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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Mar 13. 2023

누가 뭐래도 언니는 우리 언니다

보아 20주년 콘서트 후기

- 팬심 주의, 콩깍지 주의 -


 요즘 아이돌 팬들이 쓰는 용어 중에는 ‘본진’이라는 단어가 있다. 넌 본진이 어디야? 라고 물으면 블랙핑크야. 이런 식으로 답한다. 즉 케이팝에 두루 관심이 있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응원하는 그룹을 칭하는 말이다.

최근 나의 본진은 NCT지만 그런 용례가 생겨나기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원조 본진은 가수 보아다. 나보다 두 살 많은 그를 데뷔 때부터 현재까지 변함없이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투 본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바로 어제인 3월 12일, 나는 보아의 20주년 콘서트를 감상하기 위해 수서행 SRT를 탔다. 보아 콘서트에 가는 건 아주 오래전부터 나의 위시 리스트에 있었기에 그때까지도 티켓을 구한 것이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공연장은 올림픽공원 올림픽홀. 그곳은 좌석 수가 3천석 정도로, 별로 크지 않아 어딜 앉아도 시야가 좋다고 했다. 내 자리는 2층 A2구역 5열 11번이었다. 1층이었다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이 자리만 해도 언감생심 감사할 일이었다.


공연 시작 시각인 4시보다 훨씬 일찍 서울에 도착해 점심도 먹고 날씨가 추워서 예정에 없던 옷도 사고 이것저것 하다 보니 벌써 공연 한 시간 반 전이 되었다. 부랴부랴 지하철을 타고 올림픽홀로 향했다.



도착해보니 벌써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고 굿즈를 판매하는 부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공식 응원봉인 아별봉(보아의 별명인 ‘아시아의 별’에서 따온 이름)을 살까 말까 고민을 거듭하다, 3시까지만 판매한다는 안내를 듣고는 사기로 마음먹었다. 꽤 비싼 값을 주고 산 아별봉은 전에 사본 엔시티의 것보다 조금 더 작고 아기자기하게 예뻤다. 중간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Beats Of Angel’. 보아(BOA)의 이름에 거창한 의미를 붙여 만든 문구였는데, 약간은 오글거렸다. 아마 보아 본인도 보고는 좀 오글거렸지 않을까.


뒤늦게 찍어본 아별봉. 예쁘다.


아별봉을 들고 공연장에 들어서니 아직은 입장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나는 줄이 길어지기 전에 얼른 화장실에 다녀와서는 내 자리를 찾아 앉았다. 듣던 대로 올림픽홀은 아담한 규모로 내가 앉은 2층에서도 무대가 아주 가깝게 보였다. 이 정도면 보아의 실물을 제대로 볼 수 있겠는데? 마음이 기대로 부풀어 올랐다.


4시가 가까워지면서 공연장은 점점 사람들로 채워졌다. 2층에서는 입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는데,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특히 예전에 갔던 엔시티 콘서트보다 남자 팬들이 많았다. 그런데 들어오는 사람들마다 노란색 아이템을 장착한 것이 눈에 띄었다. 노란색 마스크, 노란색 티셔츠, 노란색 스카프, 노란색 코트 등. 아마 팬클럽에서 보아의 공식색인 노란색으로 드레스 코드를 정한 모양이었다. 나는 아차 싶었다. 미리 알아보고 올 걸. 나에겐 노란색 아이템이 하나도 없었다. 조금 소외감을 느꼈다.


입장 시간에는 공연장 전체에 보아의 노래들이 끊임없이 플레이되었다. 나는 보아의 전성기 시절 앨범뿐 아니라 최근의 앨범들까지 다 들었기 때문에, 모르는 노래는 거의 없었다. 알던 노래도 공연장의 웅장한 사운드로 들으니 더 좋게 들렸다. 그렇게 음악 감상에 푹 빠져있던 중,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났다.


잔잔한 곡들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강렬하고 화려한 전주가 등장했다. 데뷔곡 ID : Peace B 였다. 너무나 익숙한 그 인트로가 나오는 순간 어수선하던 공연장의 분위기가 단박에 정리되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사람들이 일제히 아별봉을 흔들며 환호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 노래가 곧 막이 오른다는 신호라는 것을.


흥분으로 달아오른 관중들 사이에서 함께 소리를 지르며 생각했다. Peace B is my network ID. 요즘 아이들은 모를 것이다. 이 한 구절의 가사가 그 당시에 얼마나 혁신적이었는지. 인터넷이 태동하던 시기에 네트워크와 ID라는 단어들을 들고 우리 앞에 나타난 보아는 그 어린 나이만큼 새천년을, 첨단을 상징하는 소녀였다. 당시 열세 살이었던 나에게 그는 기성세대에 대항해 우리 신세대를 상징하는 대변자와도 같은 존재였다.


드디어 막이 올랐다. 무대에 보아가 서 있었다. 공연이 시작되는 그 순간까지도 정말 보아가 나올까, 하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었다. 그런데 정말로 보아가 나와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당연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너무나 고대했던 순간이었기에 쉽게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보아는 오프닝부터 힘들고 강렬한 댄스곡들을 몰아쳤다. Breathe, Hurricane Venus, Eat You Up, My Name, Better 등, 너무나 귀에 익은 노래와 안무를 눈앞에서 듣고 보면서 나는 순식간에 감격에 휩싸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보아를 보는 건 나의 10대를, 사춘기 시절을 보는 것과 같았다. 그 옛날 어린 시절의 장면들이 기억 저편에서 차라락 펼쳐지며 떠올랐다.


중학생 때, 보아의 일본 싱글들을 하염없이 플레이하던 내가 보인다. Listen To My Heart, Amazing Kiss, 키모치와 츠타와루, Every Heart, Jewel Song 등등 주옥같은 명곡들을 수도 없이 반복해서 듣는 모습이다. Don’t Start Now를 틀어놓자 ‘그것도 노래니?’라고 하시던 엄마의 목소리도 들린다.


고등학생 때, My Name 앨범이 출시되자마자 학교 앞 음반사로 달려간다. 시디를 친구들과 돌려보며 감탄한다. Be The One을 같이 들으려고 친구에게 이어폰 한쪽을 건넨다. 반에서 가장 재미있는 친구 둘이 Girls On Top의 어부바 춤을 따라 하자 학급 전체가 포복절도한다. 어떤 친구는 울프컷을 하고 왔다가 선생님한테 된통 혼난다.


대학생 새내기 시절, 동기들과 선배들과 간 노래방에서 Moon&Sunrise를 부른다. Everlasting도 부른다. 취업전선에 오른 4학년, 도서관에서 컴백 소식을 듣는다. Hurricane Venus를 들으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메리 크리를 듣다가 깜빡 잠이 든다.


돌이켜보면 내 청춘 어디에도 그의 흔적이 없는 곳이 없었다. 그때 보아를 바라보며 다짐하곤 했었다. 나도 저렇게 멋진 여성이 되어야지. 사춘기의 내 마음은 그렇게 순수한 동경과 희망찬 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소녀시절의 소망과 염원과 좌절과 기대, 그 모든 기억과 감정이 생생히 떠올랐고 나는 그리움에 압도되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공연은 계속되고 보아는 더 많은, 정말 많은 곡들을 들려주었다. 아틀란티스 소녀를 부를 때는 심지어 꽃으로 장식한 이동차를 타고 2층에까지 팬들을 보러 왔다. 하얀 머리띠를 하고 에메랄드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그의 모습은 정말 꽃마차를 탄 공주나 여신 같았다. 마차는 드디어 내 자리 근처까지 도달했고 나는 그때 보아의 실물을 반경 5미터 이내의 거리에서 볼 수 있었다.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그렇게 예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이 말 외에는 달리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다. 어떤 미사여구도 그 순간의 놀라움을 묘사할 수 없다.


보아는 그 예쁜 얼굴에 가득 차도록 웃음을 띠고 손을 흔들며 공연장 전체를 돌았다. 수천 명의 팬들이 오로지 그가 있는 방향만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이름을 부르고 사진을 찍고 함성을 질렀다. 보아는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팬들도 그랬다. 가수와 팬이 오로지 그리고 온전히 기쁨만을 나누는 그 장면은 차라리 감동이었다.


보아는 공연 내내 팬들에게 일어서라고 독려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아도, 노래의 전주만 흘러나와도 팬들은 알아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지 않고서는 못 배겼다는 말이 맞겠다. 혼자 오든 같이 오든 남자든 여자든 한국인이든 외국인이든 간에 다 같이 일어서서 응원봉을 흔들고 떼창을 했다. 멘트 타임에는 팬들이 보아에게 말을 걸려고 외치는 소리가 공연장 전체에 다 들렸다. 물론 보아에게도 들렸다. 그는 스스럼없이 팬들과 대화하며 즐거워했다. 나는 일면식도 없는 그 자리의 모든 팬들과 유대감을 느꼈다. 우리 다 같은 보아 세대잖아요, 그렇죠? 마음속으로 물었다.


정신없이 뛰고 즐기다 보니 어느 새 두 시간이 지나있었고, 보아는 마지막 인사를 하며 무대를 떠났다. 그러나 요즘 콘서트에서 앵콜은 사실상 앵콜이 아니다. 공연 전 미리 부여받은 슬로건에는 보아가 퇴장한 후 <먼 훗날 우리>를 다 함께 부르라고 되어 있었다.


팬들은 별로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떼창하기 시작했다. 나도, 옆자리의 아리따운 여성분도, 뒷자리의 굵직한 저음의 남성분도, 너나 할 것 없이 23년 전에 나온 이 예쁜 노래를 따라불렀다.    

 

너를 사랑할 수 있는 건 나에겐 행운이었어
슬픈 기억마저 나에겐 소중한걸
먼 훗날 우리 만날 수 있다면
참아왔던 눈물 흘리겠지 오랫동안을
말해보지도 못했던 사랑으로
널 처음처럼 만날 수 있다면
바라만 보지는 않을 거야 바보처럼
후회할 테니까
그때는 날 받아줘 놓지 말아줘   

  

몇 번이고 떼창은 이어졌고, 이에 화답하듯 다시 공연장의 불이 꺼지고 막이 올랐다. 이번엔 걸스 온 탑과 발렌티였다. 팬들은 홀린 듯 다시 일어나 응원봉을 흔들었다. 그리고 이제 진짜 마지막이었다. 보아는 20주년 콘서트의 엔딩곡으로 이 곡을 꼭 부르고 싶었다며 소개했다. 10집의‘Little Bird’였다.  

    

언젠가 오를 수 있을까
작은 날개바람 가를 수 있을까
한 걸음 떼기도 힘들어
주저앉아 울며 견딘 외로운 시간들
마침내 난 꿈을 이뤘죠
넘어진 만큼 더 높이 뛸 수 있었죠
날다 보면 가다 보면
내 세상 열릴까
이 눈물 의미를 마침내 알 수 있을까     


직접 작사 작곡한, 본인의 인생을 집약한 듯한 가사의 노래를 부르며 보아는 눈물을 흘렸다. 팬들은 안다. 그가 웬만해선 잘 울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을. 그래서 더욱 특별했다. 전광판에는 눈물로 환히 빛나는 얼굴이 비쳤고 무대에서는 노란색 축포가 터졌다. ‘새로운 스무 살을 축하해’라는 메시지의 슬로건 수천 개가 관중석에서 떠올랐고, 쏟아지는 환호 속에서 보아는 조심스레 눈물을 닦으며 손을 흔들었다.


감동적인 앵콜이 끝난 후에도 팬들이 못내 아쉬움을 떨치지 못했다는 건 후일담이다. 결국 보아는 다시 한번 무대에 불려 나왔다. 앵앵콜을 준비하지 못했다면서도 팬들을 위해 다시 마이크를 잡은 그는, 힘든 기색이 역력했지만 끝까지 행복해 보였다. 보아가 진짜 진짜 마지막으로 퇴장하면서 팬들에게 외친 말은 이랬다. “이제 집에 가~!”

그래, 이제 집에 가야지. 자고로 언니 말은 들어야 하는 법이다.     


사실 예전부터 마음 깊은 곳에 지니고 있던 작은 소망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보아 콘서트에 가게 되면 엄청난 사자후로 ‘언니!!!!!!!!!!!!!!!!!!!’라고 외치는 거였다. 보아 뿐 아니라 다른 팬들에게도 다 들리도록, 가슴 속이 다 시원해질 만큼 나의 팬심을 가득 담아 지르는 것, 그게 목표였다. 하지만 막상 가보니 나보다 더한 목청의 팬들이 너무 많았고, 노래를 따라부르다가 목이 다 쉬어버려서 실행하지는 못했다.



옛날에 친구와 노래방에 갔을 때, 나는 보아 노래를 선곡하며 이렇게 말했었다. 보아 언니 노래는 꼭 불러야 돼. 친구는 놀리듯 화답했다.

“보아는 널 모르잖아. 그래도 언니냐.”

그때나 지금이나 나의 답은 같다. 야, 당연하지. 그렇다. 누가 뭐래도 언니는 우리 언니다. (게다가 난 친언니도 없는데 뭐). 소리 내어 외쳐보지 못한 그 이름을 마음 속에서나마 힘껏 불러본다.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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