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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May 12. 2023

남편이의 슬기로운 게임생활

남편의 게임생활은 2018년 전과 후로 나뉜다. 그때가 바로 플레이스테이션을 산 해이기 때문이다.

     

그해 9월, 나는 올해는 남편의 생일선물로 무얼 사줘야 할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물욕이라는 게 없었다. 이걸 사줘도 그만, 저걸 사줘도 그만, 다 그만그만한 반응을 보일 것이 뻔했다.     

 

그런데 언젠가 인터넷에서 남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선물은 전자제품이라는 글을 본 것이 기억났다. 그래, 바로 그거다! 전자제품!     


그런데 어떤 전자제품을 사줘야 남편이 좋아할까? 폰은 바꾼지 얼마 안 됐고, 컴퓨터는 본인이 직접 조립한 좋은 물건이 건재하고, 태블릿은 별 관심이 없을 듯하고.      


결론은 역시 게임기밖에 없었다.     


플레이스테이션4는 남편이 직접 고른 게임기였다. 그는 기기를 받자마자 아주 신이 나서 거실 티비에 연결하고 각종 게임을 다운받았다.      


그러나 갓 태어난 아기가 있던 우리 집은 그가 마음껏 플스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못 되었다. 육아하느라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거니와, 티비에 게임 화면이 뜨면 아기가 멍하니 쳐다보는 바람에 너무 이른 미디어 노출이 우려됐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껏 산 플스가 무용지물이 되나 싶었지만 다행히 남편에게는 아주 훌륭한 멘토가 한 명 있었다. 오랜 친구가 그 분야의 선지자였던 것이다.      


남편은 친구의 말이란 말은 전부 금과옥조로 여기더니, 곧 거실에 있는 게임기와 자기 방에 있는 컴퓨터를 연동시키기 시작했다. 랜선도 새로 구입하고, 한 이틀을 왔다갔다하며 분주하게 작업에 몰두하더니 드디어 원격으로 플스를 즐길 수 있는 시스템 구축에 성공했다.   

   

불편하긴 하지만 심지어 스마트폰으로도 게임이 구동되도록 조치해두었는데, 이 원격 시스템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강력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제주도에 놀러 갔을 때 호텔에서 시험 삼아 켜봤더니 정말로 게임이 플레이되는 게 아닌가! 우리가 사는 울산과 제주도는 최소 300킬로미터는 떨어져 있다. 그 엄청난 거리를 뛰어넘어 게임이 가동된 것이었다. 실로 놀라운 성능이었다.          




남편은 아기가 어릴 때는 주로 자기 방에서 작은 모니터를 보며 게임을 할 수 밖에 없었지만, 아이가 커가면서 주 서식지를 거실로 옮겨오기 시작했다.     

 

자연히 나와 아이가 오며 가며 그의 게임 화면을 구경할 때가 많아졌다. 남편은 종종 아이에게 자랑도 했다.

“수빈아, 이것 봐. 아빠가 몬스터를 이만큼이나 잡았어. 무기도 이렇게나 많이 얻었고.”

“우와~ 아빠 멋지다~!”     


남편이 하는 게임은 주로 RPG나 액션 장르였는데, 뭐가 됐든 간에 하여간 무지 어려웠다. 그렇다 보니 난다긴다하는 그의 캐릭터도 꽤 많이 죽었다.   

   

어떤 게임은 죽을 때마다 흘러나오는 특유의 BGM이 있어서, 나는 그걸 듣기만 해도 남편의 캐릭터가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었다. 너무 자주 죽는 것 같으면 나와 아이가 너나 할 것 없이 핀잔을 주었다.

“아빠, 또 죽었어?”

“여보, 또 죽었어?”     


특히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그에게 내가 말을 걸 때면, 캐릭터가 죽는 빈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졌다. 그때마다 그 BGM이 흘러나왔고, 난 나중에는 그 음악을 흥얼거리며 집안을 돌아다닐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거대한 티비에 띄워진 게임 화면을 매일 같이 보다 보니, 어째 그래픽 디자인이나 레벨업하는 방식이 매번 비슷한 것이었다. 분명 지난달에는 <엘든 링>을, 저번 주에는 <어쌔신크리드>를, 지금은 <갓 오브 워>를 한다고 했는데 말이다.      


“여보, 왜 여보가 하는 게임은 다 그림체가 비슷비슷해? 맨날 싸워서 이겨야 되는 것도 그렇고.”

나의 질문에 남편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여보, 여보 책장에 있는 책들 보면 다 비슷해 보이지만 다 다르잖아. 그거나 마찬가지야.”

아... 그런 것이었구나.     





남편은 자기의 취미를 나와 함께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본인 기준에) 쉬운 게임을 다운받아놓고 계속 나를 부추겼다. 바로 <오버쿡>이라는, 제한 시간 안에 요리와 서빙을 최대한 많이 해야 하는 식당 게임이었다.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작품으로 유명하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상상을 초월하는 게임치였다. 어린 시절 <크레이지 아케이드>라는 온라인게임이 유행했는데, 미로처럼 생긴 곳에서 적에게 쫓기다가 물폭탄을 뿅 낳아서 적을 물리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나는 매번 막다른 길에 몰리거나 내가 낳은 물폭탄에 내가 죽곤 했다. 정말 지지리도 못했던 것이다.     


그런 나에게 남편이 들고 온 <오버쿡>은 이름 그대로 능력의 한계를 훨씬 오버하는 것이었다. 나는 결국 패드를 내려놓으며(사실 던지고 싶었는데 그러면 남편이 난리를 피울 것이므로) 말했다.

“여보, 난 그냥 프린세스메이커나 할래.”

(프린세스 메이커는 여자아이를 공주로 키우는 게임으로,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게임이다.)          




누군가에게 우리의 이런 생활에 대해 얘기하면, 백이면 백 나에게 묻는다.

“어떻게 남편이 게임하는 걸 그렇게 아무렇지 않아 할 수 있어요?”

사실 나는 아무렇지 않아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의 게임 시간을 더 많이 확보해주기 위해 노력한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특별히 관대한 아내인 것처럼 보이지만 딱히 그렇진 않다. 내가 그럴 수 있는 건 단지, 남편 못지않게 나도 인생에서 취미가 너무너무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험한 세상을 살고 싶게 만드는, 삶의 목표나 마찬가지인 것이 취미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가장 힘든 점도 취미에 쏟을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런 내가 남편의 유일한 즐길 거리를 이해해주지 못한대서야 말이 안 된다.     


그리고 다행히, 남편은 가족을 내팽개치고 게임에만 몰두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육아도, 집안일도 모두 열심히 하면서, 틈틈이 시간을 내어 즐기는 것 뿐이다. 그러니 더욱더 반대할 이유가 없다.     


몇 개월 전 남편은 그토록 고대하던 플스5를 구매했다. 이전 버전인 4보다 디자인이 훨씬 세련되었다. 남편 말로는 어떤 이들은 새 게임기를 산 걸 아내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공기청정기라고 뻥을 친다고 하는데, 그만큼 평범한 가전제품처럼 생겼다.     


언젠가 나도 저걸로 프린세스메이커를 해야지. 그때는 남편을 밀어내고 내가 저 자릴 차지할 것이야.                    

우리 집 티비에 연결돼있는 플스5. 아주 세련된 디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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