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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Apr 08. 2023

수학의 정석이 날 죽이네

포기할 수 없었던 수학 공부의 추억

 남편에게는 신기한 점이 몇 가지 있다. 예를 들면 극도로 복잡한 게임을 잘한다든가, 아무데나 잘 드러눕는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그 외에 좀더 있어 보이는 특징으로는 수학을 잘하는 공대 출신 남자라는 것이 있다. 나는 그 점이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사람이 어떻게 수학을 잘할 수 있는가?

     

 이렇게 말하면 나도 수십만 명의 수포자 중 한 명으로 보이겠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난 고등학교 3년 내내 거짓말 안 하고 80프로는 수학 공부만 했다 (물론 수학에 대한 본질적인 마인드는 수포자의 그것과 다를 게 없다).  나의 평균 등급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그놈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만약 그때 학원을 다녔다면 80프로가 아닌 50프로만 투자했어도 비슷한 성적을 낼 수 있었을 것 같다. 남들 다 다니는 입시학원을 왜 안 다녔냐고? 그때도 덕후였던 나는 야자 끝나고 덕질을 해야 했기 때문에 학원 갈 시간이 없었다.

          



 대신 나는 수능 만점자들의 말처럼 학교 수업에 충실하기로 했다. 그리고 자습을 도와줄 제1의 기본서를 <수학의 정석>으로 정했다.  

   

 당시 기본서의 양대 산맥은 <개념원리>와 정석이었는데, 내겐 정석이 개념원리보다 좀더 이해하기 쉬웠다. 야자 시간에, 또 독서실에서, 나는 정석 기본형을 파고파고 또 파기 시작했다.

     

 어찌나 팠던지 책이 엉망진창으로 상해 버렸다. 어처구니없이 약해진 제본 탓에 그 두꺼운 책등에서 책장이 마구 분리되어 떨어졌고, 표지는 하드커버가 무색하게 덜렁덜렁 간신히 붙어만 있는 수준이었다.

      

 나는 커다란 청테이프를 가져다 벅벅, 뜯은 후 책등과 표지를 대충 접합했다. 다 떨어진 내지는 투명 테이프를 역시 박박,  뜯어 붙였다. 보수가 끝난 내 정석 책은 누가 봐도 언니 오빠에게 물려받은 듯한, 한 10년은 돼 보이는 상처투성이의 몰골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점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내가 수학 공부에 기울인 노력이 물리적인 실체로 드러나는 듯해서였다.

     

 그러나 이토록 애를 써내 수준으로는 기본 정석조차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특히 연습문제는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대부분 풀 수 없었는데, 그게 너무 화가 났다. 지치기도 했다.


 그러면 과부하로 잔뜩 열이 올라 화끈화끈 지끈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쥐고, 씩씩거리며 책 표지에다가 낙서를 했다. 사진에 보이는 낙서들이 그때 써 지른 것들이다.

     

 

그렇게 동고동락하면서 저 정석이는 나에게 애증의 대상이 되었다. 너덜너덜해진 겉모습만큼 정이 들었다가도, 유달리 어려운 단원에서는 풀이 도구가 되곤 했다.



 

 정석이가 자기 몸을 망가뜨려 가며 나를 도운 시간은 헛되지 않았다. 대망의 수능 결과, 수리영역에서 2등급을 받은 것이다.

     

 어차피 1등급은 모의고사에서도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등급이었고, 3등급이나 심지어 4등급까지도 나왔던 적이 있었기에 2등급은 충분히 만족스러운 성적이었다.

     

 수능이 끝난 후 많은 친구들이 각종 참고서와 문제집을 가차없이 처단했지만, 나는 정든 정석이를 버리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그것을 동생에게 물려주었다. 그리고 홀연히 대학으로 떠났다.

     



 동생은 나만큼 정석이에게 애정을 가지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다행히 버리지는 않아서, 지금도 그것은 친정집 동생 방 책장 한구석에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앉아 있다. 친정에 갈 때마다 그 모습을 보면 아련한 추억이 떠오른다.

    

 독서실에 들어서는 순간 코에 와닿던 특유의 차분하고 고요한 냄새. 둥그런 커튼을 쳐놓고 앉아 있었던 1인용 책상. 운좋게 길에서 주웠던 낡은 mp3와 잠깐씩 엎드려 듣곤 했던 노래들. 공부 시간을 재기 위한 스톱워치와 틀린 문제를 표시했던 빨간 볼펜. 수없이 많은 밤을 풀리지 않는 문제들로 씨름했던 열아홉 살.

     

 그 시절의 유품과 같이 남은 정석 책을 보면 어린 내가 쏟아부었던 치열한 노력의 시간이 그립다. 언제 그렇게 무언가를 열심히 공부할 수 있을까. 오직 나만을 위한 시간이 간절한 지금, 오래된 정석 책의 존재가 더 소중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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