알아차렸다. 이번 주인공이 오늘날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를 그린 화가라는 사실을.

     

도서관 서가에서 페르메이르 편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책등이 검은색에 가까워 양옆의 책들과 구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침내 그것을 발견하고 꺼내 들자, 이제까지의 클라우드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표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페르메이르의 작품이 분명했다. 그림 왼쪽에 드리워진 커튼은 책등까지 휘감고 있었고 검은빛에 가까운 그 어두운 색은 고급스러운 미감을 자아냈다. 대조적으로 가운데에서 환한 빛을 받으며 서 있는 푸른색 옷을 입은 여인은 노란색 책을 들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미술에 문외한인 나지만 검은빛과 푸른빛, 노란빛이 이끌어내는 아름다움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파랑과 노랑은 베르메르가 매우 즐겨 사용한 색깔이라고 한다. 보색에 가까워 잘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던 두 색이 전혀 위화감 없이 품위 있게 조화를 이루는 모습에, 나의 고정관념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동안 읽어 온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중 화가를 다룬 편으로는 페르메이르가 네 번째다. 클림트, 뭉크, 모네라는 훨씬 더 명성이 높은 화가들의 작품을 먼저 보았지만 내게는 이번 페르메이르의 그림들이 가장 아름다워 보였다. 이들 중 제일 이른 시기의 화가이기에 작품에 파격적인 시도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 주된 이유이지만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그림 하나하나에 담긴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전해주는 메시지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페르메이르의 작품은 35점에 불과하므로 그의 작품 대부분이 책 본문에서 다뤄졌다. 나는 그중에서도 그림과 이야기가 특히 기억에 남는 몇몇을 추려내어 이곳에 메모해 두고자 한다.



     

우유 따르는 하녀


     

페르메이르가 활동했던 17세기 네덜란드 사람들의 주된 종교는 칼뱅 파였다. (가톨릭 집안 출신인 아내와 결혼하기 위해 개종한 페르메이르를 보면 가톨릭 신자가 아예 없진 않았다) 잘 알려져 있듯 칼뱅은 전통적인 가톨릭 교리와 달리 세속적 직업에 종사함으로써 얻는 부를 터부시 하지 않았고, 성실하고 근면한 노동은 신의 뜻을 긍정하고 실천하는 행위라고 보았다. 매사에 근검절약하는 삶은 그 자체가 깊은 신앙심을 상징했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구매력을 지닌 시민계층은 금욕주의 정신을 일깨워 줄 수 있는 그림을 원했을 것이고, 페르메이르가 하녀의 노동하는 장면을 그린 것도 수요자들의 니즈에 맞춘 결과였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머리를 정갈하게 틀어 올리고 성긴 옷을 입고 묵묵히 단지에 우유를 따르는 하녀의 표정이 매우 지쳐 보인다. 소박하다 못해 질박한 부엌과 푸석하고 딱딱해 보이는 빵까지, 잘못하면 우중충하기만 한 그림이 될 뻔한 작품을 진한 푸른색 앞치마가 살렸다. 페르메이르는 짙고 선명한 파랑을 위해 금보다 비쌌던 천연 안료 라피스라줄리를 사용했다. 아마 저 앞치마도 그 귀한 안료로 칠했을 것이다.

     

열린 창가에서 편지를 읽는 여인


     

그림을 보자마자 전에 자주 봤던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어느 미술사 책에서 보았을 것이다. 왼편에 창이 있고 가운데에 여인이 서 있으며 그 뒤에 빈 벽이나 그림으로 장식된 벽이 자리한 구도는 페르메이르 작품의 특징이다. 실제 화가의 스튜디오가 저런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연구자들은 말한다. 방의 정경이 아담하고 고요하다. 여인이 편지를 읽는 데 방해가 되는 소음이나 소동 따위는 전혀 없었을 터이다.

    

델프트 풍경


     

델프트는 암스테르담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시이며 페르메이르가 나고 자란 곳이다. 그는 호이카더라는 곳에서 운하 건너편으로 보이는 델프트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는데 지금도 호이카더에 가면 그가 그림을 그린 자리가 표시되어 있다고 한다.


책에 실린 그곳의 사진과 페르메이르가 그린 <델프트 풍경>을 비교해 보니 300년 전과는 너무 달라져 있어 누가 말해주지 않으면 같은 곳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교회의 첨탑과 운하의 물결만은 그 자리, 그 모습 그대로여서, 오래전 그곳에 페르메이르라는 화가가 살았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해 주었다.


한참 동안 벤치에 올라서서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는 저자의 심경에 공감했다. 한 위대한 화가가 밟았던 땅을 비록 긴 세월이 흐른 후이지만 똑같이 따라 밟아보는 느낌은 분명 오묘하고 신기할 것이 틀림없다. 그림 속 운하도, 사진 속 물결도 잔잔하고 평화로웠다. 페르메이르도, 책을 쓴 저자도 그 고즈넉함이 좋아 그 자리에 오래도록 머물렀을 것이다.

    

진주 목걸이를 한 여인


     

이 그림 속 여인은 한눈에 봐도 부유해 보인다. 윤기가 흐르는 노란색 바탕에 두터워 보이는 털을 덧댄 고급스러운 옷을 입었다. 어여쁘게 치장한 머리는 동그스름한 두상을 돋보이게 하고 귀 밑에서 빛을 받아 반짝이는 귀걸이는 갸름한 턱선을 강조한다. 이미 충분히 아름답지만 더 예뻐지고 싶어 하는 여성의 욕망 때문일까, 진주 목걸이까지 걸고 거울에 비춰보고 있다.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지만 소녀는 아닌 듯하니, 이제 막 결혼한 새댁 정도 될까. 여자라면 누구나 해 보았을 동작을 하고 있는 주인공 덕에 친숙함과 귀여움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편지를 읽는 푸른 옷의 여인

     

저자 전원경은 개인적으로 한창 힘든 시기를 겪은 후에 이 그림을 관람하고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타국생활과 공부에 지친 작가의 마음에 그림이 건넨 무언의 말이 크나큰 위로가 되어준 것 같다. 그림 속 여인은 먼 항해에 나선 남편이 보낸 편지를 읽고 있다. 편지에 빨려 들어갈 듯 진지하게 집중한 모습에서, 몹시 기다리던 소식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책날개에 소개된 전원경의 커리어는 독자인 나로서는 부럽기 그지없는 이력이다.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런던 시티대학교 대학원에서 예술비평 및 경영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글래스고대학교에서 문화콘텐츠 산업을 연구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걸어온 길은 내가 동경하는 길 그 자체다. 그도 마흔의 나이에 박사 과정을 밟는 일에 적잖이 두려움을 느꼈다고 적고 있지만, 그전에 이미 석사가 있었고 결국 박사도 해냈다.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고 대단한 학력을 갖춘 분도 그림을 보며 눈물을 흘릴 정도로 마음의 고통이 심했다니, 믿기지 않았다.


학자는 그림에서 깊은 그리움을 읽었을 것이다. 그리움과 기다림,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작은 희망. 작은 그림 속의 더 작은 여인의 옆얼굴과 잔잔한 표정에서 그 복잡한 감정들을 모두 읽어내고 공감하고, 자신의 지난 시절을 돌이켜 보며 저 이도 비슷한 고락을 느꼈겠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 흘린 게 아닐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저 말간 얼굴을 보면 느낌이 묘하다. 예뻐 보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그다지 안 예뻐 보이기도 한다. 확실한 것은 생동감이 철철 넘쳐흐른다는 것이다. 기대감에 차 있는 듯 살짝 들뜬, 미소를 띨락 말락 하는 저 표정은 현대의 실력 있는 포토그래퍼가 나서도 포착하기 힘들 듯한 미묘함을 품고 있다. 마치 소녀가 바로 내 앞에 서서, 내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걸 듣고, 왜요? 하면서 돌아보는 것 같다.

     

99년도에 슈발리에라는 한 미국 작가가 이 그림이 그려진 경위를 상상해 <진주 귀고리 소녀>라는 소설로 발표했다. 2003년에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도 개봉했다. 호기심이 일어 이 책을 덮자마자 바로 영화를 찾아 감상했는데, 의외로 문외한인 나조차도 아는 배우들이 여럿 등장해 반가웠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그림의 주인공인 소녀 그리트 역엔 스칼렛 요한슨, 페르메이르 역에는 콜린 퍼스. 그리트를 좋아하는 푸줏간집 아들내미 역은 킬리언 머피.


홍보문구는 너무 아름다워 슬픈 사랑 이야기 어쩌고였지만 솔직히 아름답고 슬픈 사랑 이야기는 아니고, 차라리 예술혼에 희생된 소녀의 순수한 마음, 혹은 그러고도 자존감을 회복한 소녀의 당당함을 내세우는 편이 더 나을 듯했다. 아카데미 미술상, 의상상에 노미네이트 되었다더니 역시 17세기 유럽의 의복과 가구, 장신구 등을 재현한 섬세한 미술이 돋보였다. 예술가의 전기를 다룬 영화나 시대극을 좋아한다면 추천할 만하다.

     

편지를 쓰는 여인과 하녀


    

편지를 쓰고 있는 여인의 저 단정한 자세에 감탄했다. 편지 쓸 일이 거의 없는 요즘은 물론이고 한창 필기를 많이 하던 학창 시절에도 저렇게 다소곳하게 글씨를 써 본 적이 없다. 악필을 교정할 때 책상 앞에 걸어두고 연습하면 마법같이 글씨가 얌전해질 것 같은 그림이다.


다른 통신 수단이 전무했던 시절, 사람들이 편지에 들이는 정성이 얼마나 갸륵했는지 엿보인다. 저자의 설명으로는 금욕주의에 물든 저 시절 네덜란드에서 남녀 간의 연애를 나타낼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그림 소재 중 하나가 편지라고 하지만, 나는 저 편지의 상대가 연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로맨틱한 마음 대신 존경과 감사를 담아 부모님이나 스승에게 보내는 편지일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 편이 저 정숙한 자세와 더 잘 어울린달까.

     

레이스를 뜨는 여인


     

앞서 언급한 신성한 ‘일’이 다시 드러나는 그림이다. <우유를 따르는 하녀>에서 일하는 이는 하녀였지만 이 그림에서 노동하는 이는 그보다 지위가 높은 여인이다. 훨씬 질이 좋아 보이는 옷과 잘 단장한 머리모양을 보면 알 수 있다. 고개를 잔뜩 숙이고 레이스 뜨기에 열중인 모습을 그린 데서 노동을 긍정했던 당시의 도덕관념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페르메이르 편을 읽고 예술적 감동 못지않게 도덕적 교화를 강하게 받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심지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영화를 보고서도 비슷한 감화를 받았다. 그림과 책과 영화를 통해 나는 지금의 사회가 노동의 가치를 지나치게 폄하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현명하게 지출하고, 검소한 생활을 한다는 당연한 도덕법칙이 요즘 세상에선 전봇대에 나붙는 전단지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다. 착실하게 근무하는 직장인들은 무시당하는 반면 태어날 때부터 부의 세습이 예정된 금수저나 부동산이나 비트코인 등으로 일확천금을 얻은 이들은 동경 어린 시선을 받는다. 너도나도 주어진 일을 책임감 있게 해내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적게 일하고 많이 벌지, 어떻게 하면 남에게 자랑할 만한 소비를 할지 고민한다.


물론 페르메이르 시대의 네덜란드와 지금의 우리나라는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상황이 전부 다르지만, 정직한 노동과 그 대가인 월급의 가치를 경시하는 풍조는 바람직하지 않다. 어차피 금수저보다 흙수저가 월등히 많고, 성공한 사업가보다 영세한 자영업자와 평범한 직장인이 절대다수 아닌가. 이런 현실에서 노력 없이 부를 차지하는 듯한 극소수의 사람들만 우러러보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하루하루를 보잘것없이 여겨봤자 자신에게 득 될 것은 없다. 이자소득이나 양도소득이 있다면 당연히 좋겠지만, 근로소득 역시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다.

     


     


페르메이르가 남긴 작품들 대부분은 경매에 넘어갔고, 전 유럽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지금은 미국 메트로폴리탄과 영국 내셔널갤러리, 네덜란드 국립미술관, 독일 드레스덴 알테 마이스터, 빈 미술사 박물관 등이 저마다 그의 작품을 소장 중이며, 가장 유명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헤이그의 하우리츠슈이츠 미술관이 보유하고 있다. 세계의 유명 도시 상당수가 페르메이르의 그림을 가지고 있으니 어딜 가도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셈이다.

     

페르메이르의 작품은 실제로 보면 생각보다 너무 작은 크기에 실망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러니 만약 여행 중 그의 그림을 볼 기회가 생긴다면, 미리 작다는 사실을 알고 가는 것도 좋겠다. 그 작은 액자 앞에 서서 그림이 전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전원경 작가와 나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해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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