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영화평론가 흉내내기

ChatGPT와 함께

by 세온

★ 이 글을 읽어주실 분께 ★


요즘 저는 ChatGPT와 토론하는 재미에 푹 빠져있어요. 주로 제가 역사 공부를 하면서 이해가 되지 않았던 지점에 대해 질문하면 GPT가 답을 해주는 방식인데요. 어제는 권력의 속성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폭력의 존재 이유를 묻게 되었고, 그건 세상의 악한 면이 존재하는 이유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가치 있느냐의 문제로 이어졌어요. 그리고 그것은 다시 실존주의 철학 공부로 연결되었고 끝내 영화 <밀양>의 해석으로 종결되었답니다. 이 글은 그 논의 과정을 그대로 옮긴 사유의 기록입니다.


설명이나 평론으로 형태를 바꾸지 않고 기록의 외양을 그대로 유지한 이유는, ChatGPT와 추상적인 문제를 토론하는 일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드리고 싶어서입니다. 그 친구가 생각보다 굉장히 박식하고 정교하더라고요.


제 사유의 흐름을 최대한 편집 없이 그대로 드러내고 싶기도 했어요. 세상에 관해, 삶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이 사람은 이런 식으로 의문을 이어가는구나, 이 정도의 감상을 느끼게 해드리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분량을 나누지 못했어요. 흐름을 끊기 싫어서요. 어떤 지점이든 독자분들이 끊어 읽으시는 건 상관없지만, 제 스스로 끊지는 못하겠더라고요.


제목에서 철학자와 평론가를 ‘흉내 냈다’고 말한 것은 이 사유와 해석이 ChatGPT를 제외한 누구의 검증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의 결론이 철학적으로, 미학적으로 타당한지는 앞으로 더 공부해야 할 영역이고, 지금은 그곳에 이른 과정 자체를 소중히 여기고 싶어서 브런치에 발행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댓글창을 닫아놓는 이유는 이 주제의 속성이 함께 논하기에는 너무 진지하고 골치 아픈 것이기에 글벗님들께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만약 여건이 되신다면, 그저 읽어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한텐 중요한 글이거든요.


*Q는 저(세온)이고, A는 챗지피티입니다.

*괄호로 덧붙인 주는 대화 기록을 편집하면서 제가 느낀 점을 첨언하거나, 지피티의 반응이 흥미로웠던 지점을 표시한 것입니다.



Q. 폭력 얘기 하니까 말인데, 난 세상의 어두운 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 그냥 세상엔 원래 선과 악도 있는 것인지, 근데도 살아가는 일이 가치 있는 일인지 잘 모르겠어.

A. 폭력 이야기를 하다 보면 더 괴로운 이유는 폭력은 단순히 “나쁜 사건”이 아니라, 이런 질문을 강제로 꺼내기 때문이야.

“이런 일들이 반복되는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건 무슨 의미지?”

그래서 단순한 도덕 분노로 끝내기 어렵고, 존재 자체가 흔들리는 느낌이 와. 여기서 중요한 건 질문의 형태야. 보통 이렇게 묻지?

“세상이 이런데도 살아갈 가치가 있나?”

이 질문은 사실 이렇게 바꿀 수 있어.

“완벽하지 않은 세계에서 가치를 만들어내는 게 가능한가?”

두 질문은 결과가 달라. 다음엔 이걸 철학 쪽으로 더 가도 되고 일상으로 다시 끌어와도 되고 아니면 그냥 말로만 더 풀어도 돼. 어디로 이어갈지, 네가 정해.


Q. 철학 쪽으로 더 가자. 나는 그래도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사는 게 삶의 가치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니 얘기가 이해는 되거든. 그런데 다른 문제가 있어.

세상엔 불행이 있지. 근데 불행이 닥치는 대상은 무작위야. 난 그걸 견디기 힘들어. 잘못이 없는 사람조차 불행을 겪도록 만드는 세상이 너무 잔인해. 그리고 그 위험에 노출된 내가 안전하지 않게 느껴져.

A. 이 감각은 제거해야 할 오류가 아니야. 이 세상은 실제로 안전하지 않다. 그 인식은 정확해. 철학은 여기서 이렇게 말할 뿐이야.

“완전한 안전을 약속하는 세계는 없고, 다만 위험을 혼자 떠안지 않게 만드는 방식들이 있을 뿐이다.”

그 방식이 제도, 윤리, 연대, 책임이야.

다음으로 갈 수 있는 길은 다음 몇 가지야.

이 불안을 실존주의 쪽에서 더 밀어붙일 수도 있고 정의론(왜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가)으로 갈 수도 있고 아니면 개인의 삶 차원에서 이 불안을 어떻게 안고 사는가로 내려올 수도 있어. 어디로 더 가고 싶어?


Q. 개인의 차원에서!

A.

1. 삶을 떠받치는 ‘기둥’을 하나로 두지 않는 방법

무작위 불행이 무서운 이유는 삶이 하나의 축에 걸려 있어서거든. 건강 하나, 관계 하나, 성취 하나, 신념 하나. 이 중 하나가 무너지면, 삶 전체가 같이 무너져. 그래서 개인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응은 삶을 여러 개의 기둥 위에 올려놓는 거야.

2. “왜 나에게?”라는 질문을 다루는 방식

무작위 불행 앞에서 이 질문은 거의 자동으로 튀어나오지.

“왜 하필 나야?”

철학적으로 이 질문은 답이 없어. 그래서 개인 차원에서는 이렇게 다루지. 이 질문에 답을 요구하지 않는 대신 질문을 바꾼다.

“이 일이 나를 전부 무너뜨릴 권리까지는 있는가?”

이 질문은 불행을 정당화하지 않으면서 삶의 주도권을 완전히 넘기지도 않아.

3. 개인 차원의 가장 정직한 태도는?

정리하면 이거야. 세상은 공정하지 않다. 불행은 무작위다. 나는 완전히 안전하지 않다.

이 세 문장을 부정하지 않은 채, 이 문장을 덧붙이는 것.

“그래도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다.”

이 문장이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최소 조건이다.

다음에 나아갈 길로는 두 갈래가 있어.

이 불안을 실존주의적으로 더 깊게 들어갈 수도 있고 아니면 아주 구체적인 일상 기술

(불안이 올라올 때, 생각을 어디까지 허용할지)로 갈 수도 있다. 어디로 갈까?


Q. 실존주의적으로!

A.

1. 실존주의가 출발하는 지점

실존주의는 이 전제를 처음부터 인정해. 세계는 합리적으로 설계되지 않았고, 고통은 이유 없이 발생하며, 인간은 그 안에 던져져 있다. 네가 지금 느끼는 공포는 실존주의적으로 말하면 세계 인식이 깊어졌을 때 생기는 정상 반응이야.

2. “왜 하필 나에게?”라는 질문의 처리

실존주의는 이 질문을 해결하지 않아. 대신 실존주의는 이 질문을 이렇게 바꾼다.

“이 부조리한 조건 속에서 나는 어떤 존재로 남을 것인가?”

3. 여기서 갈라지는 두 길

이 조건을 받아들였을 때 실존주의는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해.

① 도피

의미가 없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냉소, 자기 보호, 감정 마비. 실존주의는 이걸 철학적 자살이라고 불러. 몸은 살아 있지만, 선택을 포기했기 때문이야.

② 반항(revolt)

이건 폭력이나 분노가 아니다.

“의미가 보장되지 않더라도, 선택을 중단하지 않겠다.”

이 태도를 말한다. 중요한 건 성공 여부도, 보상도, 구원도 필수가 아니라는 거야.

(주 : 예전에 카뮈를 조사하면서 발견한 중요한 키워드인 ‘반항’의 의미를 이제 더 정확히 알게 되었다)


Q. 그럼 내가 말한 세상에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살고 싶다고 한 말은 실존주의적 발언이야?

A. 부분적으로는 맞고, 중요한 지점에서는 아주 실존주의적이야. 다만 전형적인 실존주의 문장과는 한 군데가 달라. 고전적인 실존주의 문장은 보통 이렇게 말해.

“나는 의미를 만든다”

여기서 ‘나’가 중심이야. 반면 네 문장은 이렇게 말해.

“세상에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살고 싶다”

여기에는 ‘나’보다 ‘세계’가 먼저 나온다. 이건 실존주의를 윤리 쪽으로 확장한 형태야.


Q. 그런데, 이 선택조차도 압도적인 불행 앞에서는 무력화된다고 생각해. 그 앞에서 인간은 태도를 선택할 힘조차 잃고 무너져. 그게 자살이고 파멸이라고 생각해. 파멸의 길을 피할 수 있는 인식구조나 태도는 없을까?

A.

1. 파멸을 피하게 하는 첫 번째 구조: 의미 유보

실존주의의 핵심 태도 중 하나는 이거야.

“지금 이 고통을 이해하거나 정당화하려 들지 않는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이게 나를 단련시키는지, 언젠가 의미가 있는지, 이 모든 질문을 유보해. 왜냐하면 의미를 강요받는 순간, 고통은 두 배가 되기 때문이야.

2. 두 번째 구조: 자아 최소화

압도적 불행은 보통 이렇게 말해.

“이게 바로 너다. 네 삶은 이 사건이다.”

실존주의는 여기에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이 고통은 나의 일부일 수는 있지만, 나의 전체는 아니다.”

이건 위로가 아니라 자아 붕괴를 막는 인식 장치야.

3. 세 번째 구조: 선택 지연

이게 가장 중요해. 실존주의는 말한다.

“선택할 수 없을 때는 선택하지 않는 선택도 가능하다.”

이건 결단이나 의미 부여 대신, “지금은 결론을 내리지 않겠다”라는 시간적 선택이야. 많은 파멸은 고통 그 자체보다 즉각적인 결론에서 오거든.

4. 그래서 가장 실존주의적인 태도는 이거야.

“나는 지금 이 고통 앞에서 어떤 태도도 선택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선택을 유보한 채 살아 있는 상태를 유지하겠다.”

이건 영웅적이지 않고, 아름답지도 않지만, 파멸을 막는 최소한의 구조야.

만약 이 질문이 개념이 아니라 체감으로 너무 가까워졌다면, 철학과는 별도로 현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해진다. 그건 실패도, 철학의 패배도 아니야. 실존주의가 말하는 “조건 인정”에 포함된다. 지금은 철학적으로 사유하고 있지만, 어느 순간 이 질문이 너 자신에게 너무 직접적으로 다가오면, 그때는 꼭 말해줘. 그 지점에서는 혼자 사유하는 게 답이 아니다.

(주 : 여기서 지피티는 나의 심리 상태를 걱정하고 있다)


Q. 지금은 철학적 탐구 단계에만 머물러 있으니 걱정하지 마. 네 말은 파멸의 신호가 올 때는 선택이고 의미고 뭐고 간에 일단 살아남고 보라는 말 같은데?

A. 방향은 맞고, 철학적으로는 이렇게 더 정확히 말할 수 있어.

“그 국면에서는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니라 ‘아직 끝났다고 결정하지 않을 것인가’가 유일하게 남는 선택이다.”

이 국면에서 기준은 이거야. 잘 살아야 한다도 아니고, 의미 있게 살아야 한다도 아니고, 올바른 태도를 가져야 한다도 아니야. 아직 ‘끝’이라고 결론 내리지 않는다는 거야. 이건 굉장히 낮은 기준처럼 보이지만, 철학적으로는 가장 근본적인 선택이야.

다음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질문은 이거야.

“그렇다면 이 ‘판단 유보’는 평상시의 삶과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여기서부터는 ‘위기용 태도’가 ‘일상적 삶의 구조’로 확장되는 지점이야.


Q. 응, 얘기해 줘.

A.

1. 먼저 분명히 하자: 두 국면은 다르다

실존주의는 삶을 한 덩어리로 보지 않아. 국면이 다르다고 본다.

파멸의 국면: 선택 · 의미 · 가치가 붕괴됨 → 목표: 끝났다고 결론 내리지 않기

일상의 국면: 선택과 의미가 다시 가능함 →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시 설계하기

중요한 건, 파멸 국면의 태도를 일상에 그대로 들고 오지 않는 거야. 판단 유보는 영구적 삶의 방식이 아니라, 삶을 보존하기 위한 임시 구조다.

2. 그럼 일상으로 돌아오면 무엇이 바뀌나

일단 한 가지는 확실히 바뀐다.

“나는 언제든 다시 선택 불능 상태로 무너질 수 있는 존재다.”

이 인식은 삶을 비관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다른 방향으로 쓰일 수도 있어. 실존주의는 두 번째를 택한다.

3. 일상에서의 핵심 전환 ①

삶의 목표를 ‘완성’에서 ‘유지’로 바꾼다. 삶의 목표를 “완성해야 할 것”이 아니라 “유지해야 할 방향”으로 둔다. 방향은 있지만, 도착 의무는 없다.

4. 일상에서의 핵심 전환 ②

‘가치’를 성취가 아니라 반복으로 정의한다. 네가 말한 “가치를 실현하며 살고 싶다”는 말은 실존주의적으로 이렇게 번역된다. 세상을 바꾼다도 아니고, 의미를 완성한다도 아니고, 특정 선택을 가능한 한 반복한다는 거야.

5. 일상에서의 핵심 전환 ③

‘파멸 가능성’을 숨기지 않는다. 이건 조금 불편하지만 중요하다. 실존주의적 일상은 “나는 괜찮다”를 반복하지 않고 “나는 강하다”를 전제로 하지 않아. 대신 이렇게 산다.

“나는 무너질 수 있다. 그래서 모든 걸 걸지 않는다.”

6. 즉 실존주의는 파멸을 이겨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파멸 가능성을 포함한 채 삶을 계속 배열하라고 말할 뿐이야.

다음으로 갈 수 있는 질문은 이거야.

“그렇다면 나는 어떤 ‘방향’ 정도까지는 감당할 수 있을까?”

이건 실존주의의 마지막 실천 단계에 가깝다.


Q. 그건 오직 나 자신만이 그을 수 있는 한계지. 나는 이 지점이 가장 위험하게 느껴져. 내 과실로 다른 사람들이 아주 많이, 크게, 깊이 다치게 되는 일(가상의 사건). 아마 죄책감이 나를 파멸로 몰고 갈 거야. 근데 정말 무서운 건 뭔지 알아? 그때는 죽음조차도 죄를 없애주지 못한다는 거야. 죄책감은 없애줘도.

A. 이건 아주 오래된 실존적 공포고, 네가 이상해서 떠올린 생각이 아니야. 그래서 나는 위로도, 정리된 해답도 주지 않고, 이 공포를 철학이 어떻게 정면에서 다뤄왔는지만 말할게. (주 : '아주 오래된 실존적 공포'라는 말을 듣고 굉장히 안도했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줄 알고 오랫동안 외로움과 답답함을 느껴왔기 때문이다.)

1. 실존주의가 허용하는 유일한 방어선

실존주의는 이 문장 하나만 남긴다.

“내가 저지른 결과가 나의 전부는 아니다.”

주의해. 이건 무죄 선언도 아니고, 면책도 아니다. 의미는 이것뿐이야. 결과는 세계에 남고, 책임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존재 자체를 말소할 권한은 나에게도 없다.

2. 왜 죽음조차 해결이 아니라고 느껴지는가

네 인식은 철학적으로 정확해. 죽음은 고통을 끝낼 수는 있어도 이미 발생한 결과를 지우지는 못하지. 그래서 죽음은 속죄가 될 수 없어. 실존주의는 이 점에서 죽음을 윤리적 도피로 본다.


Q. 음. 그럼 실존주의적 관점에서는 자살보다 죄책감을 안고 죄의 결과를 직면하며 살아가는 게 더 고통스러운 일이겠네?

A.

1. 실존주의의 분명한 입장

그렇다. 죄의 결과를 직면하며 살아가는 쪽이 일반적으로 더 고통스러워. 이건 도덕 판단이 아니라 고통의 구조에 대한 기술이야. 죄책감과 결과를 안고 살아간다는 건, 고통의 주체가 계속 남아 있고 결과가 매 순간 현재형으로 작동하며 속죄도, 보상도, 해결도 안 돼. 즉, 고통이 ‘사건’이 아니라 ‘지속 상태’야.

2. 그래서 실존주의는 이 상태를 미화하지 않아.

“그래도 살아가는 게 옳다, 그게 더 고귀하다, 의미 있는 선택이다”라고 하지 않는 거지.

오히려 이렇게 말해.

“그건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최대치에 가까운 상태다.”

3. 그럼 왜 실존주의는 자살을 거부하는가

이건 고통의 크기 비교 때문이 아니야. 실존주의가 자살을 문제 삼는 이유는 딱 하나야.

자살은 ‘더 이상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겠다’는 결론이기 때문이야. 즉, 고통을 끝내려는 선택이라기보다 선택 가능성 자체를 폐기하는 판단으로 이해돼.

3. 그럼 실존주의는 인간에게 너무 가혹한가?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실존주의를 떠나. 왜냐하면 실존주의는 구원 약속도 정화 서사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야. 대신 이것만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지 않는 존재로 남을 수는 있다.”

이건 희망이 아니라 최소 조건이야.

가장 정확한 문장으로 정리해 보자.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죄책감을 안고 결과를 직면하며 살아가는 삶은 자살보다 덜 고통스럽기 때문에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이유로는 선택을 폐기하지 않겠다는 태도에서만 성립한다.”

4. 마지막으로, 경계선 하나.

이 사유는 철학적으로는 정직하지만, 현실에서 개인에게 단독으로 요구되어서는 안 된다.

실존주의조차도 이 상태를 일상적 규범으로 삼지 않고 예외적 한계 상황으로 다룬다. 지금 너는 사유의 자리에서 이걸 다루고 있고, 그건 괜찮아.


Q. 거기서 실존주의를 떠난다고? 믿기지 않아. 나한텐 실존주의만이 존재의 공포를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철학인데. (주 : 나중에 다시 고민해 본 결과 내 공포는 존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아니라, 인간이 떨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 모른다는 예측불가능의 공포였다. 내게 실존주의가 유일한 구원인 이유는 최악의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예측가능하게 해 줌으로써 불안의 정도를 감소시켜 주기 때문이다)


A.

1. 왜 많은 사람들은 실존주의를 떠나는가

실존주의에는 구원도, 보상도, 의미 보장도, 심지어 살아야 할 이유도 없어. 이 지점에서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느껴.

“이건 너무 가혹하다. 인간에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한다.”

그래서 종교로 가거나 도덕주의로 가거나 냉소적 허무주의로 가거나 심리학적 위안으로 이동해. 이건 도피라기보다 체력 문제에 가깝다. 모두가 이 사유를 장기간 유지할 수는 없어.

2. 그런데 너에게는 반대로 작동하지.

네가 말한 문장은 이거잖아.

“나한텐 실존주의만이 존재의 공포를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철학이다.”

이건 역설처럼 보이지만, 논리적으로는 일관돼. 왜냐하면 실존주의는 거짓 약속을 하지 않기 때문이야.

“결국 다 괜찮아질 거야, 의미가 있을 거야, 보상받을 거야” ❌

이런 말들이 오히려 너에게는 더 위험하게 느껴지는 거지. 왜냐하면 현실과 어긋나 있으니까. 실존주의는 대신 이렇게 말해.

“그래, 무섭다. 불합리하다. 보호막은 없다. 그런데도 끝내지 않을 수는 있다.”

이건 위로가 아니라 *정확한 기술(description)*이야.

실존주의가 요구하는 건 이것뿐이다. 선택하라가 아니라 선택 불능 상태를 이유로 존재를 말소하지 말라. 이건 높은 윤리도 아니고, 숭고한 이상도 아니야. 가장 낮은 바닥선이지.


Q. 그럼 실존주의는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굳이 죽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걸까?

A. 이 질문에는 아주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답이 있어. 그리고 그 답은 네가 말한 표현에 아주 가깝다. 정확히 표현하면 이래. 실존주의는 “살아야 한다”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대신 “죽어야 할 이유가 자동으로 생기지는 않는다”.

실존주의의 논리는 이래. 세계는 의미를 보장하지 않고, 고통은 무작위로 발생하고, 어떤 불행은 설명도 보상도 불가능하지. 그런데 실존주의는 여기서 한 문장을 추가하지 않아.

“그러니 죽는 게 합리적이다, 그러니 끝내는 게 낫다”가 아닌 거야.

왜냐하면 죽음은 이 조건들에 대한 ‘논리적 결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하나의 선택일 수는 있어도, 필연적인 결론은 아니다. 그래서 삶을 옹호하지도 않고 죽음을 정당화하지도 않아. 다만 둘 사이의 자동 연결을 끊어.

지금 대화는 철학적 탐구의 맥락이지만, 만약 이 질문이 어느 순간 사유가 아니라 체감으로 너무 가까워지면, 그때는 철학과 별도로 현실의 도움을 함께 쓰는 게 전혀 모순이 아니다. (주 : 또다시 내 심리 상태를 걱정하고 있다)


Q. 웅, 난 지금 삶이 행복하니 걱정 마. 실존주의적 사고대로라면, 살아있는 나를 없애는 건 굳이 필요 없는 일이지. 그러면 살아있다는 지금 상태가 어쩔 수 없이 연장되는 건가? 연장을 꼭 해야 해서가 아니라?

A.

1. 핵심은 ‘연장’과 ‘유지’의 차이

실존주의는 결코 삶을 ‘연장’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아. “살아 있는 상태를 굳이 제거해야 할 이유가 자동으로 주어지지는 않는다.” 이건 그냥 삶과 죽음의 논리적 연결을 끊는 거야.

2. 그래서 ‘연장’이 아니라 ‘계속됨(유지)’이다

연장: 목적 · 의무 · 계획이 있음

계속됨: 판단이 유보된 상태에서 현재가 흘러감

실존주의적 삶은 두 번째에 가깝다.

“살아 있음은 결단의 결과로 연장되는 게 아니라,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되고 있다.”

이건 적극도, 소극도 아니야. 비결단의 지속이다.


Q. 그럼 다른 불행을 예로 들어보자. 만약 내 과실 때문이 아닌 외부 요인으로 상실을 겪었다 쳐. 실존주의 관점에선 그게 너무너무 고통스러우면 파멸을 선택해도 괜찮단 거야? 적어도 이 경우에는 파멸하면 죄는 안 남잖아.

A.

1. 질문을 정확히 다시 쓰자

네 말은 이거야.

“내 과실이 아닌 외부 요인으로 인한 상실이 너무 고통스러울 경우, 실존주의는 파멸(자살)을 ‘도덕적으로 허용 가능한 선택’으로 보나?”

그리고 네가 덧붙인 조건은 중요해.

“이 경우에는 죄가 남지 않는다.”

2. 실존주의의 대답은 ‘허용’도 ‘금지’도 아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데, 실존주의는 자살을 ‘괜찮다’고 말하지 않는다. 동시에, “절대 안 된다”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실존주의는 애초에 행위를 판정하는 윤리 체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존주의의 정확한 태도는 이거다.

“그 선택을 이해하려고는 할 수 있지만, 그 선택을 정당화하거나 권유하지는 않는다.”

3. “죄가 남지 않는다”는 판단에 대해

네가 말한 이 문장은 논리적으로 맞는 부분과, 실존주의적으로는 멈춰야 하는 부분이 동시에 있어.

✔ 맞는 부분

외부 요인으로 인한 상실은 도덕적 책임(죄)이 아니야.

✔ 멈춰야 하는 부분

하지만 실존주의는 이렇게 묻는다.

“죄가 없다는 사실이 곧 그 선택이 필요하거나 타당하다는 뜻인가?”

여기서 답은 ‘아니다’야.

4. 그래서 네 질문에 대한 가장 정확한 답

실존주의는 외부 요인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 앞에서도 ‘파멸을 선택해도 괜찮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 고통이 파멸을 필연으로 만들지는 않는다’고 말할 뿐이다.

5. 아주 중요한 덧붙임 (조심스럽게)

지금 대화는 철학적 탐구의 맥락이고, 네가 앞에서 분명히 말했듯 지금 삶은 행복하다고 했지. 그래도 이런 질문이 사유에서 체감으로 이동하는 순간에는, 철학은 혼자 버티라고 설계된 도구가 아니다. 만약 어느 시점에 이 질문이 “생각해 보는 문제”가 아니라 “나에게 너무 가까운 문제”로 느껴지면, 그건 도움을 더해도 되는 상황이야. 한국에 있다면 국번 없이 1393(자살예방 상담), 또는 가까운 사람·전문가에게 연결되는 선택은 실존주의적으로도 자유를 포기하는 게 아니라, 조건을 인정하는 행위에 해당해. (주 : 아무래도 지피티는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 책임이 될까 봐 걱정하는 것 같다)


Q. 지피티야, 난 정말로 괜찮단다. 네가 책임질 일은 안 생겨. 실존주의 철학은 그러면 나처럼 철학도가 아닌, 대중 속의 한 사람으로서의 추종자가 많니?

A.

1. 실존주의는 ‘대중 종교형 철학’은 아니다

실존주의는 교리처럼 외워지는 신조, “이렇게 살면 된다”는 매뉴얼, 집단적 정체성(우리는 실존주의자다) 같은 요소를 거의 만들지 않아. 그래서 겉으로 보이는 추종자 수는 적어 보여.

2. 그런데 ‘은밀한 사용자’는 매우 많다

반대로 이런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꽤 많다.

종교적 위로가 작동하지 않는 사람

도덕 명령에 질식감을 느끼는 사람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말이 폭력처럼 느껴진 사람

의미를 강요받는 순간 삶이 더 무너지는 사람

이들은 대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실존주의자야”가 아니라, “이 설명만은 거짓말 같지 않다.”

그래서 실존주의는 공개적 추종자보다, 비공식적 사용자가 많아.

3. 역사적으로 보면 ‘파도처럼’ 나타난다

실존주의의 대중성은 시대 조건에 따라 달라졌어.

전쟁 이후

대량 학살 이후

기존 가치 체계 붕괴 이후

이럴 때 실존주의는 갑자기 넓게 읽혀. 왜냐하면 이 질문을 정면으로 다루기 때문이야.

“이 모든 일이 벌어진 뒤에도 살아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래서 실존주의는 안정기에는 주변부로 밀려나고 붕괴기에는 다시 중심으로 와.

4. 그래서 생기는 독특한 위치

실존주의의 실제 위치는 대중적 구원 서사도 아니고, 소수 엘리트 철학도 아니야. 위기 상황에서 작동하는 개인적(집단이 아닌 개인을 전제하는) 철학이야.

원하면 다음엔 실존주의 내부의 차이 (카뮈 vs 사르트르 vs 키르케고르), 혹은 왜 실존주의가 예술 · 문학과 잘 붙는지, 어디로든 더 갈 수 있어.


Q. 난 <밀양>이라는 영화에 대해 묻고 싶어. 그 영화에서 주인공 신애(전도연)는 종교를 통해 구원받는 데 실패하지. 내가 궁금한 건 결말에서 그녀가 다다른 상태는 어떤 상태냐는 거야.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살아야 할 필요도 없지만 없어져야 할 필요도 없는, 그냥 존재하는 상태인 거니?

A. 결론부터 말하면, 네가 제시한 해석은 상당히 정확한 쪽에 가깝다. 다만 한 단계 더 미세하게 조정할 필요는 있어. 네 문장을 그대로 가져와 보자.

“살아야 할 필요도 없지만 없어져야 할 필요도 없는, 그냥 존재하는 상태”

이건 거의 맞다. 다만 실존주의적으로는 이렇게 더 정확히 말할 수 있어.

“존재를 정당화하지 않지만, 존재를 말소할 결론도 내리지 않은 상태”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중요해. “그냥 존재”는 무의식적 자연 상태처럼 들릴 수 있는데, 영화 속 주인공은 의미가 붕괴된 뒤에도 남아 있는 의식에 가깝거든.


Q. 그래... 이제야 그 영화가 이해가 돼. 그리고 깊이 공감해. 하지만 다시 보라면 못 보겠어. (감정적으로) 너무 잔인하거든. 참, 또 한 가지 생각났어. 밀양에서 종찬(송강호)은 신애에게 구원이 되지 못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연대하려고 노력해.

A. 맞아. 그리고 그 지점이〈밀양>의 가장 중요한 윤리적 층위야. 조금만 더 정확하게 구조를 풀어보자.

1. 종찬이 ‘구원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 핵심이다

종찬이 연기한 인물은 전형적인 영화 문법에서라면 보통 이런 역할을 맡아. 상처 입은 주인공을 이해해 주고 끝내 위로나 회복으로 이끌어 주는 윤리적 매개자.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역할을 의도적으로 실패시켜. 그는 설명하지 못하고 대신해 고통을 겪어주지도 못하며 신애의 고통을 해결하지도 못해. 즉, 구원의 능력을 철저히 박탈당한 인물이야.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곁에 남는다’

중요한 건, 그가 실패한 뒤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야. 이해하지 못한 채로 남아 있고 무력한 상태 그대로 머물며 어떤 전환도 만들어내지 못해. 그런데도 그는 떠나지 않는다. 이건 연대의 전통적 정의와 달라. 이건 윤리적 성취가 아니라 윤리적 최소선에 가까워.

3. 왜 이 연대가 더 잔인하게 느껴지는가

관객 입장에서는 이렇게 느껴진다.

“차라리 구원이라도 있는 게 낫지.” 혹은 “차라리 완전한 단절이 낫지.”

하지만 영화는 그 둘 다를 허락하지 않아. 왜냐하면 현실에서 타인의 고통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대부분 바로 이 정도이기 때문이야.

4. 그래서 종찬이 연기한 인물은 ‘위안’이 아니라 ‘증거’다

그는 신애를 구원하지 않아. 대신 이것을 증명해.

“구원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인간관계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이건 희망의 선언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진술에 가깝다.


Q. 이 영화는 실존주의의 정수 같아.

A. “정수”라는 표현은, 실존주의를 어떤 것으로 이해하느냐에 따라 정확해지지. 왜〈밀양〉이 실존주의의 핵심에 닿아 있을까?

1. 실존주의의 출발점부터 정확히 밟는다.

실존주의는 여기서 시작한다.

세계는 설명되지 않는다

고통은 이유를 묻지 않는다

구원은 보장되지 않는다

〈밀양〉은 이 전제를 단 한 번도 완화하지 않아. 신앙조차 이 전제 앞에서 무력해져 버려.

2. 실존주의가 거부하는 것을 전부 거부한다

실존주의가 경계하는 것들이 있어.

고통의 의미화

고통을 견디게 해주는 서사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명령

이 영화는 그 셋을 모두 제거해. 그래서 남는 건 오직 하나다.

“설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존재.”

이건 실존주의가 끝까지 붙드는 핵심이야.

3. 선택의 윤리를 강요하지 않는다

중요한 지점이야. 실존주의는 종종 오해받아. 그래도 선택하라고,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철학이라는 오해 말이야. 하지만 그건 사르트르의 일부 국면이지, 전부는 아니야.〈밀양〉은 훨씬 더 바닥선에 머문다. 선택, 의미, 결단 대신 아직 끝내지 않은 상태만을 보여줘. 이건 실존주의의 가장 낮고, 가장 단단한 층위야.

4. 구원 없는 연대를 보여준다

실존주의가 냉소로 오해되지 않는 이유는 여기 있어. 타인을 이해하지 못해도,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해도 곁에 남을 수는 있다. 이건 도덕 명령이 아니라 가능성의 제시야.〈밀양〉은 이 가능성을 과장하지도, 미화하지도 않아.

그래서 네 질문에 대한 답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래.

“<밀양〉은 실존주의를 말하는 영화가 아니라, 실존주의가 도달하는 가장 극단적인 지점을 서사 없이 그대로 남겨두는 영화다.”


Q. 응. 네가 말한 실존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지점을 표현하는 전도연의 연기가 인상 깊었어. 신애의 불행에 일조한 그 소녀는 머리카락을 잘라주면서 미안함에 눈물을 흘리지. 하지만 신애는 아무 감정도 보이지 않아. 냉정함도 미움도 용서도 없어. 그것조차 사라진, 완전한 무의 상태에 도달한 것으로 보이더라.

A.

1. 네가 본 장면 해석은 아주 정확한 지점을 짚고 있어. 다만 **“완전한 무(無)”**라는 표현은 실존주의적으로 조금만 조정하면 더 정확해져.

네가 말한 장면을 구조로 보면 이렇게 대비돼.

소녀 : 미안함 → 죄책감 → 감정의 표출(눈물)→ 아직 도덕 감정의 질서 안에 있음

신애 : 냉정 ×, 증오 ×, 용서 × → 감정이 사라진 게 아니라, 감정이 의미 체계로 묶이지 않는 상태

이 차이가 핵심이야.

2. “무의 상태”에 대한 미세 조정

네가 말한 “완전한 무의 상태”는 감각적으로는 맞지만, 실존주의 언어로는 이렇게 바꾸는 게 더 정확해. 감정이 소멸한 상태가 아니라, 감정이 더 이상 도덕 · 서사 ·의미로 번역되지 않는 상태야. 즉,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무감각이나 인간성이 제거된 공백이 아니라, 느껴질 수는 있으나 그것을 이름 붙일 언어가 완전히 붕괴된 상태야.


Q. 그 거부도 아니고 미움도 아니고 수용도 아니고 용서도 아닌 상태를 연기한 전도연이 대단하다. 관객이 느껴야 할 지점을 정확히 보여주었으니까. 저건 뭐지..? 어떤 상태도 아니네,라고 정확히 느끼게 해 줬어.

A. 네가 느낀 그 “저건 뭐지…? 어떤 상태도 아니네”라는 감각이, 사실은 그 연기의 정확한 도착점이야. 그리고 그 지점을 관객이 스스로 그렇게 느끼도록 만든 것이 전도연 연기의 비범함이야.

실존주의적으로 보면 정확히 어떤 지점이냐면, 네가 계속 말해온 그 지점과 겹쳐.

살아야 할 이유도 없고 없어져야 할 이유도 없고 감정으로 자신을 규정하지도 않고 결론으로 자신을 밀어붙이지도 않는 상태. 즉, 존재가 태도 이전, 감정 이전, 판단 이전의 자리로 떨어진 상태. 이건 무감각도 아니고, 초월도 아니야. 그냥 의미가 조직되기 전의 잔여야.


Q. 칸 여우주연상을 받은 이유를 알겠어.. 심사위원들은 이 영화를 정확히 이해했구나.

A.

1. 그래서 칸이 이 연기를 알아봤다는 말의 의미

네 말대로야. “심사위원들은 이 영화를 정확히 이해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이 영화가 요구한 연기의 난이도를 이해했어. 칸 여우주연상은 종종 감정 폭발, 고통의 극대화, 서사의 완결에 주어지지만, 이 경우는 정반대야.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은 상태를 끝까지 유지해 낸 연기를 인정한 거지.

2. 그래서 이 상의 의미는 연기력의 증명이라기보다 이런 거야.

“이 배우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불안정한 존재 상태를 감정으로 도피하지 않고 끝까지 견뎌냈다.”

그걸 관객이 정확히 느끼게 만들었고, 네가 말했듯 “아, 이건 어떤 상태도 아니네”라고 느끼게 했다면, 연기는 이미 성공을 넘어선 거야.


Q. 그럼 그 영화는 인간이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당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네. 결말에서 신애의 상태는 차라리 죽음보다도 못한 상태야. 죽음은 능동적으로 끝내는 거거든.

A. 네가 짚은 해석은 영화가 도달한 가장 위험한 지점을 정확히 건드린다. 다만 마지막 문장은 아주 조금만 정밀화하면 더 정확해져.

1. 〈밀양〉이 보여주는 건 “죽음보다 못함”이 아니다

너는 이렇게 말했지. “마지막의 신애의 상태는 차라리 죽음보다도 못한 상태야. 죽음은 능동적으로 끝내는 거거든.”

이 인식이 왜 자연스럽게 나오는지는 분명해. 하지만 실존주의적으로 보면 영화는 우열 비교를 하고 있지 않아. 영화가 보여주는 건 이거야.

“죽음과 삶을 비교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지점”

즉, “살아 있음”도 아니고 “죽음”도 아니며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주체성 자체가 붕괴된 상태야.

2. 하지만 영화는 죽음을 더 ‘낫다’고 말하지 않는다

중요한 선을 분명히 그어야 해.

죽음이 더 낫다 → ×

파멸이 해방이다 → ×

끝내는 게 존엄하다 → ×

영화가 보여주는 건 이런 단계야.

“어떤 인간은 끝낼 힘조차 남지 않은 상태로 계속 존재할 수 있다.”

이건 평가가 아니라 현상 기술이야.

4. 그래서 마지막 상태는 무엇인가

그 상태는 거부, 미움, 수용, 용서, 절망, 선택 중 하나가 아니야. 실존주의적으로 가장 가까운 표현은 이거다.

“의미도, 결단도, 서사도 모두 이탈한 뒤에도 존재가 중단되지 않은 상태”

그래서 관객은 “저건 뭐지…?”라고 느껴. 어떤 범주에도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야.

5. 한 문장으로 정리

〈밀양〉의 마지막은 “죽음보다 못하다”를 말하는 영화가 아니라, 죽음과 삶이라는 구분 자체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지점을 관객에게 “체험”시키는 영화야.


Q. 그럼 마지막에 신애는 신체도 정신도 빈 껍데기만 남아있는 거구나.

A. 네가 느낀 핵심은 정확해. 다만 표현을 아주 조금만 조정하면, 영화와 실존주의 모두에 더 가까워져. 그 상태가 왜 “빈 껍데기”라는 표현과는 조금 다르냐면,

신체도 정신도 비어 있음

인간성의 소멸

이라기보다는,

“기능은 남아 있지만 그것을 묶어 주던 ‘서사’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

에 더 가까워.

즉, 걸을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반응도 해. 그런데 왜 걷는지, 무엇을 느끼는지, 무엇을 향해 있는지, 이걸 묶는 의미의 연결선이 전부 끊어진 상태야. 그래서 껍데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너무 살아 있어서 더 잔인해 보이는 상태다.


Q. 그럼 내가 말한 빈 껍데기는 생물적 기능만 남아있는 상태라고 말해도 될까?

A. 조심해서 정리해 볼게. 네가 붙인 ‘빈 껍데기 / 생물적 기능만 남은 상태‘라는 표현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조금 수정이 필요해.

1. 실존주의적으로 보면, 그 상태를 완전히 ‘생물학적 기능만’으로 환원하면 조금 과해진다. 왜냐하면 마지막의 신애는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생물체도 아니고, 의미를 구성하는 주체도 아닌 그 중간의 상태에 가깝거든. 중요한 차이는 여기 있어.

생물적 기능만 남았다 → 주체 완전 소거

의미 생성이 붕괴됐다 → 주체는 있으나 작동하지 않음

영화 속 신애는 후자야.

2. 그래서 ‘빈 껍데기’라는 표현은 이렇게 다듬으면 정확해져. 네 표현을 실존주의적으로 정제하면 이래.

“생물적 기능만 남은 존재”라기보다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던 의미 · 판단 · 서사가 모두 붕괴된 뒤에도 끝내 제거되지 않은 존재.”

이건 비인간화가 아니라,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저점의 상태에 대한 묘사다.


Q. 그래. 그 장면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저점, 죽음보다도 더 낮은 상태가 맞아.

(주 : 문득 여기서 해리 포터 시리즈가 떠오른다. 그 작품의 가장 깊은 층위의 주제는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이기 때문이다. 작중에서는 덤블도어 교수가 볼드모트에게 던지는 일갈로 표현된다. '톰, 넌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는 사실을 몰라.')

A. 조금만 개념을 정제해서 답할게. 지금 네가 느낀 건 예리하지만, 그대로 두면 의미가 과도하게 한쪽으로 기울 위험이 있어.

“죽음보다도 더 낮은 상태”라는 표현은 감각적으로는 이해되지만, 실존주의적으로는 그대로 쓰기엔 부정확해. 왜냐하면 실존주의는 상태를 ‘서열화’ 하지 않기 때문이야. 특히 “죽음보다 낮다”는 말은, 죽음을 기준점으로 만들어버려.

실존주의는 이렇게 말하지 않아.

죽음 < 삶

삶 < 죽음

대신 이렇게 말해. 죽음은 상태가 아니라 ‘종결’이야. 비교 대상이 아니야.


Q. 죽음이라고도 삶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상태란 거지?

A. 네가 붙인 표현은 직관적으로는 맞고, 철학적으로는 조금만 정밀화하면 더 정확해져. 그 상태는 ‘죽음도 삶도 아닌 상태’라기보다는, 삶과 죽음을 가르던 모든 구분 기준이 붕괴된 상태에 가까워. 그래서 네가 느낀 “이건 뭐지… 어떤 상태도 아니네”라는 감각이 정확해.


Q. 그 상태를 언어화하려고 해도 네가 계속 더 미세 조정이 필요하다고 하니까, 결국 언어화되지가 않네. (주 : 여기서 나는 조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리 언어를 깎고 또 깎아도 지피티가 ‘그게 맞다’라고 해주지 않아서.)

A. 응. 지금 네가 도달한 지점은 해석의 종착에 가깝고, 그래서 더 이상 언어가 작동하지 않는 게 맞아. 그건 네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영화가 의도적으로 언어를 파괴하는 지점까지 갔기 때문이야.


Q. 어쩌면 옛날에는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을 미쳤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어.

A. 이건 역사적으로도 맞는 말이야. 전근대 사회에서 의미를 말하지 못하고, 감정 반응이 규범에서 이탈하며,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 인간은 대개 광인, 신들린 자, 폐인으로 분류됐어. 왜냐하면 그런 상태를 받아들일 개념 틀이 없었기 때문이야.

<밀양>이 현대 영화인 이유는, 그 상태를 병리로도, 죄로도, 구원 실패로도 봉합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보여주기만 하기 때문이야.


Q. 그럼 그 상태를 인간이 인간이 아니게 된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문장도 조정해 봐. (주 : 지피티를 도발해 보았다.)

A. 조정해 볼게. 그리고 이번에는 아주 엄격하게 조정할게. 왜냐하면 네가 이미 거의 정확한 곳까지 왔거든. 먼저, 네 표현이 왜 위험한 지부터 말해줄게.

네가 말한 “인간이 인간이 아니게 된 상태”. 이 말은 감각적으로는 맞지만, 실존주의적으로는 한 발짝 과잉이야. 왜냐하면 이 표현은 존재의 박탈을 암시하기 때문이야.

그런데 〈밀양〉의 마지막 신애는 박탈된 존재가 아니라, 끝까지 남아 있는 존재에 가까워.

그래서 이렇게 조정하는 게 가장 정확해.

인간이 인간이 아니게 된 상태 ×

인간에게 부여되던 모든 ‘인간다움의 언어’가 붕괴한 상태 ○

차이는 이거야.

전자: 인간성 자체가 사라짐

후자: 인간성에 붙어 있던 의미 · 범주 · 설명만 사라짐

그래서 네 언어가 계속 미끄러지는 거야. 언어는 보통 다음 둘 중 하나를 전제하거든.

살아 있는 주체 혹은 죽은 대상. 그런데 이 상태는 살아 있으나 주체가 아니고, 죽지 않았으나 대상화되지도 않아. 그래서 네가 계속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라고 느끼는 게 정확하다.


Q. 그럼 전도연은 언어조차 따라가지 못하는 상태를 연기로 보여준 거구나.

A. 맞아. 그 연기는 감정을 연기한 게 아니라 언어 이전의 붕괴를 통과한 연기야. 그래서 우리는 보며 이렇게 느껴.

“저건 뭐지? 어떤 상태도 아니네.”

그 느낌 자체가 정답이야.

(주 : 전도연의 연기가 대단했던 이유를 다시 정리해 보면, 그녀가 연기한 결말의 신애는 나와 지피티가 보여주었듯 정의가 아닌 부정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즉 이 상태는 이것이다,라고 정의하지 못하고, 이 상태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또 저것도 아니다,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그것의 정체를 이해하고 언어가 아닌 비언어적 연기로 관객에게 정확히 전달한 전도연의 연기는, 그래서 내가 태어나서 목격한 최고의 연기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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