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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Jan 21. 2024

문학의 그늘에 가려진 가족들의 고통

클래식 클라우드 열세 번째 책, 레이먼드 카버

레이먼드 카버라는 이름은 이 시리즈의 네 번째 주인공이었던 페소아만큼이나 낯설었다. 난 도서관 검색용 컴퓨터에 책 이름을 치면서 ‘에드먼드 카버’라고 치고는 대체 왜 검색결과가 없냐며 투덜거렸다. (나중에 알아차렸지만 에드먼드는 과학자 에드먼드 핼리의 이름이었다) 책을 읽으며 <대성당>이 카버의 대표작임을 알게 된 후에야 서점에서 <대성당>의 표지를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헤밍웨이, 피츠제럴드에 이어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에 미국문학의 거장이 등장한 지가 벌써 세 번째다. 가면 갈수록 누구의 문학이 더 훌륭하냐가 아니라 누구 인생이 더 막장이냐며 내기하는 것 같다. 혹은 누가 더 심한 알코올중독이었는지 우열을 가려보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어려운 문제에 직면한 나는 사람들이 술을 왜 좋아하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술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 카버 중 제일가는 술꾼을 고르라면 난 망설임 없이 카버의 손을 들어줄 수 있다. 생의 후반에 갱생하여 금주에 성공하기까지 했지만, 그동안 가족에게 끼친 피해가 가장 극심하기 때문이다.

     

카버는 자기 인생을 문학에 바친 사람이었다. 문제는 자기뿐 아니라 가족들의 삶도 문학에 바쳤다는 것이었다. 카버의 형편없는 작태는 뛰어나다고 일컬어지는 그의 문학을 정말 뛰어나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카버의 문학은 어떤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걸까?


우선 그가 선보인 작품의 특징을 일컫는 ‘더러운 리얼리즘’ 이라는 용어가 있다. 리얼리즘은 문학을 넘어서 연극, 회화 등 다른 예술 장르에도 광범위하게 쓰이는 용어인 데다, 카버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이므로 공부하고 넘어갈 필요성을 느꼈다. 나는 애용하는 백과사전을 펴 들었다.


사실주의(리얼리즘)

삶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예술 양식. 사실주의 예술가들은 예술가가 주로 해야 할 일은 관찰한 내용을 될 수 있는 대로 정확하고 정직하게 묘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주의는 삶을 이상화해서 표현하는 예술 운동인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에 반대하여 일어난 운동이었다.


고전주의 예술작품은 삶을 실제보다 더 이상에 맞고 질서 정연한 모습으로 표현하고, 낭만주의 작품은 삶을 실제보다 더 흥미진진한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그린다.

 

그에 반해 사실주의 예술가는 될 수 있으면 객관적인 자세로 작품을 만들려고 하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이나 어떤 예술 형식에 꿰맞추려고 삶을 왜곡하는 것을 반대한다.

     

사실주의 소설

사실주의 소설의 등장인물은 낭만주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보다 훨씬 복잡한 것처럼 보인다. 배경은 더욱 일상적이고, 구성이 그리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며 주제도 그다지 명백하지 않다. 사실주의 소설은 대부분 있음 직한 사건과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 스콧 피츠제럴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존 스타인벡 등의 후기 작가들의 작품이 널리 인정받게 되어 낭만주의 소설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오늘날 소설과 연극에서는 사실주의가 널리 퍼져 뚜렷한 예술 운동으로서 그 정체성을 찾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더러운’ 리얼리즘이라는 말이 나온 이유는 뭘까?

     

전통적인 리얼리즘이 노동하는 프롤레타리아의 삶을 다루는 것들이라면 이 작품들은 룸펜 프롤레타리아나 불안정한 시간제 노동자들의 거친 삶을 다룬다는 점에서 ‘더러운’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었다.

- <레이먼드 카버 × 고영범> 306p

    

룸펜 프롤레타리아가 무슨 뜻인지 찾아보니, 사회의 가장 밑바닥인 극빈층으로서 노동의 의욕을 상실한 부랑자, 범죄인, 마약상습자, 매춘부 등이라는 정의가 나왔다. 그러니 기존의 프롤레타리아보다도 더 빈곤하고 타락하고 소외된 계층이라는 뜻이다.

     

나중에 그 범주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카버는 더러운 리얼리즘의 선구자였다. 하층민의 생활상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는 뜻인데, 본인이 거의 평생을 빈곤하게 살았으니 당연한 것이겠다.

    

카버는 미국 서부 시골인 야키마라는 고장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부모는 매일같이 싸웠다. 그 동네의 분위기가 책에서는 이렇게 표현된다.

     

당시 미국 서부 시골 동네의 아이들이 대개 그랬듯이, 카버도 열 살 무렵에 흡연과 음주를 시작했다. 

- <레이먼드 카버 × 고영범>21p

    

야키마에서 카버의 탈출구라고는 대자연과 글쓰기뿐이었다고 한다. 그는 야키마의 산과 벌판을 쏘다니며 낚시와 사냥에 탐닉했고, 그와 같은 취미를 지녔던 자국의 대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처럼 작가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

     

그는 19세의 어린 나이에 더 어린 16세의 메리앤과 결혼했다. 저소득층 가정의 청소년들이 이른 나이에 임신을 하거나 결혼하는 현상은 1950년대 미국이나 지금의 우리나라나 마찬가지인 걸까. 메리앤은 변호사의 꿈을 가진 촉망받는 학생이었으나 임신 사실을 알고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결혼식을 올린다.

     

그 후 이 부부에게 펼쳐진 고난의 세월은, 카버의 시에 따르면, 이러했다.

     

나는 그때, 앞으로 올 어느 시절보다도 더 살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인생은, 수많은 급커브들을 품고, 저 앞에 놓여 있었다.

<레이먼드 카버 × 고영범> 59p


카버는 지속되는 생활고에 대처할 능력은 없었으나 문학을 향한 집념만은 확고했다. 그가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는 동안 생계는 대부분 아내 메리앤의 몫이었다.

     

생활력이 전무했던 카버와 달리 메리앤은 웨이트리스 일을 하다가도 호스티스로 승진하고, 방문판매원 일을 시작한 후에는 구역 매니저로 승진하는 등 친화력과 일솜씨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런 아내의 사회생활을 응원하고 지지해주지는 못할망정, 카버는 아내가 잘 나가면 잘 나갈수록 그녀를 끌어내리려 들었다. 메리앤이 방문판매 매니저를 담당하며 한창 벌이가 좋을 때 남편은 가정과 일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종용했고, 그녀는 가정을 선택했다. 두 아이까지 있는 가정은 빈곤의 늪으로 떨어졌다.

     

메리앤이 좋은 기회를 얻어 이스라엘에 유학을 갔을 때도 (못난 –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내 눈에는 이렇게밖에 안 보인다) 카버는 가정과 학업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말로 또다시 아내의 앞길을 막았다.

    

가난에서 벗어나 글쓰기에만 집중하기 위해, 즉 안정된 직업을 가지기 위해 카버는 이사를 셀 수도 없이 다녔다. 책을 읽으며 카버 가족의 여정을 따라가기가 어려울 정도로 그들은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했다.

    

전기세도, 전화세도 내지 못할 정도의 생활고 속에서 카버의 알코올중독은 심화됐고, 설상가상으로 아내 메리앤도 덩달아 술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부부는 술에 취해 서로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일쑤였는데, 남편을 때릴 때 메리앤의 심정을 엿볼 수 있는 문단이 카버의 작품 속에 있다.

    

천만에. 만약 여자가 정말로
여자의 무릎 위로 한꺼번에 떨어져 순식간에 박살 내버린
그 모든 세월을 떠올렸다면,
여자는 그 자리에서 사내를 죽여버렸을 것이다.

<레이먼드 카버 × 고영범> 189p

     

이렇게 썼다는 건 카버도 메리앤의 내면이 얼마나 참혹하게 산산조각 났는지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점점 악화일로를 걷고, 결국 이혼에 이른다.

     

독자로서 메리앤에게도 연민을 느꼈지만 가장 걱정스러웠던 대상은 그녀와 카버의 아이들이었다. 큰딸 크리스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알코올 중독 증상을 대물림받았다. 크리스는 열여섯 살이 되어 차를 몰고 가출했다가 차가 퍼져버려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지만, 부모가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다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유치장에 가서 그들을 꺼내주어야 했다. 크리스는 결국 아버지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아들 역시 잦은 이사와 가난, 부모의 불화로 인한 스트레스를 대마초로 푸는 바람에 문제아가 되었다.

     

이렇게 가정이 풍비박산 났음에도, 세월이 지난 후 카버는 결국 미국 최고의 작가 반열에 오른다. 금주에도 성공하며 부와 명성, 두 번째 부인까지 얻는다. 그러나 내 눈엔 그의 문학적 성취가 가족들의 고통과 눈물을 딛고 이룬, 이기적인 꿈의 실현으로 보였다.

     

카버도 인간이니만큼 딸 크리스가 대를 이어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는 데에 대단히 가슴 아파했다고 한다. 그래봤자 무슨 소용인가. 그의 가족에 술에 대한 유전 인자가 있었다고 해도 좀 더 안정적인 가정을 꾸렸다면 딸에게서 그 인자가 발현되는 일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아이들이 자라야 했던 그 가정, 책에서는 ‘지옥도’라고 표현되는, 술에 지배당한 카버의 집안 풍경을 묘사한 시가 있다.

    

(…) 그제야 아이들은 아버지가 엄마의 선물을 열어놓은 걸 
본다. 기다란 밧줄이 예쁜 상자에서
반쯤 빠져나와 있다.
둘 다 나가서 목이나
매달으라지, 그게 아이들이 하고 싶은 말이다.
지긋지긋해, 둘 다,
그게 아이들이 하고 있는 생각이다. 어쨌거나,
찬장에 시리얼이 있고, 우유는
냉장고에 있다. 아이들은 텔레비전이 있는 방으로
그릇을 들고 가, 볼 만한 프로그램을 찾아,
이 난장판을 잊으려 한다.
(…) 
<레이먼드 카버 × 고영범> 192p

     

아이들이 난장판을 잊으려 TV를 켜는 동안 아버지는 소파에서 잠을 자고 있다. 그리고 절망적 이게도, 카버는 잠에서 깬 이후에도 전날과 똑같은 하루를 보냈다. 블러디메리로 시작해 보드카로 이어지는 하루 말이다.




레이먼드 카버는 한낱 무일푼의 작가 지망생에서 시작해 오랜 시간에 걸쳐 차근차근 이름을 알리다가 미국 최고의 작가 자리에 올랐다. 그래서인지 카버의 일대기는 문학을 향한 흙수저의 처절한 짝사랑 같았다.

     

책을 읽은 직후에는 대체 문학이 뭐길래, 얼마나 중요하길래 한 남자가 가정의 평화를 포기하면서까지 버리지 못했는지 궁금했었다. 그러나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카버의 생애를 훑어보니, 그도 대단한 문학적 공명심이 있어서 그랬던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생활력이 없던 그에게 기댈 곳이라곤 문학밖에 없어서, 할 줄 아는 게 그것뿐이라서 글쓰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그의 대표작 <제발 좀 조용히 해요>가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에 오르고, 더 나아가 <대성당>으로 각종 메이저 잡지사에게 환영받는 인기 작가 반열에 들고 각종 기금의 수혜자로 선정되었을 때, 그 영광의 순간에 카버의 옆을 지킨 사람이 첫 번째 아내 메리앤이라면 어땠을까.

     

그녀는 카버가 가난뱅이이자 알코올중독자이던 시절에 그를 뒷바라지하느라 자기 자신까지 파괴했음에도 정작 그 과실은 따먹지 못했다. 카버가 누린 영광의 시절에 옆에 있었던 사람은 두 번째 아내 갤러거였다. (물론 갤러거도 카버의 사후에도 그와 작품의 명예를 위해 고군분투하여 승리를 이루는 등, 남편을 위해 헌신했다.)

     

그건 그렇고, 1970년대에 들어 미국 문단에서 카버의 작품이 조명받기 시작한 것은 시대적 흐름과 무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소설들은 1960년대의 무지갯빛 환상이 끝나고 엉망진창으로 질질 끌고 가던 베트남전쟁도 사실상 패전으로 마무리되는 시점에 서 있던 미국인들에게 모든 요란한 담론과 거품을 제거한 채 삶 자체를 다루는 ‘진짜 소설’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레이먼드 카버 × 고영범> 182p

     

1960년대의 환상이라고 하니 문득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이 떠오른다. 확실히 그 시기의 미국은 자신감과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그 시절에 ‘없이 사는 이들’의 지리멸렬한 일상을 그린 카버의 작품이 주목받지 못한 이유도 납득이 간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나라는 어떨까? 2020년대 대한민국의 서민과 중산층 사이 어딘가의 계층인 나는 카버의 리얼리즘에서 어떤 매력을 찾아야 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안 그래도 일상이 바쁘고 팍팍한데 취미로 읽는 문학조차 그토록 사실적이라면 어디에서 위로를 얻어야 하는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1960년대의 미국처럼 세계 최고로 잘 살지도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 무지갯빛 환상이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잠식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대중은 궁상맞은 삶에 관심이 없고, 드라마나 예능은 연예인이나 재벌과 같은 화려한 삶을 조명한다. 그렇다면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은 현실의 우리가 그저 좋은 기분으로 읽을 수 있는 작품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카버를 읽어야 하는 이유를 나는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대성당>의 해설에서 발견했다. 글쓴이로 추정되는 이는 소설가 김연수로, 해당 번역본의 역자이기도 하다. 그의 해설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겠다.

     

이러한 희망의 모습은 표제작인 「대성당」과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 가장 극명하게 제시된다. 카버가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사랑했던 이 두 작품에는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단절된 사람들이 등장하고, 이들의 소통은 요원해 보인다. 하지만 이들의 단절이 가장 극에 달한 순간, 놀랍게도 카버는 진정한 소통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레이먼드 카버는 동정이나 연민이 아닌 정직하고 무심한 태도로 삶을 응시한다. 그리고 이를 더없이 간결하고 적확한 언어로 표현해 낸다. 그러면서 삶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단번에 관통해 보여준다. 레이먼드 카버가 ‘소설가들의 소설가’로 불리며 소설가들의 사랑을 받는 것도 바로 이러한 그의 문학적 성취 때문일 것이며, 때로 마주하기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그의 소설을 우리가 쉽사리 외면하지 못하는 것 역시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 [네이버 지식백과] 대성당 (Cathedral) (세계문학전집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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