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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Apr 12. 2016

서른 번째 꽃비

빨리 도착하지 못하더라도



종일 꽃비가 내렸다. 학교 앞에 옹기종기 모인 아이들은 분홍빛 꽃잎을 모으며 한참을 놀았다. 이제 겨우 세네 번째 봄을 맞이했을 꼬마는 푸른 새싹만 보고도 까르르 숨이 넘어가게 웃었다. 아이의 곁에서 아빠는 쉴 새 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잠시 바람을 쐬러 나온 나는 한참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세 먼지 농도가 높으니 외출을 삼가라는 기사가 잔뜩 올라왔지만, 실내에만 머물기엔 너무도 아까운 날씨였다.



"나 오늘은 걸어갈까 봐. 조심히 들어가, 언니!"



생각보다 일찍 퇴근하게 되자, 회사 동생은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가겠다고 했다. 방향이 달라 인사를 하려는 찰나, 얼마 전 이사를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 오늘은 다른 정류장으로 가야 하는구나. 나는 천천히 낯선 정류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먼발치에 이어폰을 꽂은 채 흩날리는 벚꽃잎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다들 봄이 와서 좋은가 보다. 무뚝뚝하기만 했던 그들의 얼굴에도 조금씩 웃음기가 번졌다. 나는 그 틈에 섞여 낯선 번호의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는 생각보다 꽤 먼 길을 돌아갔다. 출발지와 목적지만 확인한 게 실수였다. 집 앞까지 가긴 하지만, 거쳐야 하는 정류장만 해도 10개가 넘었다. 그냥 갈아탈까, 잠시 생각하다 가장 뒷자리로 옮기기로 했다. 어차피 집에 가는 건데, 좀 천천히 가지 뭐. 버스는 집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지만, 옛 기억이 새겨진 곳으로 나를 데려다주었다.



와, 여기가 이렇게 예뻤었나.



반쯤 열어둔 창문 틈으로 꽃비가 새어 들어왔다. 20대 중반, 무언가에 항상 쫓기며 살았다 생각되는 그때. 10개월이라는 꽤 긴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서울역에 내려 건물이 있는 곳까지 매일 같은 길을 지나쳤건만, 이토록 예쁜 벚꽃을 본 기억은 없었다. 몇 년 사이, 갑자기 생긴 건 아닐 텐데. 스르륵 다음 정류장으로 몸을 기울이는 버스에서 정신없이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가던 그 시절의 나를 보았다. 딱 한 번 밖에 없었을 그때의 봄. 회사에 늦을까 봐, 업무에 지장이 있을까 봐, 조마조마해하는 사이 그냥 흘려보낸 것들이 너무도 많았던 것 같았다.



아가씨, 내가 다시 아가씨 나이로 돌아갈 수 있다면 신랑 손잡고 실컷 벚꽃 보러 다닐 거야. 우리 신랑도, 나도 일만 하느라 그 좋은 것들은 그냥 보내버렸거든. 요즘은 시간만 나면 바깥 구경하러 나가는데, 그때랑은 또 느낌이 달라. 그 나이에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잖아. 얼른 머리 자르고 저-기 꽃구경 다녀와요. 밤인데도 불 켜놓은 것처럼 눈 부셔.



지난주, 머리를 다듬어주신 미용실 아주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따뜻해진 날씨, 긴 머리를 자르고 싶단 순간적인 생각에 무작정 들어간 곳. 그곳엔 나보다도 더 소녀 같은 분이 계셨다. 20대 초반, 처음 미용 일을 시작해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까지 같은 일을 하고 계시다는 아주머니는 딸과 아들 이야기를 한참 하시다, 문득 창밖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어둑어둑해진 거리엔 수많은 사람들이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저때는 모르지. 하기야 지금도 잘 모르는데. 혼잣말로 중얼거리셨다.



엥? 엄청 돌아갔네. 건너편에서 탔음 더 빨리 도착했을 텐데.



평소보다 두 세배의 시간이 걸려 도착한 정류장.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목적지가 있어도 괜찮고, 설령 없다 해도 괜찮지 않을까. 빠른 속도로 달려봐도 좋고, 어딘가에 털썩 앉아봐도 좋고, 누군가와 함께이거나 혼자이거나 둘 중 어떤 것이라도 괜찮지 않을까. 누구든 분홍빛 미소를 짓게 만드는 저 꽃비를 무심히 지나치며 살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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