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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Mar 20. 2023

철없는 환자

갑상선 암 수술 후기입니다

(글에 앞서, 갑상선 암으로 투병 중이신 모든 분들의 완치를 기원합니다)     


지금으로부터 벌써 5년 전. 오랜만에 집에 놀러온 친구가 신나게 수다를 떨다 말고 내 목을 가리키며 물었다.

“근데 니 목에 그 혹 같은 건 뭐고?”

나는 의아한 얼굴로 손을 뻗어 목을 더듬었다. 무언가 크고 둥글고 뭉근한 것이 만져졌다.

“거울 좀 봐봐. 그거 엄청 큰데?”

친구의 채근에 손거울을 가져와 목을 비춰보았다. 이럴 수가. 나도 몰랐던 어마어마한 크기의 혹이 내 오른쪽 목덜미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둔해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거대한 혹의 존재를 모를 수 있었는지 나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은 아주 오랜 시간을 두고 서서히 덩치를 키워왔을 테고, 나는 당연히 매일 보는 내 신체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2년 전 정기 건강검진 때 병원에서 목에 혹이 있다고 얘기해주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때 조직검사 결과가 양성종양으로 나왔기에, 혹의 존재를 까맣게 잊었던 것이었다.


급히 그때 검사받았던 병원에 가서 다시 조직검사를 받았다. 당연히 이번에도 별거 아니겠거니 하는 생각에 걱정도 하지 않고 지내던 중,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박세온 씨 되시죠? 조직검사 결과가 나왔어요. 내일 2시에 내원하시면 설명해드릴게요.”


병원이었다. 그런데 문자가 아닌 전화를, 게다가 간호사님이 아닌 원장님의 연락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결과에 이상이 없다면 이렇게 별도로 연락할 필요가 없을 터.


“네? 그럼 혹시... 암으로 나온 건가요?”

“네... 그런 것 같습니다.”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는 폰을 손에 쥐고 그대로 얼어버렸다.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가려 노력했다.


“그..근데 꼭 내일 2시에 가야 하나요? 그때는 제가 시간이 안 되는데요...”

뱉어놓고도 나 자신도 어이없는 대답이었다.

“아니, 지금 그게 말이 됩니까? 지금 암인 것 같은데 이 일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딨습니까?”

역시나 의사 선생님이 황당해하며 호통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황망히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한동안 멍하게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암? 암이라고? 내가?

눈앞에는 당시 6개월 아기에 불과했던 딸아이가 꼬물꼬물 배밀이를 하고 있었다. 치발기를 잡고 평화롭게 놀고 있는 아기의 모습을 보자 왈칵 눈물이 솟아났다.

‘저 어린 것을 두고 어떻게 가나.’


갑상선 암으로 생명까지 잃는 경우는 드물다는 사실을 알기 전이었기 때문에 했던 생각이었다(물론 갑상선 암도 종류에 따라서 굉장히 예후가 좋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결코 이 암을 가볍게만 여기면 안 됩니다).




혼비백산해 달려온 남편과, 친정 아빠와, 시부모님에게까지 전화를 돌리며 난리법석을 떨고 나서, 우선 큰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하기로 했다. 부산에 계신 시부모님은 당장에 아기를 데리고 내려오라고 하셨다. 두 분이 아기를 봐주실 동안 나와 남편은 부산의 대학병원을 돌아다니며 수술 상담을 받았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선택한 곳은 서울이었다. 해당 병원은 알아보니 갑상선에 관해서는 우리나라 최고라고 했다. 그다지 어려운 수술이 아니니 그냥 울산이나 부산에서 받으라는 조언도 많았고 실제로 근처의 대학병원에도 아주저명한 교수님들이 많이 계셨지만, 나는 서울을 선택했다. (집에서 가까운 병원에서 수술받는 것도 좋은 선택입니다. 간병하는 가족들이 왔다갔다 하거나, 경과 보려고 내원할 때 아주 편하거든요.)


서울에 가서 다시 조직검사를 해보니, 정확한 결과는 ‘여포성 종양’이라는 것이었다. 교수님의 설명에 따르면 여포성 종양은 오직 수술을 통해 혹을 꺼내어 검사해보아야만 암 여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단계였다. 암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기쁘고 다행스러웠다. 그리고 혹시 생명에 지장이 있을 수도 있냐고 여쭤보니, 교수님은 그럴 일은 거의 없을 거라고 하셨다. 나는 그 두 가지 사실을 알고 평소의 정서 상태를 회복했다. 집에 돌아간 나는 아기의 귀에 속삭였다. 수빈아, 다행이다. 엄마 어디 안 간다.




이제 수술 준비만 하면 되었다. 적어도 수술 당일에는 보호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남편이 휴가를 냈다. 수술 날짜가 금요일이어서 휴가를 많이 내지 않아도 되는 것도 다행이었다.


아기는 시부모님께 맡기기로 했다. 당시 두 분이 자영업을 하고 계셨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만약 시부모님이 직장에 매여 계셨다면 급하게 도우미라도 찾아야 할 상황이었기에, 하늘이 나를 돕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수술 전 완수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과제가 있었다. 바로 모유 수유를 끊는 것이었다.

맨 처음 내가 목표한 수유 기간이 6개월이었기에 목표는 달성했지만, 할 수 있다면 더 지속하고 싶었다. 모유 수유를 통한 아기와의 교감은 대단히 행복한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소 3일은 입원해야 하는 상황에서 수유를 계속할 수는 없었다. 나는 몹시 감상에 젖은 상태로 단유 과정을 밟았다.




드디어 입원하는 날이 왔다. 교수님의 소견을 들은 이후 나는 별다른 걱정 없이, 요즘 말로는 머리가 꽃밭인 상태로 하루하루를 지냈던 터라, 동행하는 남편의 마음도 비슷해 보였다. 부부가 육아에서 벗어나 둘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너무나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몹시 들떠 있었다. 마치 서울에 놀러가는 것 같았다. 수술에 대해서는 전혀, 일 퍼센트도 걱정되지 않았다.SRT 안에서도 남편은 세상 편하게 잠을 잤고, 나는 그동안 너무 읽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어 읽지 못한 책을 읽으며 아주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서울에 도착한 우리는 입원이 가능한 가장 늦은 시간까지 데이트를 즐기기로 했다. 가로수길에 가서 맛집으로 유명한 식당에서 밥을 먹고, 근처의 핫케이크 전문점에서 실컷 후식을 즐겼다. 그때의 핫케이크 맛은 가히 내 인생 최고였다. 우리는 메이플시럽을 듬뿍 뿌리고 아이스크림을 얹은 그 달콤한 음식을 입에 가득 넣고는 아주 행복해했다.


입원해서도 우리는 침대 커튼을 쳐놓고 같이 영화나 예능을 보며 수술 전야를 즐겼다. 남편은 그렇다 치고, 당사자인 나는 어떻게 그렇게 신이 났냐고? 원래 나는 아픈 것도 별로 무서워하지 않고 치료 결과도 걱정하지 않는 성격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교수님이시니 알아서 잘 해주시겠지. 그런 생각으로 오랜만의 여가를 즐기기에 바빴다.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내 이름이 불렸다. 수술 순번이 앞쪽에 있었나 보았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직전 침대에 누워서 기다리고 있는데, 천장에 붙은 성경 글귀가 보였다. 아마도 수술 전 불안해하는 환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문구인 것 같았다. 나에게는 딱히 그 문구가 필요하지 않았다.


수술실에서 전신마취에 들어가기 직전이 되어서야, 나에게도 불안감이 엄습했다. 흔히 받아봤던 내시경 시술 시의 수면마취와는 느낌이 달랐다. 이렇게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면 난 어떤 상태가 되어 있을까? 많이 아플까? 서울에 올라온 후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시, 나는 이내 의식을 잃었다.




두 시간 후, 나는 목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통증으로 인해 깨어났다. 정말 아팠다. 엄청나게 아팠다. 너무 아파서 으으윽 소리가 절로 나왔다. 어렴풋한 의식이었지만 바로 옆에 간호사님이 계신 것이 느껴졌다.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내뱉으며 나는 간신히 성대를 움직여 말을 했다.

“선생님... 너무... 아파요... 진통제 좀... 놔주세요...”

아파서 죽을 것 같은 나와 달리 간호사님은 아주 매끄럽고 명료한 어조로 대답했다.

“진통제는 병실로 올라가서 맞으시는 게 나을 거예요. 잘 깨어나셨네요.”

어차피 주는 진통제면 지금 놔주신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나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질문은 격렬한 통증에 묻혀버렸고 나는 다시 아악, 으윽, 하는 신음만 낼 따름이었다.


잠시 후 나는 병실로 옮겨졌고, 걱정이 가득한 남편의 얼굴이 보이는 듯 하더니 왼쪽 팔에 링거가 꽂히는 게 느껴졌다. 드디어 간절히 소원하던 진통제가 투여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다행히 그 효과는 대단했다. 금세 통증이 잦아들더니,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안정을 찾았다.


수술 후 처음 먹은 것은 미리 정해둔 아이스크림이었다. 인터넷에서 목 통증이 심하니 차갑고 부드러운 것을 먹으면 좋다는 얘기를 많이 봤기 때문이었다. 남편이 공수해 온 아이스크림을 조심스럽게 삼키고, 몇 시간 후 식사로 제공된 죽도 큰 문제 없이 넘겼다. 나는 회복이 빨랐다.


다음날이 되자 마치 수술 전날처럼 남편과 다시 신나게 얘기할 수 있을 정도의 상태가 되었다. 아직 목소리가 뚜렷하게 나오지는 않았지만, 수술 부위가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다시 머리가 꽃밭인 부부로 돌아가 준비해 온 영화를 세상 재미있게 보았다. 그리고 그다음 날 바로 퇴원했다. 퇴원하던 날, 병원 근방의 미국식 중식당에서 먹은 볶음밥은 굉장히 맛있었다.




집에 내려온 지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내 목에 자리했던 혹의 정체가 밝혀졌다.

“음...중증으로 등록되실 것 같아요.”

 이번에는 꽤 크게 낙담했다. 분명 암이 아닐 거라 기대했었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결과였다. 남편과 가족들 역시 크게 실망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내 마음을 바꿔 먹었다. 내 수술 결과는 좋은 측면이 훨씬 더 많았다. 우선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림프절을 비롯한 그 어디에도 전이가 되지 않아서 항암 치료를 받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왼쪽 갑상선은 멀쩡해서, 오른쪽만 떼어내는 반절제로 끝낼 수 있었다. 먹는 것도 딱히 가릴 필요 없었다.


남편은 내가 어쩌면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슬픈 모양이었다. 하지만 난 별로 개의치 않았다. 우선 약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었고, 그 약이 대중화되어 그리 비싸지도 않다는 사실도 고마운 일이었다.


다만 가끔, 아침에 신지로이드를 삼킬 때면, 이 작은 알약 하나에 내 생명이 달려있다는 사실에 경이로우면서도 씁쓸한, 말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을 느낄 때가 있었다. 만약, 정말 만약이지만 모종의 사태로 약 공급이 중단되어 구할 수 없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될까.


다행스러운 건, 그런 복잡미묘한 감정에 오래 빠져있을 겨를도 없게 정신없이 바빴다는 점이다. 수술을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아기가 사경(목이 한쪽으로 기우는 질환) 진단을 받았다.




사경 전문으로 유명한 물리치료센터는 해운대에 있었다. 치료를 위해 일주일에 3~4일은 시댁에서 생활하거나, 카시트에 아기를 태우고 고속도로를 왕복했다. 센터에 다녀온 후에도 끊임없이 아기를 운동시켜야 했다. 그 모든 과정이 너무나 힘들었다.


아기의 질환 앞에서 나의 몸 상태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시키는 대로 약만 먹을 뿐, 내가 암 환자라는 것에 대한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같이 수술을 받은 환우들은 그게 아니었다. 단톡방에서 그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자신에게 이런 병이 왔다는 사실에 대해 상당히 힘들어하고 있었다.


나도 아기를 키우고 치료하는 일이 아니었다면 그분들과 같은 마음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보다 시간이 많았을 것이고, 그 시간을 내 병에 대해 되새김질하듯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우울해하고, 좌절하며 보냈을 것이다. 내 성격으로는 틀림없을 일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나쁜 일이 생겨도 그 일에 대해 어떠한 판단과 생각도 하지 않고, 최대한 다른 일에 몰두하면 덜 힘들어진다는 것을 말이다. 나쁜 일 자체보다는 그것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더 중요한 것이었다. 설사 누가 봐도 힘든 상황이 닥쳤다고 해도 반드시 고통스러워해야 할 필요는 없다. 힘들어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정상은 아니다.


나와 남편이 수술 전날 데이트를 즐긴 것도 그렇다. 결과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안절부절 불안해하느니, 내게 주어진 잠깐의 휴식을 만끽하고 싶었다. 혹자는 이런 나를 두고 철없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마음먹었기에, 수술에 대한 기억이 나쁘게만 남지 않을 수 있었다.




5개월 간의 노력 끝에 아기는 완치 판정을 받았고, 나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갑상선은 6개월이나 1년에 한 번씩 서울의 병원을 방문해 경과를 지켜보았고, 아직까지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결과를 받았다. 지금이 3월이니 벌써 수술한 지 5년째다.


아직도 약은 꼬박꼬박 챙겨 먹어야 하지만, 그 외에 달라진 건 별로 없다. 목의 흉터도 이제 오른쪽이었는지 왼쪽이었는지 헷갈릴 정도로 희미해졌다. 같은 병을 겪은 지인들도 만났다. 요즘엔 갑상선 암 환자들이 너무 많아져서 어딜 가나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분들도 열심히 살고 계신다.


나도 주치의 교수님이 더 이상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실 때까지 꾸준히 검진을 받으며 건강에 더욱 신경 써야 하겠다. 혹시나 갑작스레 갑상선 암 진단을 받아 낙심해 계신 분께 나의 후기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참, 혹을 발견해준 생명의 은인(?)인 친구에게는 깊은 감사를 표하며 사례했다. 친구야, 다시 한번 정말 고마워. 복 받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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