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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Mar 21. 2016

근사한 실수

일상에서 만난 작은 여행



봄기운이 완연했던 금요일. 갑작스럽게 출장 일정이 잡혔다. 장소는 까마득한 6년 전 겨울, 중학교 친구들과 함께 다녀온 것이 마지막인 부산이었다. 찬 바람이 쌩쌩부는 해운대에서 기어코 사진을 찍어야겠다며 연신 점프를 해대던 기억에 웃음이 났다. 그러고 보니 그때 봤던 광안대교 야경도 차암 멋있었는데.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곳임에도 쉽게 발길이 닿지 않아 이 기회가 아니면 몇 년이고 다시 찾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이번 출장은 일이라기보단 여행에 가깝게 느껴졌다.



들떠 있던 것도 잠시, 당장 내일 떠나야 하는 일정이라 서둘러 표를 알아봤다. KTX는 물론, 무궁화호도 별로 타 본 적이 없어 허둥댔다. '그냥 어플로 끊음 되지 않아?'라는 물음에 처음으로 코레일 어플도 설치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좀 해볼 걸. 얼리어답터는커녕, 새로운 제품 소식도 동료들의 수다 속에서 겨우 찾아 듣는,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사람이라 남들은 몇 분이면 끊는 기차표를 1시간 가까이 걸려 겨우겨우 티켓팅을 했다. 다행히 모든 자리를 끊을 수 있었지만 딱 한 자리는 역방향으로 예약이 됐다. 멀미에 취약한 다른 분들 대신 내가 그 자리에 앉기로 했다.



금요일 아침. 따뜻해진 날씨 때문인지 서울역은 여행을 떠나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단정한 옷차림에 구두를 신은 우리완 달리 모두들 가벼운 옷차림, 설렘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중 부산행 기차에 오르는 사람들은 실망한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부산에 내리고 있는 빗방울들이 조금씩 굵어지고 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비야 어찌 됐든 부산이니까. 그들 사이에서 나는 잔뜩 들뜬 채로 기차에 올랐다. 이따 내릴 때 봬요, 인사를 하고 자리를 찾아 성큼성큼 걸어갔다. 좌석에 앉으려는 찰나, 맞은편에 앉은 두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이어폰을 꽂았다. 3시간가량 낯선 이와 내내 마주 보고 가야 하다니. 눈이 마주칠 때마다 서로 어색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직접 앉아보니 생각보다 매우 멋쩍은 일이구나. 투둥 투둥, 기차가 조금씩 속도를 올리기 시작하자 바로 앞에 앉은 여자가 할 말이 있는 듯 이어폰을 빼줄 수 있냐는 제스처를 취했다.



저, 그쪽 옆자리에 앉을 사람은 천안에서 탈 거라 그 전까진 짐 올려두시고, 편하게 가셔도 돼요. 근데 왜 이 자리로 끊으셨어요? 보통 세 사람이 예약돼 있으면 다른 자리로 끊으시는데.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아차 싶었다. 좌석의 방향만 확인했을 뿐, 주위에 있는 세 자리가 이미 예약돼 있다는 건 전혀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왜 꼼꼼하게 못 봤지. 여기 말고도 자리가 그렇게 많았는데. 아, 3시간 동안 세 친구 사이에 껴서 가게 생겼네. KTX를 타보는 게 처음이긴 했지만, 내가 생각해도 참 바보 같은 실수였다.



다른 자리는 다 등지고 가는데 왜 제 자리만 마주 보고 가나 궁금해하던 참이었어요. 어쩐지 이상하다 했네요. 사실 제가 KTX를 처음 타보거든요.



내가 쑥스러운 듯 대답하자, 그녀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가방에 있던 과일들을 꺼내 건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얘기하면서 가요! 이것도 인연이잖아요. 여행의 재미이기도 하고.



친구 사이로 보였던 둘은 꽤 오랜 기간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동료라고 했다. '언니'라는 호칭과 친근한 말투. 매우 가까운 사이 같아 보였다. 친구끼리 여행 가는 줄 알았어요, 라는 말에 우리도 회사 일 때문에 가는 거예요, 라며 한숨을 폭 쉬었다. 그래도 부산이니 다행이죠. 그녀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천안역에 다다랐다. 창문으로 또 한 명의 동료가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양손 가득 먹을거리를 가지고 좌석에 앉았다. 간단히 내 소개를 하자 안 그래도 김밥을 잔뜩 사 왔다며 선뜻 젓가락을 건넸다.



이게 천안에만 파는 아주 유명한 꼬마김밥이에요. 참치도 있고, 치즈도 있고, 멸치도 있고. 종류 별로 섞여있어요. 이 가게 차린 아저씨가 완전 대박이 나서 차를 몇 대나 샀대요, 글쎄. 자, 얼른 먹어봐요.



우리는 접시 가득 쌓여 있는 꼬마 김밥을 함께 나눠먹으며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혼자 갈 때 보려고 챙긴 책, 다운받아두었던 영상, 그리고 이어폰. 조용하고, 잔잔하게 흘러갈 줄만 알았던 나의 3시간이 새로운 이야기들로 채워졌다. 낯설지만 낯설어서 할 수 있는 이야기들. 잘 모르지만 잘 몰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들로. 그런 대화는 참으로 오랜만인 것 같았다. 언제부턴가 잊고 살았나 보다. 여행이란 것과 저만치 멀어져버린 나의 일상, 익숙한 사람들과 보내는 비슷비슷한 하루. 그 자그마한 세상이 전부인 마냥, 그 세상 말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마냥. 나는 문득, 그동안 잊고 지내던 세상이 궁금해져 당장이라도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훌쩍 떠나기엔 일러, 아직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잖아, 발목을 붙잡던 몇몇 이유들이 그 순간만큼은 핑계로 여겨졌다. 여행에서나 마주칠 법한 이 뜻밖의 만남이 내 가슴을 뜨겁게 만든 것 같았다.



혼자서 안 심심했어?



오는 내내 잠에 취해 있던 팀장님이 부산역을 빠져나오며 물었다. 전혀요. 나는 씩 웃어 보였다. 어느새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그녀들을 보며 여행이 주는 묘미가 바로 이런 거겠지, 생각했다.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 바보 같았던 순간도 훗날 웃어넘길 수 있는 에피소드로 남는 것. 그리고 이런 자그마한 실수가 때론 예쁜 짓도 한다는 것-


특히 그날의 실수는 생각보다 꽤나 근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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