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몇 개월 동안 감정적으로 제법 힘든 시간을 보냈다. 일상의 기쁨과 생활의 리듬이 무너져버려 폐허와 같은 상태로 지내다가 이번 주가 되어서야 겨우 회복의 기운을 느꼈다. 나를 상실감의 구덩이에서 꺼내준 것은 결국 가족과, 옛날부터 사랑해온 음악과 책이었다.
아이가 원하는 만큼 다 놀아주기에는 내 에너지가 너무 부족하지만 하루에 단 5분, 10분이라도 눈 맞추고 상호작용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이도 그걸 알아주는 건지 그렇게 함께 있고 나면 더 놀아달라고 심하게 조르지는 않는다. 아이가 정말 원하는 건 엄마가 자기와 같이 있다는 느낌 자체인가보다.
지난 주말 다 같이 만화카페에 가서 하루종일 시간을 보낸 건 꽤나 즐거운 경험이었다. 좁은 방에서 셋이 서로에게 누웠다가 기대기도 하고 앉아있다가 엎드리기도 하고, 맛있는 간식도 시켜먹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흔한 남매 시리즈를 마음껏 볼 수 있게 해주고 나는 추리소설 신간을, 남편은 원피스를 보았다. 슬램덩크나 미스터 초밥왕에 도전해볼까 고민했지만 내겐 책보다 만화책이 진입장벽이 높다. 둘 다 엄청 재밌겠지? 다음 번에 가면 1권부터 차근차근 시작해봐야지.
자극적인 이야기에 빠져들면 조금 덜 힘들까 해서 신작 추리소설을 연달아 대여섯 권 정도 읽어봤는데, 마음이 다쳐있을 때 선혈이 낭자한 장면들을 접하니 오히려 더 괴로워지는 기분이었다. 지금 같은 시기에는 비문학이 훨씬 도움이 되었다. 한 역사교양서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지적 욕구의 불씨를 확 되살려줬다. 오래 전부터 팬인 난처한 공부 시리즈도 재독하면서 몰랐던 지식을 알아가는 기쁨을 느꼈다. 그렇게 책을 읽으면서 채워진 긍정적인 감정들은 마음 속에 생긴 구멍을 조금씩 메워주었다.
최근 자주 듣지 못했던 클래식도 다시 찾아듣고 있다. 역시 유구하게 좋아했던 바이올린 협주곡들을 플레이리스트에 올렸고 연주자는 힐러리 한으로 골랐다. 한때는 그녀의 연주가 너무 냉정해서 낭만주의 협주곡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 특유의 정확함이 차가움이 아닌 잘 절제된 품위로 느껴진다. 거의 신의 경지에 오른 듯한 테크닉은 마치 손가락과 활이 아니라 예리한 칼로 현을 다루는 듯하다. 그런 정확성에 더해 절대 감정 과잉이 되지 않는 그녀의 차분함 덕에 음악 자체에 대한 집중도가 높아진다.
오늘 아침에는 브람스 교향곡 4번 1악장과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1악장을 연달아 들었다. 브람스는 어쩜 이렇게 좋을까. 4번 1악장의 후반부에서 겹겹이 쌓인 현악 총주가 그 안에서도 성부를 여러 개로 나누어 주제를 폭발시킬 때, 그때의 카타르시스를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교향곡에서나 느낄 수 있는 웅장함을 브람스는 협주곡에서도 즐길 수 있게 해놓았다. 장대한 전주를 지나 바이올린의 울부짖음이 정적의 장막을 찢어버리고 고개를 내밀 때, 그 강렬함을 묘사하기에도 내 언어는 부족하다. 힐러리 한의 느긋한 카덴차에는 기교를 뽐내려는 욕심도, 어려운 패시지에 대한 압박도 조급함도 없다. 그저 청중이 음 하나 하나를 충분히 감상하고 곱씹을 수 있게 해주겠다는 여유만이 느껴진다.
결국 상처받은 마음과 영혼을 치유해주는 건 건전함과 아름다움이다. 책과 음악은 나를 위로하는 데 실패한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