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케미를 느낀 세계문학

막심 고리끼,『어머니』

by 세온

책을 읽고 이토록 짜증이 난 건 처음이다. 평범한 소설도 아닌 소위 불멸의 명성을 자랑한다는 세계명작이 이런 류의 감정을 유발한 적은 여태껏 없었다.


해당 작품은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이다. 『어머니』를 다 읽은 후 곧바로 내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은 이것이었다.

대체 내가 이 소설을 통해 뭘 느껴야 하지?


욕하기 전에 사실관계부터 확인하려고 내가 읽은 판본인 을유문화사 전집의 홍보 문구를 살펴보았다.‘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효시이자 당대의 여성주의 소설’이라고 씌어 있었다. 여성주의적인지는 모르겠고 리얼리즘은 맞는 것 같지만, 민중의 각성을 목표로 한 계몽소설이라는 언급도 해줬으면 오해할 여지가 없었을 거라고 투덜거렸다.


다시 찬찬히 읽어보니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란 인민대중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도구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정해진 구조를 따르는데, 『어머니』가 바로 이 구조의 기반을 다졌다’고 되어 있었다. 아, 이 말이 그 말이었구나. 소개 문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내 실수였다.


그래서 난 이 소설을 평소처럼 인물과 서사에 완전히 몰입하는 방식으로 읽어버렸다. 『어머니』가 도구적 문학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한 발짝 떨어져서 관조하듯이 읽었을 텐데. 그랬다면 기껏 열심히 완독 해놓고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주체하지 못해 이런 장문을 휘갈기는 일도 없었을 터이다.


나는 타인이 내 사전 동의 없이 가르치려 드는 태도를 극도로 싫어한다.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반대로 내가 잘난 구석이 거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에 훈계를 거부한다. 나보다 잘난 사람의 조언에 의존하며 위태로운 삶을 꾸려 나가느니 못난 나를 끌어안은 채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내 인생관이다. 이런 내게『어머니』의 노골적인 가르침은 최악의 주체성 침해였다. 나라는 독자가 고리끼가 ‘일깨우고’ 싶어 한 무지한 민중 속의 한 사람으로 치부된 듯해 몹시 불쾌했다.


현대 한국 대중을 타깃으로 기획된 것이 틀림없는 여러 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에 사회주의의 이상을 설파하는『어머니』가 빠지지 않고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몇 가지 가설을 세워 보았다.


1) 문학계의 높으신 분들이 『어머니』속에 드러난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고결한 이상과 그들이 보여준 자본주의 권력에의 저항을 높이 평가해서 전집에 넣었다는 설


나는 그분들의 평가에 동의할 수 없다. 소설 속 혁명가들은 분명 선하고 용감하다. 여기엔 논란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그들이 추구한 이상이 하필 사회주의라는 점이다.


나를 포함한 현대인은 소련이 이미 몰락했다는 사실을 안다. 외부의 직접적인 침략이 아닌 사회주의 체제 내부의 한계와 모순의 누적으로 인해 붕괴했다는 사실도 안다. 소설 속 혁명가들의 이상이 현실에 실현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저항이 충분히 숭고해 보일까? 차라리 순진해 보인다. 감동이 아닌 안타까움이 올라온다.


1907년에 이 소설을 발표한 고리끼는 당연히 사회주의가 최종적으로 실패할 줄 몰랐겠지. 그러니 현대인의 기준으로 읽지 말고 당대인의 기준으로 읽어야 한다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대상이 역사학이라면 그 반론은 타당하다. 과거인의 시각으로 과거를 바라보기는 역사 탐구의 기본 원칙이니까.


그러나 『어머니』는 문학이 아닌가. 그것도 세계적인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고 평가되는 문학이라면, 시대와 국적을 초월해 인류의 내면에 정서적 감응을 일으키는 보편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실제로 몇 백 년 전에 쓰인 동서양의 숱한 고전들은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을 건드린다. 나는 『어머니』의 메시지가 그 정도의 파급력이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초기 사회주의 사상의 순수성이 자본주의의 풍요에 길들여진 나 같은 현대인을 감화시키지는 못한다.


다만 자본주의 역시 완벽한 시스템이 아니며 단점이 명확하기에 사회주의의 핵심 문제의식을 적용한 제도적 보완책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어머니』속 혁명 사상이 높게 평가되는 이유를 이런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맥락을 끌어들여서 문학의 효용을 논하는 방식은 이 예술 장르를 지나치게 기능적으로 바라보는 입장 같아서, 나는 완전히 납득하지는 못하겠다.


소설 속 혁명가들의 입을 빌려 주창되는 사상의 내용 자체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어머니』의 초반은 공장노동자들의 고된 노동과 그로 인한 인간성의 상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데, 거기까진 괜찮다. 그런데 갑자기, 자본주의가 불러온 인간 소외가 가정과 사회에 만연한 폭력의 원인이라는 쪽으로 논리가 비약해 버린다. 공장의 부품으로 취급당하는 스트레스를 못 견뎌 집에서 아내를 때리고 골목길에서 패싸움질을 한다는 식으로 서술해 놓았다.


그럼 산업자본주의 이전에는 폭력이 없었단 말인가? 인류 역사상 언제나 존재해 왔고 한 번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폭력의 존재를 왜 자본주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


그리고 전 유럽의 노동 계급과 연계하자는 주장이 혁명가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순간, 나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 독자로서 그 발언은 역사적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아킬레스건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반공교육을 받은 세대도 아닌 내가 사회주의에 대해 기본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뭔지 고민해 본 적이 있다. 답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반공교육 대신 받은 통일교육이다. 통일교육 교재는 결론이 뭐가 어찌 되었든 간에 시작은 이 단어로 출발했다. ‘남침’. 김씨 독재정권이 역사를 뭐라고 왜곡해 왔든 6.25가 북침이 아니라 남침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첫 번째 김씨의 동족상잔을 지원한 주체가 ‘계급적 연대’를 표방한 타국의 공산정권이었다는 사실 또한 내 이념적 인식을 형성한 주 요인이었다.


또 하나의 반감 제공자는 한국 독립운동사에 남은 분열의 기록이다. 조선공산당의 창당 후 독립운동 세력의 분열은 가시화되었다. 아무리 사상적 중립성을 유지하고 싶어도 여기에서 막혀서 도저히 나아갈 수가 없었던 나는 현직 역사 교사인 지인에게, 그리고 챗GPT에게 질문했다. 민족 분열의 책임을 사회주의에 묻는 태도가 정당하냐고.


지인은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일제를 가장 끈질기게 괴롭힌 세력이 사회계열 독립운동이었다고. 그리고 자본주의의 독주를 견제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사상이 사회주의라고 말이다. 챗GPT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사회주의에 민족 분열의 책임을 묻는 관점은 학문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고, 단순한 반공 이데올로기로 치부할 수 없으며 아예 분열과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다고. 다만 유일한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고 했다.


혹자는 이렇게 반론할지도 모른다. 왜 자꾸 민족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세계문학을 읽느냐고, 코즈모폴리턴적인 마인드로 읽어보라고. 일리 있는 말이란 걸 인정한다. 그러나 인정하는 것과 실현 가능하냐의 문제는 별개다. 문학을 삶에 관통시키기 위해 완전히 무방비인 상태로 작품 속에 들어가는 내게 그런 메타인지가 가능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결국 『어머니』에서 혁명가들이 부르짖는 계급적 연대는 내게는 인간 해방의 이상이 아니라 복잡한 인지적 정렬 과정을 요구하는 도전 과제였다. 이 점이 명작이라고 불리는 이 소설의 가치를 인정하기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2)『어머니』는 러시아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작품이어서 전집에 포함시켰다는 설


『어머니』는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넘어가는 문턱에 선 작품이라고 한다.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까지의 러시아 문학은 귀족, 지식인 등의 방황하는 개인이 중심이었는데 『어머니』가 처음으로 무지한 노동자 여성, 정치적으로 각성하는 민중을 이야기의 중심 주체로 세웠다는 것이다. 또한 소련 이후 공식 문학 노선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필수 요소를 『어머니』는 이미 다 갖고 있었고, 그래서 수십 년간 소련의 모범텍스트로 군림했다고 한다.


그렇구나. 러시아 문학사에선 중요하구나. 근데 그게 나를 비롯한 현대 한국 대중에게 어떤 의미로 작동하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우리를 전부 문학 전공자로 만들 게 아니라면 문학사적 위치를 전집의 선정 기준으로 고려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게 된다. 오늘날의 독자에게는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가 다룬 개인의 치열한 방황과 고민이 훨씬 더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3) 주인공인 ‘어머니’의 계급적 각성이 감동적으로 그려진 점을 높이 평가해 전집에 넣었다는 설


솔직히 나는 감동적인 포인트를 찾지 못했다. 내가 봤을 때 『어머니』의 주인공 ‘어머니’는 입체적인 척하는 평면적 인물이다. 고리끼가 민중을 계몽해서 만들고 싶어 했던 이상형이 ‘어머니’다. 사회주의 이상화의 서사에 철저히 이용당하는 캐릭터인 이 인물의 어디에서 감동을 느낄 수 있는지 모르겠다.


고리끼가 그린 ‘어머니’는 모성과 사상 사이에서 고뇌하는 ‘척’만 한다. 진정 ‘어머니’를 사실적인 인물로 그리고 싶었다면 그녀가 사회주의에 감화되는 과정을 그릴 게 아니라 자식의 신체를 보호하고 싶은 욕망과 정신을 보호하고 싶은 욕망 간의 갈등을 집중적, 입체적으로 묘사했어야 했다.


4) 외부 권위와 전통이 작품의 문학성을 검증해 주었다고 판단하여 전집에 포함시켰다는 설


열린책들 출판사 카탈로그의 소개글을 보면 문학계에서 『어머니』의 위상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다.

1912년 그리보예도프상
1966년 동아일보 선정 〈한국 명사들의 추천 도서〉
1993년 서울대학교 선정 〈동서 고전 200선〉
1993년 한겨레신문이 권하는 〈좋은 책 100권〉
1999년 경향신문 선정 〈20세기의 문학〉
2004년 〈한국 문인이 선호하는 세계 명작 소설 100선
2005년 포스코 교육 재단 선정 필독 도서
2006년 이고르 수히흐 교수 〈러시아 문학 20세기의 책 20권〉
2008년 한국경제신문 선정 〈국내외 명문대생이 즐겨 읽는 고전〉
서울대학교 권장 도서 100선
피터 박스올 〈죽기 전에 읽어야 할 1001권의 책〉


이 정도 지위의 작품이라면 세계문학전집에 반드시 넣어야 한다고 기획자가 판단했다 해도 탓할 수 없다. 다만 검증된 권위가 정한 기준이 반드시 내 기준과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세계문학전집을 완주하겠다는 내 목표는 『어머니』에 이르러 전면 수정을 요구받게 되었다. 난 세계문학전집이 보편적인 문학성을 증명하는 커리큘럼이고, 그걸 따라가기만 하면 매번 고퀄리티의 독서 경험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어머니』는 이런 내 신뢰가 얼마나 순진한 것이었는지 가르쳐 주었다. 내가 문학을 향유하는 방식이 꼭 세상의 절대적인 기준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 또한 깨닫게 해 주었다. 그러니 결국 『어머니』는 나를 일깨우긴 일깨운 셈이다. 비록 고리끼가 의도한 방향과는 정반대이지만 말이다.


나라는 독자에게 이 고전이 전혀 맞지 않았다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의미를 찾아보려고 노력한 과정이 『어머니』가 준 최대의 경험치라고 말하겠다. 싫어하는 대상에 대한 탐구조차 나 자신에 대한 이해를 한 겹 더 얹어줄 수 있다는 사실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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