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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Mar 18. 2024

홈즈를 읽으며 생각한 온갖 이야기들

클래식 클라우드 스무 번째 책, 코넌 도일

2002년은 월드컵의 해만은 아니었다. 추리소설의 해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셜록 홈즈 전집에 이어 아르센 뤼팽 전집,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이 줄줄이 세상의 빛을 보았다.

     

선두 주자는 셜록 홈즈 전집을 출간함으로써 추리소설 붐을 몰고 온 황금가지 출판사였다. 황금가지에서 나온 전집은 심플하고 세련된 양장 디자인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들의 홈즈나 크리스티는 타사의 번역본을 모두 제치고 대표 전집으로 자리 잡는 데 성공했으나, 뤼팽은 달랐다. 까치글방에서 펴낸 아르센 뤼팽 전집은 20권 분량을 단 한 명의 전문가이자 뤼패니앵(뤼팽의 열정적인 팬)인 성귀수가 맡음으로써, 번역의 질이 황금가지 판을 능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국내 최고의, 아니 세계적으로 자랑스러운 전집으로 평가받는 성귀수의 번역본은 현재는 아르테 출판사에서 결정판 아르센 뤼팽 전집이라는 이름으로 나와 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독후감을 연재 중인 이 클라우드도 아르테의 시리즈인데, 아직 거장의 목록에 모리스 르블랑이 없다. 혹시 르블랑이 다뤄진다면 필자는 당연히 성귀수 번역가여야 하지 않을까.)

     

서양권의 고전 작품들이 말끔하게 단장한 모습으로 독자들을 유혹하던 그때, 나 역시 그 환상적인 세계에 강렬하게 매혹되었다. 초등학생 시절 동네 대여점에서 빌려보던 추리 문고나 소년소녀세계문학 전집에 속해 있던 한두 개짜리 단편에 잔뜩 감질이 나 있었던 것이다. 운명 같은 2002년, 도서관에서 바라 마지않던 홈즈와 뤼팽의 전집을 발견한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앞으로도 계속, 아주 오랫동안, 어쩌면 평생 추리소설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란 것을.

    

아마도 토요일이었을 것이다. 방과 후에 교복을 입은 채로 버스를 타고 도서관에 가서, 홈즈가 등장하는 네 개의 장편 중 한 권을 서가에서 꺼내 열람석에 자리를 잡았다. <바스커빌 가문의 개>였다. 딱딱한 나무의자에 불편한 교복 치마를 입고 앉아 독서를 시작한 나는, 세 시간 동안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앉은자리에서 끝장을 봤다. 그때의 전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거대한 흥분에 심장이 통째로 쿵쾅쿵쾅 뛰었다. 이거구나. 진짜 셜록 홈즈는 이런 것이구나.

     

결말에 등장하는 허연 장막 같은 안개가 내 눈앞에 깔리는 듯했다. 그것은 금방 몸을 타고 올라와 머릿속을 온통 뒤덮었다. 살아 숨 쉬는 도일의 문장은 금방이라도 다시 자욱한 안개를 뿜어낼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목격하는 것이다. 지옥의 개를. 그 악마 같은 눈과 작열하는 주둥이를.

      

이후로는 <바스커빌의 가의 개>를 한 번도 다시 읽지 않았다. 결말을 알고 보면 시시할 것 같아서가 아니었다. 너무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라서, 내게 격렬한 독서의 경험을 안겨 준 책이라서 아끼고 싶어서였다. 반복해 읽으면서 점점 감동이 옅어지는 것,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 작품은 언제까지고 내게 전설로 남아있어야만 했다.

    

그렇게 아끼고 아끼다 보니 22년이 흘렀다. 이번 연재를 위해 생전 두 번째로 <바스커빌 가의 개>를 다시 읽었다. 그때처럼 황금가지 판으로, 백영미 번역가의 고풍스러운 어휘와 패짓의 오리지널 삽화를 감상하며 독서를 즐겼다.

     

그간 수많은 작가의 다채로운 추리소설들을 읽어 왔기에, 그리고 아마도 내가 어른이 되었기에 바스커빌 가의 섬뜩한 전설은 오래전 그때만큼 격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만족스러웠다. 아직도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고, 향수 어린 이야기였다.

     

도일이 홈즈를 죽이고 싶어 했던 것은 잘 안다. 그러나 홈즈는 절대 죽을 수 없다. 내 안에서만 해도 22년 만에 다시 살아나지 않았나. 그의 모험담이 읽히는 한 그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탐정의 원형으로 영원히 존재한다. 그것은 도일이 아무리 부정하고 벗어나려 해도 막을 수 없었던, 창조주를 추월한 피조물의 강인한 생명력이다. (엘러리 퀸을 창조한 미국의 추리소설가 다네이와 리 콤비는, 이렇게 작가보다 탐정이 유명해지는 현상을 피하기 위해 필명을 탐정의 이름과 똑같이 엘러리 퀸으로 짓기까지 했다.)

     


 

이제까지 클라우드 시리즈에 포함된 문학계의 거장은 대부분 노벨상을 수상하거나 인류 역사상 최고의 작가로 손꼽히는 지체 높은 분들이었다. 코넌 도일이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스무 번째 거장으로 선정된 것은 의외였다. 편집부의 가치관이 고루하지는 않다는 생각을 했다.

     

저자 이다혜는 나름 추리소설 마니아라고 자부하던 내가 명함도 못 내밀겠다 싶은 전문가이자 애호가이자 저술가였다. 그가 들려주는 홈즈 이야기, 도일 이야기는 하나같이 신선하고 생생하고 흥미로웠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의 배경에는 영국이 있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자국의 문학적 유산을 한껏 뽐내던 영국이.

     

여행기를 읽어가면서 내 머릿속은 두서없이 떠오르는 온갖 기억과 이미지로 뒤죽박죽이 되었다. 이제까지 읽었던 여러 문학 작품 속 장면들이 같은 테마 아래 뒤엉키고 겹쳐졌다. 그것들은 영국이라는 장소적 배경과 19세기라는 시대적 배경을 공유했다.

     

저자가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본문 속엔 19세기에 유행한 고딕소설을 떠오르게 하는 언급이 있었다. 고딕소설이란 초자연적이거나 공포스러운 요소가 가미되어 있는 소설 양식으로, <바스커빌 가의 개> 외에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여러 작품들이 이러한 요소를 차용했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로테스크한, 고딕 소설의 대표 주자다. <검은 고양이>를 쓴 미국의 포도 마찬가지다. 괴기스러움과는 한참 거리가 있어 보이는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까지도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로체스터 저택에서 제인이 정체 모를 울음소리를 듣고 괴물 같은 형상과 마주치는 장면이 이에 해당한다)

     

본문에 따르면 죽음을 불러오는 개에 관한 괴담은 영국에 드물지 않게 퍼져 있었다고 하는데, 여기서 나는 그 나라가 배출한 또 다른 최고의 베스트셀러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를 읽은 것이 적어도 2000년이었을 테고, <바스커빌 가의 개>를 읽은 것은 2002년이었는데도 왜 진작 두 소설 간의 연관성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의아하다.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에서는 ‘죽음의 개’가 몰고 오는 불길한 운명과 그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미신적인 믿음이 아주 잘 표현되어 있다. 조앤 롤링은 자국에 전해 내려오는 사나운 검은 개의 전승을 알았을 것이고 당연히 셜록 홈즈 시리즈도 읽었을 것이다.

     

스코틀랜드가 유령과 요정의 본고장이라는 설명을 읽고 나니 호그와트가 마법 세계 치고도 왜 그토록 온갖 인간이 아닌 존재들로 가득한 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오래된 학교가 스코틀랜드 어딘가에 위치해 있다고 밝혀진 지는 오래되었다. 오컬트를 좋아하는 나는 스코틀랜드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어졌다.

     

<바스커빌 가의 개>를 읽으며 든 생각인데, 영국은 황무지가 많은 나라일까? 황무지는 이 작품의 배경이자 음산한 분위기를 부여하는 중요한 무대적 장치로, 도일은 엄청난 공을 들여 그곳의 풍광을 묘사했다. 소설에 등장하는 지명인 데번 주 다트무어는 실제로도 황야와 늪지대로 이루어진 지역으로, 도일의 묘사처럼 널따란 벌판에 화강암 바위가 산재한 곳이다.

     

지역은 완전히 다르지만 앞서 언급한 <제인 에어>에도 황무지가 등장한다. 사랑하는 로체스터에게 숨겨진 부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심한 충격과 배신감을 느낀 제인이 저택을 떠나 정처 없이 방황하는 장면이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은 요크셔 주의 황야를 배경으로 쓰인 작품이며, 토머스 하디의 <테스>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장소는 스톤헨지가 늘어선 솔즈베리 평원이다.

     

이런 황야의 이미지들이 영국의 자연환경과 연관이 있을지 궁금해서 찾아보았더니, 위키백과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영국은 제4기 홍적세에 유럽 대륙에서 뻗친 대륙 빙하에 덮여 있었으므로 산지에는 빙식 지형이 많으며, 황토에 뒤덮인 황무지와 습지가 많다.'


더불어 영국의 고산지대 황무지를 ‘무어랜드 moorland’라고 부른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 나라 문학에 황량한 평야의 이미지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도일과 홈즈를 얘기하면서 자꾸 다른 소설을 끌고 오는 이유는 그들이 모두 19세기의 상징과 다름없는 빅토리아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1837년부터 1901년에 이르기까지 70년 가까이 재위한 빅토리아 여왕의 치세에 영국은 국력의 최전성기를 맞았다. 그래서인지 내가 어릴 때부터 듣고 읽고 자란 서양의 옛이야기들은 주로 이 시기의 것이다. 영국뿐 아니라 유럽의 다른 나라나 미국의 작품도 그러하다,

     

일단 덴마크의 안데르센이 19세기 사람이다. 영국 출신 미국 작가인 프랜시스 버넷이 쓴 <소공녀>와 <소공자>는 1888년 즈음의 작품이며, 스위스의 <하이디> 역시 1880년에 발표되었다. 내가 몹시 좋아하는 소설인 조르주 상드(프랑스)의 <사랑의 요정>이나 루이자 올콧(미국)의 <작은 아씨들> 역시 19세기 중반 작품들이다. 앞서 언급한 브론테 자매나 하디는 물론이고 찰스 디킨스도, 브람 스토커도 그 시대 사람들이며,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교통의 발달상을 확인할 수 있는 소설이다. 문학 분야는 아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한 위인 중 한 명인 나이팅게일도 빅토리아 여왕의 치세를 누렸다.

     

그러다 보니 19세기 문학 작품은 내게는 꿈과 낭만의 세계나 다름없다. 지구상에 이미 존재했다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세계의 바깥에 별도로 존재하는 동화의 나라처럼 느껴진다. 코넌 도일 편에서도 언급되듯, 마부와 마차, 실크햇을 쓰고 지팡이를 들고 양복을 입은 남자들, 땅에 끌릴 만큼 기다란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 전보와 증기선, 증기 기관차 같은 당시의 문물들이 겪어보지도, 겪을 수도 없는 판타지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시기가 실제로는 지구상의 모든 이에게 판타지였던 건 아니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내가 느끼는 이런 심상은 이치에 맞지 않다. 제국주의의 세기였으며 노동착취의 시대였다. 어린 시절과 달리 이제는 현상의 뒤편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보다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기가 더 꺼려지는 것은 여전하다. 세상에 고루 존재하는 밝음과 어둠 중에서 전자만을 골라 보고 싶어 하는 이런 습관은 언제쯤 사라질는지.

     

저자 이다혜 역시 코넌 도일의 제국주의적 면모를 꼬집는다. 오늘날까지 고전으로 남은 문학 작품을 남긴 작가들 중 제국주의자는 한둘이 아니다. 아마 그 시기 서양인들은 그 사상이 정말로 정의에 부합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도일도 그런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작가였다. 모르긴 몰라도 홈즈도, 왓슨도 제국주의자였지 않았을까?     

  




그 밖에 도일의 생애에서 신기했던 일화 중엔 북극 탐험, 탐정 활동, 심령술에의 심취 등이 있다. 작가로서 성공하기 전 형편이 넉넉지 못했던 도일은 돈을 벌기 위해 무엇이든 했고, 북극으로 가는 포경선에 탄 일도 그 연장선이었다.

      

또다시 <프랑켄슈타인>이 떠올랐다. 그 유명한 공포소설 속 최후의 장소 역시 북극이다. 200년 된 소설에 북극이 등장한다는 사실에 위화감을 느꼈었지만, 자료를 찾아보니 인간이 북극점에 도달한 것이 20세기 초반일 뿐 북극항로는 진작부터 개척되고 있었다고 하니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겠다. 도일이 포경선을 탄 것이 1880년이니, 그때도 이미 탐험가가 아닌 민간인들까지 북극 근해를 항해하고 다녔던 모양이다.

     

한편 홈즈의 신기에 가까운 추리법을 고안한 사람 장본인이다 보니 도일에게는 실제 사건을 해결해 달라는 시민들의 편지가 자주 날아들었다고 한다. 그는 매번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간간이 홈즈 식의 사고력을 발휘해 중요한 단서나 힌트를 제시했다는 후문이다.

     

문득 현대의 프로파일러들은 어린 시절 홈즈를 읽으며 자랐을지, 지금은 그의 추리 방식을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해졌다. 나는 솔직히 생면부지의 사람을 보자마자 직업과 나이와 출신 등을 맞히는 홈즈의 능력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그의 가장 큰 셀링포인트이자 시그니처라는 사실은 절대 부인할 수 없지만 말이다.

     

도일이 말년에 심령술에 깊이 빠져들었다는 사실은 그의 특이한 성격의 일면을 보여준다. 누구보다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홈즈를 창조한 장본인이 열성적으로 강령회에 다니고 영매와 접촉했다는 일이 상식적으로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본문 설명에 따르면 증거가 있는 일이면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믿어야 한다는 것이 도일의 평소 지론이었고, 실제 심령사진이 존재했기 때문에 강령술을 믿었다는 것이다. 그 사진들이 사기라는 증거에는 눈도 마음도 다 닫아버렸나 보다. 하긴, 애초에 지극히 상식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면 홈즈 같은 희대의 인물을 창조해 내긴 어려웠을 것이다. 왓슨이라면 몰라도.

     

이번 연재가 내게 남긴 것 중 하나는 셜록 홈즈 전집을 소장하고 싶다는 욕구다. 이미 책장이 포화상태이므로 당분간 구매욕은 잘 다독여 얌전히 묻어두고, 홈즈가 등장하는 네 번째 장편인 <공포의 계곡>이나 다시 읽어야겠다. 다 재미있지만 장편 중에서는 3권과 4권이 최고 걸작임을 독자분들에게 알려드리며, (단편은 아마도 취향에 따라 천차만별일 것이다) 긴 감상문을 여기서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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