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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Apr 01. 2024

분유 캔과 거울, 그리고 열쇠

클래식 클라우드 스물두 번째 책, 헤르만 헤세

우리 아이는 분유를 먹고 컸다. 가장 어렸던 생후 6개월까지도 혼합 수유를 했으니 적어도 돌까지는 분유 타기가 우리 부부의 가장 중요한 일과였다. 그러나 어느새 초등학교 입학을 일 년 앞둔 나이가 되자, 소독한 젖병에 40도로 맞추어 둔 물을 넣고 달큰 고소한 향기가 나는 가루를 담던 일은 언제 그렇게 친숙했냐는 듯 잊혔다. <헤르만 헤세 × 정여울> 편은 이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정직하게 말해 헤세 편은 마음 편히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관념과 상념, 고찰의 덩어리였다. 헤세가 밟았고 정여울이 따라 밟아보았던 땅, 그들이 살았고 방문했던 집, 한때 걸었던 길 등이 짤막한 설명과 사진으로만 재현된 탓에 이제까지의 그 어떤 클라우드보다 물리적 감촉이 연했다.

     

무른 실체 위에 헤세와 정여울의 강한 자의식이 있었다. 그것들은 하부구조와는 상관없이 그 자체로 굳세게 존재했다. 헤세의 고민에 정여울의 성찰이 더해지면서 텍스트는 거대한 자기 탐구의 장이 되었다. 그들은 왜 그토록 자기 자신이 되는 것에 집착하는가? ‘개성화’라고 일컫는 그 과업을 위해 정신적 고통을 자처하는 이유가 뭔가? 책을 읽으며 내내 들었던 의문이었다.

    

나 자신을 자의식이 매우 강한 사람이라고 언제나 생각해 왔기에, 이렇게 내면에서 거부 반응이 발생한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나보다도 더 자기 자신에 대해 천착하는 사람들을 한꺼번에 둘이나 만날 줄은 몰랐다.

     

성인이 된 후부터 내게 자의식이란 깎아내야 할 대상이었다. 분유 캔을 따서 한 스푼 떠내면 스푼 위에 소복이 쌓여있는 상아색 가루처럼, 정량 이상의 무엇이었다. 비스듬하게 캔을 덮고 있는 알루미늄 판의 날카로운 모서리에 스푼을 갖다 대고 당겨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기가 탈이 날지도 몰랐다. 깎아낸 가루는 평평하고 가지런하고 정량이었다. 내 자의식도 그런 모습이길 바랐다. 비대한 모습을 사회가 정한 잣대에다 대고 깎아내서, 어느 한 곳도 도드라지지 않는 평면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야 소심한 마음에 탈이 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스푼보다 훨씬 우묵한 국자에다 자기를 넘치도록 퍼담아서 내밀어도 대중에게 사랑받는 사람들이. 난 그들을 질투했다. 개성화에 이르는 길을 보이는 것, 또는 이미 그곳에 도달한 모습만으로도 폭넓은 관심을 받는 것이 부러웠다. 아이유의 ‘팔레트’를 좋아하지 않았던 건 그래서였다. I like it, I’m twenty five, 라고만 노래해도 사람들이 열광하니까. 그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이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으니까.

     

헤세와 정여울이 쏟아놓는 말들은 나의 아픈 곳을 건드렸다.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 힘겹게 깎아 낸 자아를 떠올리게 만들어 불편했다. 다른 사람들과 같아서 나쁠 게 뭐란 말인가? 저들은 왜 저리 모난 돌을 자처하는가? 왜 나처럼 평평해지려 노력하지 않는가?

     

정여울 작가가 털어놓은 ‘조직생활에 맞지 않는다’ 라는 자기 고백을 듣고  비겁한 우월감을 느꼈다. 그와 달리 나는 조직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자그마치 10년 동안이나. 그것이 어른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외부에서 쏟아지던 질타의 시선을 나도 모르게 내면화했다. 책을 읽으며 뱉어 낸 불만 섞인 언사는 어느덧 나도 획일화를 강요하는 사회의 일원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문득 오래된 랩 가사가 떠올랐다. 자신을 바라봐, 모두 똑같은 크기의 젓가락 행진일 뿐이야. 인간을 재는 기준과 잣대는 모두 없어져 버려.




본문에는 헤세의 작품 여러 편이 등장한다. 대중에게 유명한 작품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은 각종 고전문학 전집에 빠지지 않는 필독서이지만 <게르트루트>나 <싯다르타>, <크눌프>,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제목조차 낯설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가 공통적으로 흡입력이 대단했다. 그 어떤 작품도 전문이 재미없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중 내가 읽은 것은 <데미안> 뿐이나 다른 소설에서도 그와 비슷한 뼈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정신적 스승을 만나 주인공의 내면이 성장하는 모습, 헤세의 작품들은 그 일대기를 공유했다. 오늘날 헤세가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히는 작가 중 한 명인 데는 여러 요인이 있을 테고, 이런 성장소설적 측면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 점이 제일 중요하다.

     

<데미안>은 중학생, 고등학생, 그리고 대학생이 되어 읽었을 때 매번 감상이 다른 신기한 소설이었다. 내겐 그 소설 자체가 데미안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그의 존재를 갈망하는 내면의 욕구가 성장할수록 점점 강렬해졌기 때문인 것 같다.

    

대학에 입학한 후 나는 커다란 혼란에 부닥쳤다. 이전까지 내가 알던 모든 가치가 부정당하는 것 같은 아노미 상태에 빠졌다. <데미안>을 다시 펼쳐 보다가 싱클레어가 부러워졌다. 나에게도 데미안이 있었으면 했다. 당시 성행했던 싸이월드에 짤막하게 심경을 적었다. 남들에게는 오그라드는 감성 글귀로 보였을지 모르나 내게는 존재론적인 갈등이었다. 다행히 사려 깊은 선배 한 명이 댓글을 달아주었다. ‘간달프를 찾고 있구나. 너 자신이 간달프라는 걸 기억하렴.’ 고마웠으나 동의할 수 없었다. 난 절대 간달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벌써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고, 언제부턴가 나는 <데미안>을 읽지 않게 되었다. 그와 같은 존재를 찾아 헤매지 않은지도 오래였다. 아직 간달프가 되진 못했다. 소설의 결말에서 드러난 싱클레어의 모습에 겨우 절반 정도 미치는 수준이 아닐까 한다. 그래도 제자리에 가만히 머무르진 않았다.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나름대로 치열하게 투쟁했다.


     

<데미안>의 마지막 문단을 사랑한다. 그간 읽었던 모든 소설의 명장면, 명대사를 통틀어도 단연 가장 아낀다. 이 글에 옮겨놓기 위해 책장을 펴서 다시 그 대목을 읽자니, 눈물이 차오를 만큼 감동적이다.


     

붕대를 감는 것은 몹시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이 이후에 내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 역시 내게 고통을 주었다. 그러나 나는 열쇠를 발견했고, 때때로 어두운 거울 속, 운명의 형상이 졸고 있는 그곳, 내 자신의 내부에 완전히 들어가기만 하면, 나는 단지 그 어두운 거울 위에 몸을 굽히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이젠 완전히 데미안과 같은, 내 친구이자 지도자인 데미안과 같은 내 자신의 모습을 그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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