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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Apr 30. 2023

내 분실물의 역사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주 덜렁거리는 성격으로, 툭하면 물건을 잃어버리고 다녀서 부모님의 걱정을 샀다. 그 헐랭함은 어른이 되어도 변치 않아서, 내가 하루에 하나도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리는 것이 없으면 남편이 걱정한다. 그런 날은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거다. 반대로 내가 무언가를 빼먹으면, 그제서야 남편이 안도한다. 지극히 정상이란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살아오면서 내가 잃어버린 물건들 중 대표적인 것들만 간추려 적어보려고 한다. 그래도 꽤나 양이 많다.     




1. 집 열쇠

어렸을 때 살았던 집은 당연한 얘기지만, 지금처럼 도어락 장치가 없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나는 엄마가 준 열쇠를 주구장창 잃어버렸다. 얼마나 자주 잃어버렸는지 횟수도 기억이 안 날 정도다. 물론 그때마다 야단을 맞았지만, 나라는 아이는 열쇠를 간수하지 못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난 걸 어찌하나.     


엄마는 열쇠를 줄에 매달아주며 목에 걸고 다니도록 했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그것조차 잃어버렸던 것 같다. 그날 나는 문 잠긴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근처 벤치에서 훌쩍거리며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이웃집 아주머니가 자신의 집으로 나를 데려가서 엄마가 올 때까지 기다리게 해주었다.     


엄마는 아주머니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했고,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아마도 나에게는 깊은 가르침을 주었던 것 같다. 아, 어린 시절의 나야. 네가 그날의 고난을 잘 견디어서 지금 내가 이렇게 브런치에 글도 쓰고 있구나.     


2. 파란 점퍼

그냥 점퍼도 아니고 파란 점퍼다. 이 옷이 어떻게 생겼었는지 30년이 가까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이 이야기는 나름 눈물 없이는 얘기할 수 없는 그런 류의 것이기에, 나중에 별도의 글로 다뤄보려고 한다.     

 

3. 그림대회 메달

초등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됐을 때, 지역 신문사가 주최한 사생대회에서 운 좋게도 상을 탔다. 무려 메달까지 받아서 아주 기분이 좋았는데, 집에 오는 길에 메달을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다. 엄마는 그것을 두고두고 아까워했다.


정말 이상하다. 그때 분명히 책가방에 메달을 넣어두었는데. 그게 어디로 증발한 걸까?     


4. 다이어리

위의 그 덜렁거리는 저학년이 커서 고학년이 되었다. 당시 여자아이들 사이에서는 다이어리 꾸미기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었다. 나 역시 유행에 편승해 엄마를 졸라 그것을 샀다. 그리고 예쁜 속지를 사서 친구들과 나눠 가지면서 다이어리를 점점 더 두껍게 만들었다. 그때는 다이어리가 빵빵할수록 선망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정성들여 만든 그 배불뚝이 다이어리를 잃어버렸다. 엄마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고 나는 또 눈물을 짰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머리맡에 있는 물건을 보고 한층 더 눈물을 짰다. 거기엔 새 다이어리가 엄마의 편지와 함께 놓여 있었다.     





갑자기 긴 시간을 건너뛰어, 헐랭한 어린이는 성인이 되었다. 그 사이에는 잃어버린 게 없냐고? 신기하게도 청소년기에는 지금까지도 기억할 만한 임팩트 있는 분실사건이 없었다. 그때는 내가 공부에 지쳐서 비정상이었던 탓이 아닐까 한다.     


5. 기숙사 열쇠

애초에 열쇠라는 물건은 나와는 상극인 것이다. 모든 열쇠란 열쇠는 나한테 오는 순간 세상을 떠도는 미아가 될 운명이다.      


대학 시절 새 학기의 시작과 동시에 기숙사에 입실하면서 새 방의 열쇠를 받았다. 그리고 바로 잃어버렸다. 당일 저녁에 열쇠의 행방을 찾았는데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6. 파우치          

20대 중반, KTX를 타고 서울에 다녀오다가 화장실에 파우치를 두고 왔다. 집에 돌아와 가방을 풀 때 그 사실을 알았다. 황급히 역무실에 전화를 걸어보니 내 것이 틀림없는 파우치를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 집에서 KTX 역까지는 자가용으로 가도 30분은 걸리는 거리다. 택시를 타면 2만원 정도의 요금이 나온다. 당시에는 자차가 없었던 내가 그때 뭘 타고 다시 역으로 갔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난생처음 역무실이라는 곳에 들어가 보았다. 다행히 파우치는 무사했다.     


7. 휴대폰

그렇다. 내 분실의 역사에 휴대폰이 등장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목숨줄이나 다름없는 휴대폰 역시 내 손에 들어온 이상 분실물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역시 20대 시절, 친구들이랑 통영에 놀러 갔다가 케이블카에 휴대폰을 두고 내렸다. 그것으로 빠빠이. 다시는 그 폰을 찾을 수 없었다.     


8. 휴대폰 2

남편이랑 같이 택시에 탔다가 뒷좌석에 고이 두고 내렸다. 심지어 산 지 일주일도 안 된 새 폰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전화를 걸었더니, 기적적으로 기사님이 받으셨다. 우리가 있는 곳으로 폰을 돌려주러 오신 기사님께 감사의 표시를 했더니, 너무나도 좋아하셨다. 그래도 이 건은 해피엔딩이라서 다행이다.

    

9. 치아 유지장치

 교정한 지 몇 년이 지났음에도 성실히 유지장치를 끼곤 했다. 가족끼리 외식하러 빕스에 갔을 때도 끼고 있었다. 밥 먹기 전에 빼서 티슈에 싸서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한 시간 동안 치열하게 먹고 나니 그것이 온데간데 없었다. 식탁을 보고 깨달았다. 중간중간 우리의 입을 닦고 나서 올려둔 티슈 더미와 유지장치를 감싸고 있었던 티슈 더미의 겉모습이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을. 빕스 알바생은 자기 일을 충실히 했을 뿐이었다.      


새 유지장치를 맞추는 가격은 40만원 정도였다. 내가 죽상이 되어 남편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자, 그는 화를 내지 않고 말했다. 다음번에 또 잃어버리면 그땐 그냥 그거 없이 살자.     


10. 차 키

 그러니까 모든 종류의 열쇠는 나와 상극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다음날 꼭 차를 써야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차 키가 보이지 않았다. 그걸 알아차린 시간도 한밤중이었다.    

 

동네의 열쇠집 한 다섯 군데에 연락을 돌린 끝에 바로 출동이 가능하다는 곳을 찾았다. 열쇠공 아저씨는 전문기술인의 위엄을 보이며 한 시간 안에 감쪽같이 두 개의 키를 만들어내었다. 나는 그 솜씨에 감탄하며 8만원의 비용을 지불했다.     


그나마 내 차가 오래된 모델이라서 옛날식의 수동 키였기에 망정이지, 전자 키 같았으면 어림도 없었다.    




이상이 지금 당장 기억나는 열 가지의 내 주요 분실물들이다.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헐랭함이라고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뒤지지 않는 나는 기억도 못하는, 잃어버린 물건들이 많을 것이다.      


앞으로 나는 뭘 또 잃어버릴 것인가? 제발 치아 유지장치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거 한 번 더 잃어버리면 남편이 진심으로 화를 낼 것 같다. 비싼 돈 주고 만든 가지런한 치아를 다시 되돌리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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