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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Mar 28. 2016

취중진담

이젠 취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말



엇, 너 그 버릇 없어졌네?



쪼르르 빈 잔에 술을 채워주던 친구가 물었다. '그 버릇'이 어떤 걸 의미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린 우린 지난 한 때를 떠올렸다. '생각난 김에 한 번 해볼까?'라는 대답에 모두들 닭살스럽다며 야유를 보냈다. 그래, 그런 술버릇을 갖고 있던 때도 있었는데. 그 시절엔 적당히 취했을 때의 알딸딸한 느낌이 왜 그리 좋았는지, 지금과는 사뭇 다른 날들이었다. 조금 덜 자도 괜찮고, 조금 더 취해도 괜찮은, 흘러가는 시간은 저만치 미뤄둔 채 주고받는 대화에만 흠뻑 취해 있던 그때, 특이한 나의 술버릇도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그만큼 마셔보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 보지 못했을 버릇. 쟤 취했구나, 아니구나를 가늠할 수 있게 한 한 마디가 있었다.



우리 서로 장점 말해주기 할까?



이 말을 뱉을 때 즈음엔 어김없이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이 말을 왜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 하고 싶은 말을 거르지 않고 술술 내뱉고야 마는 상태.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누군가의 칭찬과 응원이 절실히 필요했던 때였는지도 모르겠다. 좋은 말만 듣고 싶은 마음이 무의식 중에 이런 식으로 표현된 게 아닐까. 비교적 점잖은 술버릇이라 생각했지만 오랜 친구 사이에선 선뜻 받아들이긴 부끄러운 그것이었다.



장점은 무슨. 낯간지럽게.



처음엔 모두 그랬다. 쑥스럽다는 듯 재빨리 화제를 돌리려 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 너부터 하자, 너부터. 내 앞에 앉아 있었단 이유로 한 친구가 가장 먼저 지목을 당했다.



나는 말이야. 네가 사람들한테 크게 영향 받지 않는 게 부러워. 소신이 있잖아. 누가 뭐라고 해도 내 갈 길 간다, 그런 뚝심. 나는 그게 잘 안 되거든. 살아가는 데 진짜 중요한 자세인 것 같아. 내가 날 가장 잘 아니까, 때로는 나만 믿어보는 것도 필요하잖아.


아, 맞아. 나도 같은 생각했어. 남들 다 뜯어말린 유학도 기어코 다 마치고 돌아왔잖아. 마음먹은 대로 산다는 게 진짜 쉽지 않은데.



처음이 어려웠지, 두 번은 쉬웠다. 한 명이 물꼬를 틀면 옆에 앉은 이도, 건너편에 앉은 이도 하나 둘 머릿속에만 담아두었던 장점을 차례로 이야기했다.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지만 항상 생각하고 있었다는 듯, 모두 망설임이 없었다.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낸 만큼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우린, 닮고 싶은 구석을 속속들이 꿰고 있었다.



엥? 진짜? 그게 왜 부러워? 난 그 면이 제일 싫은데.



그때 처음 알았다. 장점으로만 보였던 모습을 정작 본인은 못 견디게 싫어한다는 걸.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귀담아들을 줄 알아야 하는데, 이렇게 고집대로만 살면 안 되는데, 자주 자책하게 되는 부분이라고 했다. 의외인 건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우유부단한 게 싫었던 어느 아이의 단점이 누군가에겐 둥글둥글 모나지 않다는 장점으로, 말수가 적어 고민이라는 또 다른 아이의 단점이 무게감 있고 신뢰가 간다는 이도 있었다.


그랬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미운 구석이 누군가에겐 아주 매력적인 모습일 수 있는 거였다. '내 단점이 누군가에겐 장점일 수 있어요' 어릴 적, 어느 책에서 본 적이 있는 문구였지만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직접 듣게 되니 느낌이 사뭇 달랐다. '우리, 생각보다 그렇게 못나지 않았는데?' 꽤 오랜 시간 부끄럽다는 이유로 전하지 못했던 말들을 하나 둘 꺼내 놓으며, 본인만 몰랐던 예쁜 구석을 차츰 알아가게 됐다. 왜 너만 모르니. 우린 다 알고 있는데. 무뚝뚝한 몇 마디가 그날, 어찌나 큰 위안이 되었던지-


그때에 비해 술자리를 자주 갖진 못하지만, 이제 덜 붉어진 얼굴로, 덜 경직된 말투로 서로의 장점을 이야기한다. 자꾸만 넘어지고 넘어져 도전하는 것조차 두려웠던 그때, 너는 겁이 없어 부럽다는,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극이 된다는, 그 말에 다시 무릎을 털고 일어날 수 있었던 것처럼- 나의 솔직한 몇 마디가 누군가에게 다시 일어설 힘이 된다고 생각하면 몇 번이고 말할 수 있다. 너의 그런 점을 닮고 싶어. 너 스스로도 알았으면 좋겠어,라고. 그런 시간들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는 나는, 더 이상 부끄러움 뒤에 숨어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이제 술 한 방울 없이도 누군가의 예쁜 구석을 말할 수 있게 됐다. 그러는 사이, 사람들의 단점보다 장점을 먼저 보는 사람이 되었고, 기쁘게도 그게 나의 장점이 되어가는 것 같다.



오늘, 스스로가 한없이 작게 느껴지는 당신이라면 생각은 잠시 거둬두고,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 '네가 생각하는 내 장점은 뭐야?' 질문을 던져보자. 그리고 그 사람이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하는 말들에 귀 기울이며 마음 곳곳에 새겨두자. 가장 좋아하는 노랫말처럼, 가장 좋아하는 책 속의 문구처럼, 언제고 다시 꺼내 볼 수 있게. 당신이 못난 구석이라 여기는 그 부분이 누군가에겐 참으로 닮고 싶은 아주 예쁜 구석일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알지만 오직 당신만 모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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